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와 Guru의 대화 .5
CEO와 Guru의 대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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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 회장 요즘 같은 불황기엔 사람들이 값싸고 디자인도 좋은 제품을 선호합니다. 불황기에는 굿 디자인만 살아남게 마련이죠. 저는 디자인에도 블루오션이 있다고 봅니다.
바로 저가 상품에 디자인을 도입하는 것이죠.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는 디자인을 개척하면 매스 마켓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홈플러스가 프라이빗 브랜드(PB) 상품에 디자인을 도입한 것이 그 단초라고 할 수 있죠. 저가 시장에 디자인을 침투시킨 겁니다.
김영세 사장 이 회장님이 대중에게 디자인 문화를 전파하신 겁니다. 디자인이 대중화하면 대중의 생활 수준이 높아집니다. 저 역시 디자인 쪽엔 대박 시장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디자인 시장은 럭셔리 상품의 고가 시장과 초저가 시장만 있고 중간이 비어 있어요. 롱테일 이론에 따르면 꼬리 부분이 계속 길어지는데 우리나라는 머리와 꼬리 끝 부분만 있고, 몸통이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꼬리가 길어지는 것은 머리 쪽 시장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노디자인이 참여한 홈플러스의 프리미엄 PB 상품이 대성공을 거둔다면 저로서도 자랑스럽겠지만 그보다 이런 발상이 더 광범하게 확산됐으면 합니다. 한국 상류층이 고가의 외국 제품을 구매하는 데 많은 돈을 쓰는데 한국 기업들도 디자인 전략을 바꿔야 합니다.
불황기라는 것은 셀러와 바이어 간에 갭이 생겼을 때를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승자는 늘 이기고 패자는 계속 지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실은 디자인은 비용을 더하는 게 아니라 가치를 더하는 겁니다. 그런 디자인은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고요. 좋은 디자인이라면 고객의 마음을 읽고 감동을 줘야죠. 감성 시대를 읽는 키워드는 온후지정(溫厚之情)입니다.
감성 시대란 따뜻한 정, 너그러운 마음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라는 거죠. 디자이너의 따뜻한 마음, 고객에 대한 사랑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세상이 온 겁니다. 산업화 시대를 관류한 중후장대(重厚長大), 정보화 시대를 풍미한 경박단소(輕薄短小)와 대비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대담을 한 날은 마침 어버이날이었다. 김 사장은 감성 시대 디자인의 이런 정신을 여러 해 전 어머니날 자신의 아들 윤민이가 엄마에게 건넨 선물을 보고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 해 어머니날 윤민이는 직접 그려서 만든 얇은 쿠폰 책을 엄마에게 선물했다.
표지를 넘기자 ‘세탁기 돌리기’ 쿠폰이 나왔다. 쿠폰의 유효 기간은 4개월. 엄마를 대신해 어느 날 세탁기를 돌려 주겠다는 서비스 쿠폰이었다.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어서 ‘차고 청소’, ‘엄마 차 세차하기’, ‘안마’, ‘유리창 닦기’ 등의 쿠폰이 이어졌다. 모두 제 각각 유효 기간이 표시돼 있었다.
마지막 쿠폰을 들여다보면서 엄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거기엔 ‘엄마 사랑하기’, 유효 기간은 ‘무제한(forever)’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 사장은 “이 사랑의 쿠폰 덕에 아내는 오래도록 행복해 했다”고 회고했다. “좋은 디자인은 바로 소비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소중한 진리를 그 쿠폰을 보고 되새기게 됐다”고 그는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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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 김 사장님과 만나면서 디자인 실용주의 철학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명품이나 디자인이 중요하지 저가품에 무슨 디자인이 필요하느냐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유통업 CEO들마저 내 생각이 곧 고객의 생각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고객 조사를 숱하게 해 봤지만 고객은 좋은 디자인을 원해요. 이것이 진실입니다. 고객은 가격도 싸야겠지만 디자인도 좋아야 한다고 일관되게 원했는데 그동안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겁니다.
