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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적자 특수분유, 왜 안 접나?

10년 적자 특수분유, 왜 안 접나?

▎매일유업 평택공장 분유 생산라인. 최소 생산량이 2만 캔이기 때문에 수요가 적은 특수분유를 만들면 생산량의 90%를 폐기해야만 한다.

▎매일유업 평택공장 분유 생산라인. 최소 생산량이 2만 캔이기 때문에 수요가 적은 특수분유를 만들면 생산량의 90%를 폐기해야만 한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다가온다. 리그 1위도 소용없다. 네 번 먼저 이기는 팀이 최후의 승자다. 역사에 남을 대결로 손꼽히는 게 2002년 한국시리즈다. 삼성은 20년 동안 한 번도 왕좌를 차지하지 못했던 만년 2인자였다. 이승엽의 홈런 한 방으로 LG 트윈스를 꺾고 삼성은 결국 우승했다.

한국시리즈에는 그해 화려한 활약을 펼쳤던 선수라도 명성만으로 선발이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이름값이라는 명분보다는 단기성적이라는 실리가 앞선다. 그게 불문율이다. 그런데 만약, 김응룡 당시 삼성 감독이 리그 내내 안타 한 번 치기는커녕 병살타만 줄곧 쳐왔지만 팀워크에 도움이 됐던 선수를 한국시리즈 내내 선발로 내보냈다면? 20년 만에 1위를 노리던 팀에는 있을 수 없는 얘기 같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스포츠맨 정신’으로 충만한 그라운드가 아닌 ‘총탄 없는 전쟁터’라는 기업들 간 라이벌전에서다. 매일유업은 그 까다롭다는 분유시장에서 45년간 매출 1위를 한 번도 내놓지 않았던 남양유업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매일유업은 지난해 4분기부터 치고 올라와 올 3분기까지 줄곧 1위를 달리고 있다. 문제는 4분기다. 기업들에 4분기는 한국시리즈다. 3분기 내내 침체됐더라도 마지막 4분기 홈런 한 방으로 1년 실적이 결정될 수도 있다.

특히 창업 이래 처음으로 1등을 눈앞에 둔 매일유업의 심정은 2002년 리그 첫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던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의 초조함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매일유업이 ‘한국시리즈의 룰’을 따르지 않고 있다.



수요 없어 생산량 90% 폐기매일유업은 지난 10년간 계속 적자를 보고 있는 한 사업부를 그대로 ‘선발등판’시키고 있다. 흑자 전환은커녕 원재료 값이 오를수록 적자 폭이 껑충 뛰는 제품라인이다. 8개 제품을 일반적 유통기한인 18개월에 2만 캔씩 만든다. 생산원가로는 7억2000만원에 달한다. 소비자가는 생산원가의 절반 수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한다는 취지에서 판매가를 낮췄다.

특수분유 중 90%인 1만8000캔은 극소수 소비자에게만 공급되기 때문에 유통기한을 넘겨 햇빛도 못 보고 폐기된다. 액수로는 연간 2억4000만원이다. 매일유업의 올해 1분기 분유 총판매액 21억원의 10%가 넘으니 결코 무시할 만한 숫자가 아니다. 타선으로 따지면 2번 타자쯤 된다.

완벽한 기술력이 없으면 만들 수 없다 보니 개발과 품질향상에 들였을 막대한 자금은 그 몇 배가 넘는다. 치열한 1위 싸움에서 수익성과 정반대로 가는 이 사업부를 CEO부터 싸고 돈다. 정종헌 매일유업 사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제품생산을 중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고집을 피운다.

매일유업은 1999년 선천성 대사이상 질환을 앓는 유아를 위한 질환용 특수분유 8개 제품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해 올해로 10년 동안 제조원가의 절반 수준인 2만원 미만에 판매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업계 한 관계자는 “적자에도 등급을 매긴다면 특수분유는 따뜻한 적자, 아름다운 적자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수분유는 미숙아, 설사, 알레르기 등 일반적이고 단기적인 보조제 성격의 기능성 제품과 대사이상이나 소아 간질 등 선천성 질환이 있는 유아가 복용하는 질환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만들수록 적자가 쌓이는 특수분유는 질환용 특수분유다. 매일유업의 대사이상 질환용 제품군과 남양유업의 소아 간질 환자용 제품이 이에 속한다.

선천성 대사질환은 인체 내에서 아미노산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하거나 전혀 만들어지지 않아 대사이상을 일으키는 유전질환. 유아가 스스로 분해할 수 없는 아미노산을 섭취하게 되면 구토, 호흡곤란이 일어나고 성장과정에서 운동발달 장애, 성장장애, 뇌세포 손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당국, 일부 무상공급 불구 지원책 전무

따라서 이 질환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은 정상적인 성장 발달을 위해 출생부터 체내에서 대사하지 못하는 특정 아미노산을 제거한 특수 유아식이나 기타 음식으로 식이요법을 해야 한다.

