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끝없이 돌고 돈다
유행은 끝없이 돌고 돈다
벳시 로더는 패션 블로그 FashionIsSpinach.com을 운영한다. 2년 전 겨울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했다. 12년 전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 때 입었던 미니 드레스를 입고 어느 파티에 갔다.
다만 이번에는 손목에 둘렀던 꽃 장식과 은색의 싸구려 샌들을 신지는 않았다. 대신 검은색 터틀넥 셔츠를 받쳐 입고 불투명 스타킹을 신었다. “패션 감각이 부족했던 젊은 시절에 입었던 옷이라는 점이 꺼림칙했다”고 로더는 말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 스타일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95년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에서 그 감청색 반짝이 드레스를 입었을 때 옷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무도회장엔 그녀와 비슷한 드레스를 입은 학생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유행에 뒤지고 너무 야한 듯한 느낌이 들어 오랫동안 부모님 집의 벽장에 처박아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프렌치 커넥션·톱숍·시어리 등 의류업체가 그 드레스와 비슷한 의상들을 선보이기 시작하자 어리둥절해졌다. “내 드레스를 상점 진열대에 걸어놔도 어색하지 않을 듯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갑자기 내 졸업 무도회 의상과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늘어나 깜짝 놀랐다.”
패션의 복고 경향은 새삼스럽지 않다.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패션역사학 교수 베스 딘커프 찰스턴에 따르면 나폴레옹 시대에도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 조세핀 황후가 즐겨 입던 하늘하늘한 흰색 드레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의상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이 스타일은 꽤 오랫동안 유행했다”고 찰스턴은 말했다.
“19세기 이전에 시작돼 19세기 전반에 걸쳐 꾸준히 사랑을 받았 다.” 하지만 요즘은 패션의 복고 주기가 과거보다 더 짧아졌다. 1800년대에는 디자이너들이 한 세기 전의 의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찰스턴은 말했다. 1960~80년대에는 오리지널 패션과 복고 패션이 30년 정도의 주기로 순환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이후에는 어떤 패션이 유행했다 도태됐다 다시 유행하는 주기가 20년 미만으로 더 단축됐다. 현대 패션(찰스턴은 샤넬 의상실이 문을 열고 스포츠웨어가 생겨난 1913년을 현대 패션의 시초로 본다)의 역사는 다양한 복고풍의 영향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1920년대에는 디자이너 잔 랑뱅이 18세기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로브 드 스틸(robe de style)’을 선보였다. 페티코트나 버팀대를 이용해 볼륨을 살린 풍성한 스커트로 여성스러운 실루엣을 강조한 스타일이다. 1931~1939년에는 디자이너 마들렌 비오네가 조세핀 황후의 선례를 따라 그리스 시대의 조각 작품에서 착안한 드레이프(느슨한 부정형 주름) 스타일의 야회복을 내놓았다.
1947년에는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꽉 조이는 허리와 풍성한 스커트를 기본으로 한 ‘뉴 룩(New Look)’ 을 선보였다(찰스턴은 이 스타일을 ‘1860년대로의 완벽한 회귀’라고 평했다). 모래시계를 연상케 하는 이 실루엣은 1961년까지 여성들의 몸을 코르셋 안에 가둬 놓았다.
1960년대 중반에는 요즘 시대에 익숙한 ‘빈티지’ 패션이 유행했다. 그 이전에는 디자이너들이 과거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았을 때만 과거의 패션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찰스턴은 말했다. “패션 리더들이 단순히 과거의 패션을 흉내 낼 뿐 아니라 실제로 오래된 옷을 입기 시작했다.”
1969년까지 런던과 뉴욕, 샌프란시스코의 젊은이들이 중고 의류점에서 에드워드 시대(1901~1910년의 에드워드 7세 시대)의 재킷과 조끼를 사 입었다. 그 이후 줄곧 혁신적인 젊은이들이 패션의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중고 상점을 뒤지고 다녔다. 고급 패션 디자이너들도 과거의 패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딱딱하고 각진 어깨를 강조한 1980년대의 파워수트는 1940년대에 존 크로포드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어깨에 패드가 들어간 재킷과 드레스를 입기 시작하면서 유행했던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 또 1990년대 나팔바지의 부활은 1970년대의 스타일이 재현된 경우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1980년대 패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2006년부터는 레깅스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발렌시아가 등의 디자이너들이 각진 어깨를 강조한 패션을 선보였다. 또 요즘은 1980년대 디자이너 스티븐 스프라우스의 영향을 받은 형광 색상이 유행한다.
