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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


1936년께의 샤넬(왼쪽), 새 영화 ‘코코 샤넬’에서 샤넬 역을 연기한 오드리 토투.

프랑스의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새 전기 영화 ‘코코 샤넬(Coco Before Chanel:한국 8월 27일 개봉)’이 나왔다. 이 영화엔 평범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중요한 장면이 하나 있다. 패션의 1인자가 되기 전인 20대의 샤넬에게 연인 아서 카펠(‘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은 도빌(프랑스 해변 휴양 도시)의 여름 무도회에 함께 가자고 한다.

샤넬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성서에서 말하는 최초의 여성 ‘이브’ 이래 모든 여성의 공통적인 문제, 즉 ‘입고 갈 만한 옷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샤넬은 카펠과 함께 가까운 의상실에 가서 검은색 천을 고른 뒤 “코르셋을 입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 달라”고 말한다.

의상실 주인이 “그러면 볼품이 없다”고 경멸 조로 말하지만 샤넬은 “내가 말한 대로 해달라”고 잘라 말한다. 무도회장에서 이 ‘리틀 블랙 드레스(LBD: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색 이브닝 드레스로 후에 샤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를 입고 춤추는 샤넬(오드리 토투가 연기한다)에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린다.

그러나 샤넬은 마흔 살쯤이었던 1925년에야 LBD를 실제 제작했다. 카펠이 교통 사고로 사망한 지 한참 뒤였다. 영화 속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어쨌든 LBD가 탄생한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도 세계 각지의 여성들은 이 드레스를 칵테일 파티에서 유니폼처럼 즐겨 입는다.

샤넬의 인생 역정은 영화로 만들기에 안성맞춤일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로는 충분히 전달하기가 어렵다. ‘코코 샤넬’은 최근 1년 사이에 나온 세 번째 샤넬 전기 영화다. 아나 무글라리스가 젊은 코코 역을 연기한 ‘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는 지난 5월 열린 칸 영화제의 폐막작이었다.

또 라이프타임 채널에서 방영된 ‘코코 샤넬(Coco Chanel)’에서는 나이 든 샤넬을 셜리 맥레인이 연기했다. 맥레인이 연기에 심취한 나머지 프랑스 억양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어쨌든 샤넬의 인생 자체에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많기 때문에 별로 문제되진 않았다. 샤넬은 떠돌이 행상의 사생아로 태어나 열두 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나중에 백만장자가 됐다.

그녀는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최초의 여성이며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를 내놓았다. 그녀는 언제나 숫자 5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말했다(‘No. 5’라는 이름의 샤넬 향수가 시대를 초월한 인기 상품이 됐으니 그녀의 말은 옳았다). 영화 ‘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바탕이 된 책 ‘코코와 이고르(Coco and Igor)’의 저자 크리스 그린홀은 이렇게 말했다.

“샤넬은 모든 사람이 꿈꾸는 신데렐라 같은 삶을 살았다.” (여성들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일은 차치하더라도) 고아원 출신으로 백만장자가 된 사연만으로도 영화 몇 편 정도는 너끈히 만들 만하다. 하지만 샤넬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현대 여성의 스타일과 체취에 혁명을 일으켰다.

블루머(무릎 위나 아래를 고무줄로 졸라매는 여성용 운동 팬츠)를 개발한 여성해방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에 버금가는 업적이다. 샤넬사의 국제 홍보 책임자 마리-루이즈 드 클레르몽-토네르는 이렇게 말했다. “샤넬 이전에는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거나 선탠을 하거나 가짜 보석 장신구를 착용한 여자들을 촌뜨기나 매춘부로 여겼다.”

만약 프랑스에 여성 명사들의 얼굴만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이 있었다면 샤넬의 얼굴도 분명히 거기 새겨졌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여성 네 명을 들라면 에디트 피아프와 마리 앙트와네트, 잔다르크, 코코 샤넬을 꼽겠다”고 그린홀은 말했다. “나머지 세 명을 주제로 한 영화가 흥미진진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했기 때문에 다음은 샤넬 차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샤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은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을 준다. 여성 사업가와 여권주의자로서의 업적보다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화려한 패션계의 여왕으로 떠오른 과정만 부각시켰다. 게다가 영화 속의 샤넬은 늘 젊다.

라이프타임의 ‘코코 샤넬’에서도 나이 든 샤넬 역을 맡은 맥레인보다 젊은 시절의 샤넬 역을 연기한 바보라 보불로바의 모습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 샤넬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워낙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조명을 이해할 만도 하다. 가브리엘 샤넬[샤넬은 젊은 시절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가브리엘’이 본명이고 ‘코코’라는 예명은 그 시절의 대표곡 ‘코코리코(Ko Ko Ri Ko)’에서 따왔다]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샤넬은 파블로 피카소, 장 콕토 등 당대 문화계의 거물들과 친구였다. 여류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와는 친구인 동시에 숙적이었다.

샤넬은 또 나치 장교 한스 군터 폰 딩클라게와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웨스트민스터 공작 등과 연애했다[샤넬은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함께 했던 스코틀랜드 낚시 여행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전에는 남성복 소재로만 쓰이던 트위드(방모 직물의 일종)를 여성복에 도입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패션 전문 기자 수지 멘케스는 이렇게 말했다. “샤넬은 수수께끼 같은 배경, 영국 공작부터 러시아 백작에 이르는 매력적인 연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여권주의 패션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위치를 발판 삼아 자기 힘으로 패션 하우스를 설립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코르셋과 장식적인 패션에서 해방시켰다.”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이야기지만 이것으로 샤넬의 모습을 다 보여주진 못한다. 레이 찰스·잭슨 폴록 등 샤넬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이고 창조적인 남성을 주제로 한 영화들에서는 주인공의 성공이 연애담에 묻혀 무색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편견일까? “샤넬을 주제로 한 영화 중에서 그녀의 창조성을 제대로 조명한 작품은 한 편도 없다”고 멘케스는 말했다.

“온통 모자와 보석, 샤넬의 연인들 이야기뿐이다. 아름다운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지만 그녀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영화 ‘코코 샤넬’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패션계 최고의 위치에 오른 샤넬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나선형 계단 꼭대기에 앉아 패션쇼를 지휘한다.

그녀는 자신 앞에서 행진하는 모델들을 마치 군대를 사열하는 장군처럼 차갑고 거만하게 바라본다. 장난기 많으면서도 우아한 샤넬의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성공해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된 샤넬을 오만불손한 모습으로 그려 재미있으면서도 복잡한 그녀의 원래 성격이 왜곡된 듯하다.

“이 영화들만 보고 샤넬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클레르몽-토네르는 말했다. 토투는 샤넬 역을 훌륭하게 연기했지만 샤넬을 다룬 이전의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오드리 헵번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실제 샤넬은 오드리 헵번보다는 캐서린 헵번과 흡사한 스타일이다.

실제로 캐서린 헵번은 1969년 유일하게 출연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샤넬 역을 연기했다. 이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는 샤넬이 13년간의 공백을 깨고 패션계로 돌아오겠다고 계획하는 2막의 시작 부분이다. 막이 오르면서 헵번이 내뱉는 첫 번째 대사는 ‘빌어먹을!(Shit!: 원래 ‘배설물’이라는 뜻)’이다(헵번 자신이 이 대사를 대본에 추가했다). 코코 샤넬의 이야기라고 해서 (그녀의 향수처럼) 꼭 향기로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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