대사질환용 특수분유는 대체 음식을 구하기 어려운 대사질환자들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유아뿐 아니라 성인들도 주식이나 보조식으로 먹기도 한다. 원재료에서 이런 아미노산을 완전히 분리해 내고, 제품에 따라 특정 물질을 정교한 분량만큼 첨가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 등 선진국 몇 곳을 제외하면 한국 외에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거의 없다.

2004년부터 보건복지가족부는 도시근로자 평균 가구 소득의 200% 미만인 가정의 유아들이 대사이상 질환으로 판명되면 무상으로 지급하고 있다. 특수분유는 생산량이 한정돼 있고 원가 이하로 팔리기 때문에 구입 시에도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생후 1주일 이전에 병원에서 1차 검진을 해 이상이 발견되면 2차 정밀검사를 실시하게 되고 확진 시부터 보호자는 복지부 산하 인구보건복지협회에 분유공급 신청서를 내야 한다. 공급업체로부터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직접 제품을 구입해 환자에게 특수분유를 공급한다. 하지만 무상공급과 관련한 법령은 없다.

모자보건법과 관련해 영유아 보건사업이 선천성 대사이상 검사, 특수분유 지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정도다. 공급업체에 주어지는 혜택도 없다. 특수분유가 무상으로 공급되는 것은 매일유업과 소아 간질 환자를 위한 특수분유 케토니아를 생산 중인 남양유업이 자체적으로 판매가를 원가의 절반으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기업의 본질은 역시 수익창출이다. 1위 쟁탈전이 한창인 두 기업도 적자가 상당한 특수분유 제품생산이 숫자상으로는 큰 부담이다. 하지만 정종헌 매일유업 사장은 최근 중앙연구소를 방문해 “우리는 식품업체가 아니라 한국의 모든 영유아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책임 있는 기업이 돼야 한다”며 “그래야 모든 이로부터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창업주의 가치관인 ‘봉사하는 기업’이란 사훈에 따라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여기라는 엄명이었다. 지난 9월 28일 학회 참석차 방한한 동남아 의료진 4명이 매일유업 평택공장을 찾았다. 내부 촬영이 불가능할 만큼 최첨단 설비를 갖춘 이 공장에서 만드는 동시에 90%가 버려지는 특수분유 제조 현장을 보고 이들 의료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호찌민 어린이병원의 안투안 박사는 “베트남에서도 수만 명 중 한 명꼴로 선천성 대사이상 질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나 아직 베트남 자국에서 생산되는 특수분유가 없어 환자와 의사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하노이 대학병원의 반방 박사는 “분유는 아기들의 주식으로 성장과 발육에 매우 중요한 식품이기 때문에 철저한 안전관리가 중요한데 제약회사 못지않은 위생관리가 인상적”이라고 밝혔다.



치열한 분유업계 청정지대로매일유업의 민병렬 해외개발 실장은 “베트남 의료진에게 선천성 대사이상 분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내년 상반기 베트남 시장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우리가 매일분유를 알리고 현지 의료진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종헌 매일유업 CEO는 “(특수분유는) 회사의 이윤이 아닌 사회공헌과 기업이념을 위한 의지를 가지고 시행하는 사업”이라며 “내부 구성원의 관심과 경영진의 의지 없이는 이렇게 10년 동안 이어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능한 CEO는 하나의 목적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시작 의도는 순수하게 사회공헌활동일지라도 브랜드 이미지 제고 등 경영전략에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동남아 진출을 앞둔 매일유업도 사회공헌활동으로 기업 브랜드 이미지를 크게 높일 기회다. 자체 기술력 홍보에도 큰 도움이 된다. 전략상 이를 활용한다고 애초의 취지가 흐려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래야 윈-윈게임이 될 수 있고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 분유업계는 올 한 해 정말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매출의 기준, 가격정책, 상대방 실책을 활용한 마케팅 등 머리싸움도 치열하다. 업계 1위를 놓고 지키려는 남양유업과 뺏으려는 매일유업의 기세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매일유업은 올 1분기 분유시장에서 매출 453억원, 2분기에 462억원을 기록했다. 1분기 408억원, 2분기 353억원으로 하향세인 남양유업을 큰 폭으로 앞서나갔다. 유제품 전체 시장에서도 상반기에 매일이 4180억원 매출에 영업이익 173억원으로, 4802억원 매출에 영업이익 131억원을 기록한 남양을 따돌린 듯 보이지만 단기 악재 영향과 일반적으로 전체 매출의 20%가량인 탈·전지를 매출에 포함시킨 점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드디어 한국시리즈 격인 4분기가 시작됐다. 앞으로의 경쟁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분유회사의 마케팅은 공격적이기로 유명하다. 자신이 점수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에러를 활용하는 데 좀 더 초점을 맞췄던 것도 사실이다. 사건과 루머도 많다.

어쩌면 혼탁해 보이기까지 한 분유업계의 이 치열함은 적자를 내도 끄떡없는 특수분유 사업을 업계의 청정지대처럼 보이게 만든 일등 공신일 수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격전 중인 시장일수록 사회공헌활동 등 특정 기업의 이미지 상승은 위력이 크다”며 “이것이 특수분유 사업과 같은 청정지대의 외연 확대에 기대를 걸어볼 만한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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