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의 진정한 ‘수호신’
월스트리트의 진정한 ‘수호신’
2008년 9월 18일, JP모건 체이스의 뉴욕 본사 48층에 있는 제이미 다이먼 회장 사무실의 전화 벨이 울렸다. 헨리 폴슨 당시 미국 재무장관의 전화였다. 그는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을 테니 파산 직전의 투자은행 모건 스탠리를 인수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6개월 새 그에게서 두 번째 받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였다. 시장이 요동쳤다. 8월 29일~10월 10일 사이 미국 증시의 주가가 27%나 주저앉았다. 리먼 브러더스는 이미 파산했고 메릴 린치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로 넘어갔으며 AIG는 연방정부로부터 850억 달러의 긴급융자를 지원 받았다.
다음 차례는 모건 스탠리냐 골드먼 삭스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부는 월스트리트가 전멸하는 사태만은 막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폴슨 재무장관이 다이먼에게 모건 스탠리를 아무런 대가 없이 넘기겠다고 제안한 참이었다. 지난 3월에도 다이먼은 정부의 압박으로 48시간 만에 번갯불에 콩 볶듯이 베어 스턴스의 인수를 합의해줬다.
이 거래로 다이먼은 정부가 모든 카드를 다 써버렸을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은행가로 입지를 굳혔다. 훗날 실라 베어 연방예금보험공사 회장은 “도움을 청하러 워싱턴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지만 돕기 위해 워싱턴을 찾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모건 스탠리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다이먼은 그 문제를 이사회에서 논의하겠다고 말했다지만 그는 처음부터 인수에 부정적이었다. 양쪽 직원들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고 위험은 배가되며 향후 수년간 회사에 부담이 되리라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이먼 측은 이미 파산 직전에 있던 워싱턴 뮤추얼 인수거래를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폴슨의 전화가 놀라웠던 점은 그런 요청을 할 만한 사람이 다이먼 말고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리먼 몰락 이후 월스트리트에 몰아친 100년 만의 재앙에 착실히 대비한 대형은행 경영자는 제이미 다이먼뿐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딴 회사들이 모험 투자를 계속할 동안 그의 회사는 한 해 전부터 모기지(특히 비우량 부문) 거래 규모를 과감히 줄여 왔다.
경제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가을 정부가 실시한 조치 중 다수가 효과를 본 듯했다(특히 신용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한 벤 버냉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이 그렇다). 그러나 위기가 한창일 때 당국자들은 매번 아주 간단한 대책에 의존하는 듯했다.
바로 제이미 다이먼에게 전화를 걸어 개입을 요청하는 방법을 말한다. 미국이 금융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동안 다이먼은 정부가 믿고 의지하는 은행가로 떠올랐다. JP모건 체이스에 대한 고객 선호도가 갈수록 높아진다는 사실도 뚜렷해졌다.
JP모건 체이스는 소매금융 시장 점유율이 계속 상승세를 보이며 2009년 상반기 중 투자은행에 가장 중요한 자금조달 항목에서 기존의 시장 선두업체 골드먼 삭스를 누르고 업계 1위로 올라섰다. 골드먼의 명성은 자자하지만 실제 규모는 다이먼의 회사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JP모건 체이스는 자산규모 2조 달러로 골드먼의 8900억 달러보다 배 이상 크다. 시가총액은 1600억 달러로 800억 달러인 골드먼의 갑절이다. 한마디로 제이미 다이먼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은행가다. “은행업은 멍청한 짓만 하지 않으면 아주 좋은 사업”이라고 다이먼의 열렬한 팬이 된 워런 버핏이 말했다.
“오래전 법률가 모리스 샤피로는 은행은 많은데 은행가가 적은 게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이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은행가다.”
