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실수 인정” 동국대는 “법대로 한다”
예일대 “실수 인정” 동국대는 “법대로 한다”
동국대와 미국 예일대가 무려 500억원이 넘는 손해배상 소송을 둘러싸고 긴장하고 있다. 2007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씨의 학력 위조 사건과 관련한 소송의 합의 여부를 결정하는 증언 녹취 절차가 9월 말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동국대는 2005년 신씨의 교수 임용을 앞두고 예일대에 신씨의 박사 학위를 확인하려고 등기우편을 보냈고, 예일대는 당시 파멜라 셔마이스터 대학원 부원장 명의의 팩스 문서를 통해 신씨의 예일대 학위가 진짜임을 확인해줬다.
그러나 파문이 일자 예일대는 등기우편을 받지 못했다거나 팩스가 위조됐다고 부인하다가 2007년 11월에 가서야 “셔마이스터 부원장이 실수로 잘못된 팩스를 보냈다”고 시인한 바 있다.
결국 동국대는 신씨 사건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았고 학교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실제 각종 기부금과 정부 지원금이 줄어 500억원이 넘는 물적 피해를 봤다고 동국대는 주장한다. 이에 2008년 3월에 예일대를 상대로 미국 코네티컷주 지방법원에 손해 배상 소송을 냈으며 예일대는 소송기각 신청을 했지만 기각 당했다.
빌 클린턴이 사과했다 해도…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2008년 8월 미국 법원에서 가진 1차 화의조정에서 예일대가 한 제안이다. 동국대의 한진수 경영부총장에 따르면 예일대는 동국대가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한국의 일간지에 사과문을 싣고 공식적인 사과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동국대를 위한 세계적인 교육협력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동국대는 예일대의 제안을 거부하고 계속 법적 시비를 가리겠다고 한다. 예일대가 협상 조건으로 내놓은 세 가지 중 두 가지 즉, 일간지 광고와 기자회견이 모두 사과라는 점은 눈길을 끈다. 결국 예일대의 사과 관련 제안은 “동국대가 소송을 취하하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소송을 계속하면 사과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협상의 카드로서 사과가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또 있다. 지난 8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직접 방문해 미국 여기자들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를 두고 북한의 언론은 클린턴이 김정일에게 사과했다고 보도했고 미국 언론은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또 우리 국민 6명의 목숨을 빼앗은 ‘임진강 참사’와 관련해 우리 정부는 북한에 사과를 요구했지만 북한은 사과하지 않고 있다. 이런 사례들 모두 사과가 협상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을 보여준다. 동국대와 예일대 사례로 돌아가 보자. 동국대의 소송 취하를 조건으로 사과하겠다는 예일대의 제안에서 사과는 ‘협상의 카드’일 뿐 ‘진심’과 거리가 있다.
클린턴이 김정일에게 사과했다 하더라도 이는 여기자를 석방하기 위한 카드였을 것이고, 북한이 임진강 참사에 대해 사과한다 해도 이 역시 외교적 협상의 카드일 뿐 진심과는 거리가 한참 멀 것이다. 이미 앞서서 다룬 것처럼 사과에 있어 진정성은 매우 중요하며 특히 개인 간의 사과에서 그렇다.
하지만 조직이나 국가 사이에서의 사과는 종종 협상의 카드 역할을 하며 이때는 진정성보다 제스처로 힘을 발휘하곤 한다. 협상에서 활용하는 사과는 진정성이 없어도 가능하고 문제 해결을 돕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얘기다.
법학자인 제니퍼 브라운은 2004년 한 법률 저널에 기고한 ‘협상에서 사과의 역할’이란 글에서 최근 들어 협상, 갈등 조정에서 사과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브라운은 협상에서 목적을 뚜렷이 하는 것이 중요하듯 협상의 카드로서 사과 역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며 협상이나 중재의 과정에서 쓰이는 사과의 목적을 네 가지로 분류한 데보라 레비의 이론을 인용했다.
첫째 목적은 ‘전술적’인 것으로 이는 피해자의 신뢰를 얻고 협상 태도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피해자의 고통을 인지하는 차원이다. 둘째 목적은 ‘설명’으로 상대방에게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 이해를 구하려는 것이다. 셋째 목적은 ‘형식적’인 것으로 권위가 있는 세력의 요구에 항복하는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피엔딩’은 책임을 받아들이고 잘못된 행위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예일대는 전술적 목적에서 지난해 사과의 카드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협상이 ‘윈-윈’을 이끌어내야 하듯 사과의 카드 역시 마찬가지다. 예일대는 나중에 가서야 실수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즉, 예일대의 사과 카드는 동국대가 이 이슈로 한참 어려움을 겪고 있던 2007년 여름에 가장 빛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정작 이 카드를 제시한 것은 1년이 지난 2008년 8월 1차 화의조정에서였다. 이미 동국대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후다.
예일대가 사건 초기에 실수를 부인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시인했다는 점에서 괘씸죄가 추가된 것이고, 시간상으로 이슈에서 한국 사회의 관심이 멀어지고 나서 제시된 사과 카드는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동국대로서는 예일대의 사과 카드를 거부하고 법정에서 승리를 원한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해 추후 협상에서의 힘을 키워나가는 편이 유리한 것이다.
브라운은 또한 협상에서 사과는 종종 ‘제삼자 효과’를 노리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사과하되 이것이 피해자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제삼자, 보통 권위를 가진 세력을 향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사과 전문가인 아론 라자르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라자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 불리는 미국의 조지 패튼 장군 사례를 들었다.
피해자·가해자 모두를 살리는 길성격이 거칠었던 패튼이 부하 두 명의 뺨을 때려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는 군법회의에 넘겨질 만한 사안이었는데 당시 상사였던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는 뛰어난 군인이었던 패튼을 살려내면서 문제를 잠재우는 카드로 사과를 이용했다. 그는 먼저 패튼에게 해당 장병과 부대원에게 사과할 것을 엄명했고 이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패튼이 사과했음을 알렸다.
사실상 패튼은 행동을 뉘우쳐서라기보다 상사인 아이젠하워를 실망시키지 않고 전장에 복귀해 이름을 떨치기 위해 사과한 것이다. 실제 그는 자신의 폭행 사건에 대해 유감이라고 밝히면서 아이젠하워 장군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절대로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피해를 본 장병들의 명예를 복구시키고 능력이 출중했던 패튼을 보호하기 위한 카드로 공개 사과를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사과는 때로 협상이나 갈등 조정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런 사과 카드를 활용할 때는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지 검토해야 하며 카드를 쓰는 타이밍을 잘 따져봐야 한다.
또 친구나 가족 간에 하는 사과와 달리 협상 카드로서의 사과는 진정성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예일대와 동국대의 사례에서 보듯 초기에 상대방의 신뢰를 잃게 되면 사과 카드의 효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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