마크 제이콥스는 2009 가을 컬렉션에서 형광 색상의 작품들을 내놓았다. 또 찰스턴에 따르면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유행했던 점프수트(바지와 상의가 일체형으로 붙어있는 일종의 바지형 원피스)가 지난해부터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요즘 패션에 나타나는 1990년대의 영향은 짧아진 패션의 순환 주기를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예다.
소피아 아모루소는 2년 반 전 문을 연 온라인 빈티지 상점 내스티 갤(Nasty Gal)에서 1990년대 초반의 의상을 판매한다. “패션의 순환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듯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패션 아이디어를 찾기가 어려워지자 이미 유행했던 스타일을 재창조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런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20년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2010년 재창조된 패션을 그 후 어떤 방식으로 또다시 재창조할까? 또 패션이 계속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어쩌면 토가(고대 로마 시민의 긴 겉옷)를 입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워싱턴 포스트’의 패션 잡지 편집자이기도 한 로더는 지난 10년 동안 빈티지 쇼핑과 복고풍 패션이 인기를 끈 탓에 개성 있는 패션을 추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패션 리더들은 최근에 유행이 지난 패션을 참조해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려 한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 그 스타일 기억나요. 지금은 한물갔죠.”라고 말할 만한 패션을 채택한다.
어쩌면 당신의 어머니가 지금까지도 입는 스타일이라 꺼림칙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패션 리더들은 패션의 순환 주기를 예전보다 훨씬 더 단축시킨다.” 로더는 MTV의 진행자이자 모델인 알렉사 정을 예로 들었다. 혁신적인 패션 리더로 인정받는 그녀는 요즘 1995년 영화 ‘클루리스’에 나왔던 격자 무늬 원피스와 반 스타킹을 착용한다.
“사람들이 10~15년 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은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로더는 말했다. 하지만 과거의 스타일이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요즘 패션은 매우 민주적”이라고 로더는 말했다. “예를 들면 요즘은 스키니 진이나 통이 넓은 바지, 나팔 바지, 부츠컷(허리에서 무릎까지는 폭이 좁고 그 아래부터 폭이 넓어져 부츠 위로 편하게 입도록 디자인된 스타일) 진 중 어떤 스타일을 입어도 상관없다. 최근 역사에서 이런 경우는 보지 못했다.
모든 스타일이 통용된다. 다양한 시대의 패션이 뒤섞여 공존한다.” 뉴욕시에 있는 칩 잭스 빈티지 클로딩(Cheap Jack’s Vintage Clothing)의 소유주 잭 마커스는 1990년대 아이템의 주문이 예상보다 더 일찍 시작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객들이 그 시대의 옷만 찾지는 않는다.
“늘 또 다른 시대의 옷을 찾는 고객들이 있다. 그러면 그것이 새로운 라인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1950년대와 40년대, 30년대, 20년대의 옷을 찾는 고객들이 늘 있기 때문에 융통성 있게 준비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1990년대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요즘의 패션 경향이 단축된 패션 유행 주기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위민스 웨어 데일리(Women’s Wear Daily)’와 ‘W’의 편집인인 브리지트 폴리는 1990년대의 스타일이 되돌아왔다기 보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패션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그녀는 말했다. “갈수록 격식을 차리지 않는 생활방식 덕분에 하늘하늘한 원피스 위에 카디건을 걸쳐 입는 스타일은 기본적이고 지속적인 패션으로 자리잡았다. 반면 1940년대와 1980년대의 주요 스타일 같은 극단적인 패션은 유행과 쇠퇴의 주기가 매우 짧아졌다.” 유행은 끝없이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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