3대째 은행업에 종사하는 집안 출신의 다이먼은 그리스 이민자의 손자다. 맨해튼 토박이로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서 성장한 그는 명문 브라우닝 스쿨을 전체 4등의 성적으로 마치고 터프스 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해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
비즈니스 스쿨의 급우인 주디 켄트와 결혼해 딸 셋을 뒀으며 지금은 파크 애비뉴에서 주로 활동한다. 이 거리는 10대 이후부터 그가 줄곧 살아왔으며 JP모건 체이스의 본사가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하버드를 나온 뒤 16년 동안 처음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그 뒤 시티그룹으로 회사를 옮겨가며 샌디 웨일 밑에서 경영자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웨일과 사이가 틀어져서 해고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 뒤로 다이먼은 뱅크 원의 최고경영자(CEO)가 됐고 2004년 JP모건 체이스와 합병한 뒤 CEO를 맡았다. 2008년 초에 이미 JP모건 체이스가 대다수 경쟁사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위험한 모기지 증권 투자의 유혹에 휘말리지 않은 덕분이었다. 결과적으로 2007년 손실처리 규모가 경쟁사들보다 훨씬 작았다. 그러나 2007년 실적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다이먼은 투자은행 부문과 대출채권의 실적 악화가 걱정거리였다. 1월 3일, 석유 값이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고 미국 달러는 곤두박질했으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불가피한 경기침체를 막으려고 금리를 인하했다.
JP모건 체이스 경영진은 회사 재무구조의 부실화를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한 끝에 마침내 업계의 다른 경쟁사들이 경제 전반의 침체로 휘청거릴 동안에도 충분히 버틸 만한 맷집을 키워놓았다. 그해 2월, JP모건 체이스의 연례 투자설명회(애널리스트와 주주들을 대상으로 최고경영자들이 하는 일련의 프레젠테이션)가 있던 날의 분위기는 엇갈렸다.
주택담보 대출 규모가 940억 달러에 달했으며 연체율이 급증했다. 최고재무책임자 마이크 캐버너프는 1분기에만 대손 충당금이 4억5000만 달러 이상 증가할 수도 있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우리는 얼마나 큰 주택위기가 다가오는지 내다보지 못했다”고 그는 실토했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상당 부분을 매각했지만 아직도 155억 달러 규모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택소유자 중 30일 이상 연체자가 12%를 웃돌았다. 하지만 다이먼은 일부 투자자가 시장 상황을 지나치게 우려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이런 위기가 처음은 아닙니다.” 그는 방청객들에게 말했다. “이 문제를 두고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끝나지 않습니다. 경기회복은 찾아옵니다.
그 전에 문을 닫는 곳도 있겠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았다. 몇 주가 채 안 돼 금융위기의 첫 번째 대형 희생자가 그의 방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3월 첫 주 월스트리트는 조용한 듯했지만 베어 스턴스(이하 베어는 베어 스턴스) 안에서는 커다란 혼란이 일었다.
1분기 실적이 양호하리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거래업체 사이에선 이 회사가 과연 살아남을까 하는 의구심이 갈수록 커졌다. 금융사들은 베어에 제공했던 신용을 환수하기 시작했고 경제전문 채널 CNBC는 그 회사가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3월 12일, 베어의 보유자금은 59억 달러에 불과했으며 주가는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베어의 투자를 대행하는 투자은행 라자드의 게리 파는 베어가 아직 회생 가능하다는 주장에 신뢰감을 더해줄 만한 영향력 있는 투자자를 찾으려고 열심히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 후보 명단의 1순위에 다이먼이 올라 있었다. 베어 스턴스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던 그 시각, 다이먼의 회사는 안정권에 접어들고 있었다.
JP모건 체이스가 신용 확장기 중 시장점유율을 확대했지만(다른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대출규정을 완화하거나 이자율 인하를 통해) 상대적으로 절제된 영업방식을 취한 덕분에 경제 혼란이 계속될 경우 위기에 처한 경쟁사 한둘 정도를 인수할 여유는 있었다.
