낙태 처벌의 사회사
낙태 처벌의 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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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오락이 없던 시대에 섹스는 오직 하나뿐인 즐거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대인은 섹스를 하나의 신격화된 신앙으로 격상해 제전을 짓고 숭배하면서 사원매춘(寺院賣春) 시대가 개막된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제약 없는 섹스를 위해 고대 로마인들은 견고한 결혼 제도를 설치하지 않고 살았다. 부부관계를 인정받지 못하는 남녀 사이에서 생긴 자식은 국가에서 군인으로 징발해 가거나 여자는 사원 매춘부로 봉직시켰기 때문에 사생아 문제는 당사자에게 별로 거추장스러운 부담이 아니었다.
폼페이 벽화로 남은 그림에 창녀가 다수 등장하는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을 대변하는 좋은 증거물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유스러운 섹스가 남긴 후유증을 국가가 처리해 준다 해도 40주라는 긴 수태기간과 출산 후 감당해야 할 육아라는 무거운 짐은 젊은 남녀로서 생업에 막대한 장애 요인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인류는 임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의 강구에 골몰해 왔고, 그것이 실패했을 경우 임신중절의 수단을 열심히 찾았다. 고대에 이용된 유일한 임신중절은 태아가 있는 자궁부에 충격을 가해 유산을 유도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궁 밖으로 배출되지 못한 태반과 태아조직들로 인한 지속적 출혈을 막을 만한 외과적 수술법을 모르던 시기에 후유증 수습이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주사제로 된 자궁수축제도 없거니와 주사법이라는 투약방법이 개발되지 않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유효한 방법이 나오지 않은 가운데 대량출혈로 인한 사망사고의 위험 때문에 임신중절은 중세의 가톨릭 사회에서 금지된 시술이었다. 의료기술의 미비로 말미암아 원하지 않는 자식은 임신중절이 아니고 출산 후에 살해하는 방법으로 제거했다고 의학문서에 사료로서 남아 있다.
17세기께 급증한 유럽의 고아원 붐은 인도적 견지에서 영아살해를 줄이려는 목적에서 설치된 것들이었다. 청교도에 의해 통치되었던 초기 아메리카는 1828년 뉴욕주가 임신중절금지법을 제정한 것을 필두로 법률화되기 시작했다. 그때 법률의 골자는 두 가지였다. 우선 태아가 태동(胎動)을 보이기 이전의 중절은 경범죄로 분류했다.
그러나 태동이 확인된 후 시행된 임신중절은 ‘2급살인’으로 규정해 사형에 준하는 중형을 선고했다. 이런 중벌주의는 모체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규정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낙태에 관한 도덕적 시비와 그에 편승해 괴이하게도 낙태로 인한 의료사고가 그치지 않았다. 또한 공업화된 사회에 필요한 노동력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 틈새에서 백인 중산층계급의 출생률이 낮아져 갔다. 이 인구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행정조치로서 갑자기 임신중절에 대한 비판여론이 자연스럽게 비등했다. 성도덕에서도, 의학적 및 인구학적 견지에서도 임신중절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여론이 사회를 지배했다. 이와 때를 맞춰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는 임신중절이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1937년 시행된 ‘로와 웨이드 판결’이었다.
이처럼 19세기 미국이 도입한 성에 관한 법률의 태반은 20세기 후반까지 효력을 잃지 않고 이어졌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임신중절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으나 인구 급증을 방지하기 위한 가족계획으로 정부 차원에서 피임을 적극 권장하면서 이 법은 사문화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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