이참에 디자인 실용주의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죠. 김영세 디자인의 세 요소가 심미성, 편의성, 경제성입니다. 보기 좋고 쓰기 편리할 뿐더러 만들기 쉬운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거죠. 이런 디자인을 추구하는 게 바로 디자인 실용주의입니다. 만들기 쉬운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은 그래야 코스트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머리를 짜내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 수를 줄이는 겁니다. 저는 이런 디자인을 영어로는 스마트 디자인, 우리말로는 ‘빼기 디자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더 아름다워 소비자들이 많이 찾고 생산자는 더 싸게 만들 수 있으니 이런 마술이 따로 없죠. 그래서 제가 디자인은 매직이라고 하는 겁니다. 홈플러스에서 상품 디자인을 저희에게 맡긴다고 했을 때 여러 사람이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디자인의 역할이 소비자를 기쁘게 만드는 것이라면 홈플러스의 고객도 백화점 고객과 마찬가지로 좋은 디자인을 누려야죠. 좋은 디자인을 채택해도 제품을 싸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밸류 업, 코스트 다운이죠. 회사엔 더 많은 이익이, 고객에겐 더 많은 가치가 돌아가는 이런 비즈니스 모델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승한 좋은 디자인에 대한 반응이 좋아 판매량이 크게 늘어나면 생산비가 절감돼 단가를 대폭 낮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디자인을 채택해도 추가로 비용이 들지 않는다면 이익이 훨씬 많이 남겠죠. 불황기에는 좋은 디자인이라야 살아남습니다. 마치 평균 공실률이 50%나 되지만, 좋은 건물은 빈 사무실이 없고 형편없는 건물은 사무실이 텅텅 비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디자인은 이미전스(imigience)입니다. 이미전스란 상상력(imagination)과 과학(science)의 합성어죠. 디자인은 다른 예술과 달리 예술인 동시에 과학입니다. 편리하게 만들어 고객의 사랑을 받으려면 과학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죠. 저는 경영과 마케팅에도 디자인을 도입했습니다. 회사의 비전, 사명 같은 것은 직원들에게 백 번 말해도 잘 전달이 안 됩니다.
이럴 때 디자인으로 시각화해서 표현하면 금세 알아듣습니다. 심지어 마케팅 회의에서도 디자인을 활용합니다. 40쪽가량 되는 프레젠테이션 보고서를 없애고 달랑 그림 한 장 띄워 놓고 회의를 하죠. 40쪽 가지고 하면 프레젠테이션이 되지만 한 장으로 하면 토론이 됩니다.
세계 최초로 디자인 요소를 도입한 마케팅 회의를 하는 거죠. 저는 되도록 모든 경영 활동을 디자인으로 표현해 보려고 합니다. 강의를 많이 다니는데, 저의 삶을 그래프로 정리해 보여 주고 당신의 삶을 디자인하라고 말합니다.
(이 회장은 홈플러스 ‘지속가능성 보고서’에 실린 비전 하우스라는 그림을 보여줬다. 집을 지을 땐 지반(핵심가치)에 말뚝(기업 문화)을 박고 주춧돌(경영원칙)을 놓은 후 그 위에 기둥(경영 전략)을 세우고 대들보(사업군)를 올려야 비로소 지붕(비전)을 덮을 수 있다. 그는 ‘최고의 가치를 제공하고 최고의 가치를 지닌 유통 회사’라는 홈플러스의 비전을 이런 구조물로 시각화해 직원들에게 입력시켰다.
CEO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기억하게 한 것이다. 이 그림엔 ‘디자인드 바이 SHL’이라고 그의 저작권이 표시돼 있다. 그는 “홈플러스는 대한민국 어느 기업보다 회사의 경영 체계를 직원들이 잘 이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세 제가 어느 자리에서 “디자인은 자기 자신의 인생 설계”라는 삼행시를 즉석에서 읊었는데, 이 회장님이야말로 인생의 디자이너, 기업의 디자이너시군요. 저는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세종대왕입니다. 두 사람 모두 15세기에 활동했죠. 600년 전 천지가 개벽해 동서양에서 동시에 천재가 나온 거예요.