3월 13일 목요일 오후 여섯시께 고위 간부들이 모인 회의실에 그가 불쑥 나타났다. 이날은 그의 52번째 생일이어서 아내, 부모, 큰딸 줄리아와 함께 저녁 약속이 있었다. 그리스 식당 아브라에서 생일축하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다이먼은 “우리에게 자기네 회사를 인수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는 전화를 또 받았다”고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말하나마나 투자 은행가 게리 파가 베어 스턴스를 대신해 한 전화였다. “그러나 ‘앞으로 12시간 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라는 말투는 분명 아니었다”고 캐버너프는 돌이켰다. 한 시간 뒤 식사 중이던 다이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게리 파가 베어 스턴스 CEO 앨런 슈워츠와 잠시 통화할 시간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다이먼이 휴대전화를 들고 식당 밖으로 나서자 슈워츠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정말로 도움이 필요해요.” 다이먼이 “얼마나요?”라고 물었다. 슈워츠의 답변은 “많게는 300억 달러”였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오.” 다이먼이 대답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슈워츠는 필사적이었다. 그는 하루짜리 초단기 대출이라도 고려해 달라고 졸랐다.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다이먼이 말했다. “검토할 시간이 없소. 우리는 실상을 모르잖소.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다이먼은 FRB와 재무부에 연락해 보라고 권하고는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다이먼은 식당을 나와 귀가해서도 거의 밤새도록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먼저 티머시 가이트너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에게 전화를 걸자 그는 베어를 도와주라고 종용했다. 정부당국자가 월스트리트 CEO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은근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다이먼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총재님, 우리 혼자서 할 순 없잖아요,” 그가 말했다. “그들이 주말까지만 버티도록 하면 시간을 좀 벌게 됩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얘기를 계속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이먼은 헨리 폴슨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FRB 의장과도 통화했다. 밤 11시 JP모건 체이스는 메디슨 애비뉴 383번지에 있는 베어 스턴스 본사로 신용분석팀을 파견했다.
그리고 새벽 2시 FRB와 증권거래위원회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합류했다. 다이먼은 그날 밤 내내 재무부와 FRB 관계자들과 통화했다. 14일 금요일 오전 6시쯤 다이먼은 신용 분석팀에 베어 스턴스를 여러 개로 조각 내 가치를 파악해서 3시간마다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무렵 하나의 계획이 수립됐다.
FRB는 베어 스턴스 같은 중개사 겸 투자은행에 직접 자금을 융자할 권한이 없었다. 따라서 은행인 JP모건에 자금을 대신 빌려주고 JP모건이 그 돈을 다시 베어에 대출하는 형식을 취했다. 오전 6시 45분, 다이먼 팀은 그런 거래의 보도자료 초안을 베어 경영진에 e-메일로 보냈다.
다음날 주식시장이 개장했을 때 베어 스턴스 주주들은 안심하는 듯했다. 주가는 전날 종가인 주당 57달러 선을 맴돌다가 개장 직후 30분 동안엔 62달러까지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채 안 가 주가는 반 토막 났다. 그날 저녁 베어의 CEO 앨런 슈워츠는 코네티컷주 그린위치의 자택으로 귀가하는 차 안에서 폴슨과 가이트너의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주말까지 ‘안정화 거래(stabilizing transaction)’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48시간 안에 베어를 매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슈워츠는 훗날 “주말 사이에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못 박은 탓에 모든 카드가 사라졌다”고 증언했다.
그 주말 동안 JP모건 체이스는 2000명을 동원해 베어의 장부를 샅샅이 훑고 잠재적인 거래 규모를 가늠했다. JP모건 체이스의 경영진은 단 1달러를 주고 베어 자산을 인수하더라도 모든 독성 자산을 털어내거나 위험 헤지를 한 뒤에 그만한 가치가 남느냐는 문제를 놓고 논쟁했다.
제시된 숫자는 모두 전체 가치를 개략적으로 산정할 목적으로 어림잡은 추정치였다(여기서는 20억 달러, 저기서는 5억 달러의 손실이 나왔다는 식). 이는 긍정적인 면을 보기 전에 부정적인 면을 철저히 분석해 보려는 일종의 다이먼 방식(Dimonology)이었다. 다이먼의 동료 중엔 베어 스턴스 인수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운용자산 규모 4000억 달러의 회사를 2~3일 만에 인수하려 시도한 사람은 역사상 없었다. 게다가 대차대조표는 허점투성이일 게 뻔했다. JP모건은 신중한 사업방식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이번 거래만큼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회사 간에 주당 10달러에 인수거래를 하는 가능성(단지 가능성이었다)이 거론됐다. 베어의 금요일 종가의 3분의 1 가격이었다.
일요일의 결정적인 순간에 다이먼이 가이트너에게 전화를 했다. 대화는 짧게 끝났다. 다이먼은 JP모건 체이스 혼자서 그 회사를 인수하기엔 위험성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협상용 발언이 아니었다”고 다이먼은 훗날 상원에서 증언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가이트너는 궁지에 몰렸다.
훗날 영민하고 젊은 미래의 행정가라는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녔지만 도산 직전의 은행에 대한 관심을 더는 끌어 모으지는 못했다. 행정가 경력에서 처음으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은행 구제노력이 실패할 위험에 빠졌다. 몇 분 뒤 가이트너가 다이먼에게 재차 전화해 거래를 성사시키도록 계속 노력하라고 압박했다.
사실상 베어 스턴스와 FRB가 모두 벽에 부닥쳤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협상의 주도권을 쥐었다는 점을 다이먼에게 은근히 주지시키고 있었다. 동시에 이번 거래는 꼭 성사시켜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이먼도 정부에 세 번씩이나 ‘노’라고 말하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아시아 증시가 개장하는 저녁 7시 이전에 베어가 뭔가 조치를 발표하지 않으면 회사 그리고 금융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붕괴될 위험성이 있었다. 베어의 플랜 B는 JP모건 체이스와의 거래였으며 플랜 C는 없었다. 당시 베어 스턴스 경영진 중엔 이 일요일의 사건들을 다이먼이 벌인 벼랑끝 전술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다이먼은 그런 해석에 발끈한다. “보통 한 달 걸리는 일을 말 그대로 48시간 안에 끝내야 했다”는 반론이다. 엄격한 분석을 즐기는 용의주도한 그가 너무 빨리 너무 무절제하게 사업을 벌였던 다른 회사 때문에 자기 회사를 위험에 빠뜨리도록 강요 받고 있었다. 실제로 가격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하향 조정됐다.
점심 직후 JP모건 관계자들이 베어 스턴스 CEO에게 전화를 걸어 주당 4달러 매수를 고려 중이라는 말을 흘렸다. 베어 스턴스 경영진은 터무니없는 가격이라며 분노했지만, 공식 제의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다이먼은 가이트너에게 정부가 베어 스턴스 부실자산에 대해 정확히 300억 달러에 달하는 지급보증을 제공하지 않으면 인수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깨달은 가이트너는 결국 300억 달러의 대출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다가 다이먼은 새로운 조언을 듣게 됐다. 일요일의 늦은 오후,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전화로 인수 계약에 관해 묻자 다이먼은 주당 4달러 인수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가격이 높은 듯한데”라고 폴슨이 답했다. “4달러보다 1달러가 낫지 않을까요? 낮은 가격을 제시할수록 구제금융의 느낌도 줄어들 텐데.” 폴슨의 제안에 다이먼은 베어 스턴스 주주들의 표를 의식하고 있으며, 그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하면 인수계약을 최종 허가할 주주들의 분노를 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가격을 2달러로 하향 조정했다”고 다이먼은 술회했다. 30분간 열띤 논의 끝에 베어 스턴스 이사회는 오후 6시 30분 만장일치로 주당 2달러 매각을 수락했다. 오후 7시 월스트리트저널이 인터넷 기사로 베어 스턴스의 매각 사실을 보도했을 때, 모건 스탠리 CEO 존 맥은 큰 소리로 2달러가 오타가 아닌지 확인할 정도였다.
이후 다이먼은 인수 가격을 주당 10달러로 인상했지만, 부유했던 베어 스턴스 직원 다수는 회사의 몰락으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금융자산이 눈앞에서 증발하는 걸 지켜봐야 했고, 다이먼과 JP모건을 향한 애꿎은 원망의 눈길은 쉬 수그러들지 않았다. 월요일이 되자 다이먼은 부하 직원들에게 “베어 스턴스 사람들을 만나봐야겠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미친 짓이라며 만류했다. 베어 스턴스의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선 위험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다이먼은 그들을 계속 피하면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다며 베어 스턴스 방문을 감행했다. 3월 19일 수요일, 방문 준비를 마친 다이먼은 베어 스턴스 2층 대회의실에서 400명의 베어 스턴스 경영진과의 회의를 잡았다.
체념과 조소의 분위기가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다이먼이 건너편 베어 스턴스 건물로 가기 위해 JP모건의 문을 나섰을 때 가랑비가 흩뿌렸다. 경호원이 다이먼의 머리 위로 우산을 펴주는 순간, 뉴욕타임스 기자가 사진을 찍었다. 집사를 대동한 듯한 사진이 다음 날 신문에 실리면서 다이먼은 돈 많은 악인으로 비쳐졌다.