다 빈치 때문에 디자이너가 됐지만 저는 세종대왕의 창의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분 덕에 우리가 대대손손 읽고 쓰는, 한글이라는 최고의 문화유산을 누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쟁력은 사실 한국인 그 자체입니다. 디자인 분야도 마찬가지예요.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 있는 CEO가 디자인 시장을 키웁니다.
이승한 저도 한글을 외국인에게 소개할 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디자인적이고 건축적인 알파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글 자체가 하나의 디자인이죠. 저는 디자인에도 밸류 체인이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뛰어난 디자인이라도 시장과 연결이 안 되면 소용이 없어요. 좋은 디자인이 나오려면 좋은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제도와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가 디자인 강국이 되려면 이런 요소들이 시스템적으로 잘 갖춰져야 합니다. 인식의 전환도 필요합니다. 단적으로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는 파트너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윈-윈 할 수 있습니다. 한 10년 전부터 제가 ‘협력(collaboration)의 경제’라는 용어를 썼는데, <협력경제학> (collabonomics)이라는 책도 나왔지만 파트너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김영세 그래서 홈플러스와 이노는 상품 기획 단계부터 팀을 이뤄 과정을 공유하면서 협력을 합니다. 디자이너가 상품 기획안을 내기도 하고 상품 기획하는 분들이 디자인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죠. 이때 중요한 게 바로 신뢰입니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사실 다 미지수거든요. 고(故) 정주영 회장이 “해 봤어?” 하고 물었듯이 디자인을 채택하거나 신상품을 개발할 때는 해 보지 않고 결정을 해야 하는 리스크가 따릅니다.
그런데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해 의욕적으로 시도할 때 실적이 이른바 하키스틱 형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되죠. 물론 실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협력 프로그램이 잘 가동돼야 하고요. 저도 미래의 희망은 협력에 있다고 봅니다. 가장 성공 가능성이 큰 비즈니스 모델은 혼계영 형입니다. 각각 배영, 평영, 접영, 자유형에 능한 선수들이 번갈아 헤엄치는 혼계영처럼 전문가들이 서로 협력하는 겁니다.
이때 창의적인 협력이 이뤄진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이 회장님은 디자인에 대한 안목도 상당히 높으신데 디자인에 관한 의사 결정을 할 때면 일부러 빠져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승한 프랭크 게리라는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건축가의 자질에 대해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건축가로서의 자질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클라이언트가 신통치 않으면 설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김 사장님도 설득력이 뛰어나던데요. 한편 CEO는 큰 흐름의 물길을 잡아주고 목표가 정해지면 달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디자인은 기업의 마지막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기에 디자인 관련 회의는 다 참석합니다. 디자인은 말하자면 마지막 퍼즐 조각입니다. 마지막 조각이 잘 맞지 않으면 최후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죠. 제4의 물결을 헤쳐가는 힘은 문화에서 나옵니다. 다가올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창의성이고 그 가시적인 성과가 디자인입니다. 디자인이 곧 모든 것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김영세 CEO들에게 디자인은 더 이상 럭셔리 카드가 아니고 서바이벌 카드입니다. 소비자들이 갈수록 깐깐해지기 때문이죠. 사실 디자인은 창의 산업(crebiz)의 꽃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경쟁력은 양적 성장과 하드웨어 산업에서 나왔는데, 이제 소프트 파워에서 우리의 미래를 찾아야 합니다. 협력경제학>
김영세 사장이 말하는 디자인 경영 디자인은 고객 사랑이다 감성 시대의 키워드는 온후지정이다. 무릇 고객의 마음을 읽고 감동을 줘야 한다. 좋은 디자인은 가치를 높이고 비용을 낮춘다 좋은 디자인은 경제적인 디자인이다. 좋은 디자인을 채택하면 만들기가 쉬워져 제조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 불황 땐 굿 디자인만 살아남는다 깐깐한 소비자들을 상대하려면 디자인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필요하지 않은 건 모두 빼는 ‘빼기 디자인’이 승부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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