베어 스턴스 인수에 관심을 보였던 워런 버핏은 다이먼이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직관적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높이 샀다. “모든 걸 완벽히 이해할 필요는 없다. 대강의 윤곽만 알면 된다. 방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의 몸무게가 300파운드인지 350파운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그가 뚱뚱하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 정도도 가늠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는 행동에 나설 수 있으며, 실제로 불완전한 정보만으로 행동에 옮기는 경우가 있다. 만약 다이먼이 베어 스턴스의 최대값이 x와 y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의 판단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은 익히 봐서 잘 안다”고 버핏은 말했다.
협상 과정에서 자사 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다이먼은 베어 스턴스 인수가 자선 행위가 아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결국엔 미국을 구하려고 인수를 감행했음을 분명히 했다. “JP모건이 인수하지 않았다면 베어 스턴스 파산은 금융 산업에 막대한 피해를 줬을 것”이라고 다이먼은 몇 주 뒤 미 상원금융위원회에서 진술했다.
뻔한 질문을 받으면 상대를 무시하는 듯이 행동하던 다이먼도, 이날 만은 그런 기색 없이 엄숙하게 질문에 답했다. 폭풍이 휩쓸고 갔던 3월의 한 주, 명예를 잃은 사람도 있었지만 새롭게 명예를 얻거나 드높인 이도 있었다. 정부의 인수 관여가 장기적으로 가져올 영향에 대한 의심도 있었지만, 폴슨과 버냉키, 가이트너는 대체적으로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이들은 시장을 안정시키고, 부실 금융기관을 퇴출하고, 적절한 시점에 재할인 창구대출을 지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6개월 후 이들은 리먼브러더스 파산이라는 보다 큰 파국에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했다는 이유로 언론의 뭇매를 맞는 운명으로 바뀌었다.
베어 스턴스 인수는 금융 역사상 최대의 인수도 아니며, 다이먼이 감행한 인수 중에서 최고도 아니다. 그의 명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계약은 뱅크원과 JP모건의 합병이었다. 그러나 베어 스턴스 인수는 JP모건의 명성을 크게 높여줬고, 1년이 지나 경기 침체로 수익률이 하락한 지금도 좋은 영향을 준다.
“인수는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인수 후 JP모건의 명성이 높아진 점을 생각하면 한 푼도 아깝지 않다”고 제스 스테일리 JP모건 자산관리 책임자는 말했다.다이먼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의 정계 데뷔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때 정치인의 요람으로 불리던 월스트리트지만, 1970년대 이후론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은 금융인이 거의 없다.
골드먼 삭스의 로버트 루빈과 헨리 폴슨도 기술 관료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이먼이 옛 영광을 되살릴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생 금융인으로 살아왔던 다이먼은 정치 생명을 단축할지도 모를 가치관을 가졌다. 일례로 그는 경영진에게 무제한의 보수를 지급해도 된다는 원칙을 적극 지지한다.
그런데도 유력 매체와 블로그는 오바마 당선 후 다이먼이 재무장관 후보 중 한 명이라는 추측을 앞다퉈 내놓았다. 이에 다이먼은 재무장관 제의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제의가 왔더라도 거절했을 거라고 말했다. “금융기관 CEO가 재무장관에 임명될 리 없다”고 차기 재무장관으로 가이트너가 지명된 2008년 12월에 다이먼은 말했다.
“금융인에 대한 분노가 높은 지금, 국민은 당연히 특정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원한다.” 그러나 재정 적자나 감세, 경기 부양안에 대한 다이먼의 의견은 지난 1년간 미국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다이먼이 열렬하게 지지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수시로 그에게 자문을 구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다이먼에게 주는 신뢰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모니카 랭글리 기자가 2009년 3월 백악관 회의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기업 경영진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신용경색 완화를 위해 힘써달라고 부탁하자 대통령은 ‘좋소’라고 답하며 보좌관들이 ‘다이먼과 얘기’할 거라고 말했다”고 랭글리는 썼다. 이런 대화는 분명히 지금도 계속될 듯하다.
[더프 맥도널드 저 ‘최후의 승자(Last Man Standing)’에서. ⓒ 2009 더프 맥도널드. 2009년 10월 사이먼&슈스터 발행 예정.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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