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가 위태롭다
자영업자가 위태롭다
외환위기가 한국경제를 강타한 1998년 중순. 대기업 A사는 3700여 명의 임직원을 퇴출했다. 그야말로 서슬 퍼런 구조조정. 그러나 보상금만큼은 넉넉하게 지급했다.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은 임직원들이 받은 퇴직금은 1인당 1억7000만원. 목돈을 손에 쥔 퇴직자 가운데 72%는 창업을 택했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고용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탓에 재취업이 여의치 않았다. 대기업에 다녔던 이들의 눈높이를 맞춰줄 직장도 부족했다. 더구나 창업시장은 당시 블루칩으로 떠오를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자영업계에 발을 들여놨던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창업 전문가들은 “10명 중 1명만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창업전략연구소 이상헌 소장은 “자영업 판에서 생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이 이처럼 이구동성으로 비관론을 펴는 까닭은 뭘까? 시계추를 다시 2005년으로 돌리자.
이중고 시달리는 자영업자들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체질이 달라졌다. 기업 구조조정이 제법 정착됐고, 노동 유연성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자영업계도 덩달아 커졌다. 1999년 561만 명이었던 자영업자 수가 2005년 617만 명으로 10%가량 늘어났을 정도다. 상당수 퇴직자가 자영업계에 둥지를 틀었다는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자영업자 문제가 불거진 단초가 바로 이것이다. 시장에 상인 수가 많아지면 상점당 매출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N분의 1’ 경제학이다. 몸집이 훌쩍 커진 자영업계는 더 이상 블루칩이 아니었다. 작은 파이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살벌한 곳으로 돌변했다.
동네 골목길에 비디오방·인터넷방 등 비슷비슷한 아이템을 가진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을 정도다. 이상헌 소장은 “외환위기 당시 적지 않은 퇴직금을 들고 자영업 판에 뛰어든 퇴직자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줄줄이 폐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이런 자영업자의 몰락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는 점이다.
올 9월 현재 자영업자 수는 573만5000여 명. 2005년보다 44만여 명 줄었다. 연평균 10만여 명씩 감소한 것이다. 특히 올 9월 전년 동월비 32만4000명 줄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밑바닥 경제까지 마비시키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자영업자들은 이제 이중고를 견뎌야 한다.
손님은 줄어드는데 돈 구할 곳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확실한 보증이나 담보가 없으면 사채시장에서도 자영업자 대출을 꺼릴 정도다(관련기사 40면). 자영업자로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저항할 틈도 없이 우산을 빼앗기는 격이다. 경기 회복 소식에도 자영업계엔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론조사기관 한백리서치연구소가 최근 대표적 자영업자 재래시장 상인 5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38%가 “폐업을 고려한 바 있다”고 밝혔다.
자영업자의 몰락은 간신히 회복국면에 접어든 한국경제에 커다란 부담이다. 이들은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5인 미만 자영업체가 전체의 90%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사업을 접으면 마땅한 소득원을 찾기 힘든 게 자영업자의 현주소다. 더 심각한 부분은 자영업자가 무너지면 소비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금리·집값 등 경제변수, 자영업자 쥐락펴락
정부는 그간 나랏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했다. 하지만 이제 풀 돈이 많지 않다. 조만간 풀린 돈을 회수해야 한다. 출구전략 논의가 한창인 이유다. 그러면 민간이 정부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워야 한다.
소비가 위축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또 다른 위험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자영업자 몰락은 이처럼 한국경제의 거시지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 자영업자 몰락의 이유는 뭘까? 일단 공급과잉이 문제다. 국내 자영업자의 취업자 대비 비율(33%)은 OECD 평균(16%)보다 2배 이상 높다.
미국과 일본은 각각 7%, 10%대에 불과하다. 자영업자 수가 많은 탓에 출혈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글로벌 불황 이후 대기업이 전통적인 자영업 시장에 침투하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다. 골목길 상권 진입을 호시탐탐 노리는 기업형 수퍼(SSM) 사례는 대표적이다. 이뿐만 아니다.
자영업자가 각종 경제변수에 민감한 것도 몰락을 부추긴다. 요컨대 상당수 자영업자는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사업자금으로 사용한다. 집값이 떨어지거나 금리가 치솟으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도 걱정이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영업자의 몰락을 어떻게 막느냐다. 역대 정부의 정책방향은 일관적이다. 창업자금지원 등 돈을 푸는 것이다. 현 정부도 마찬가지다. 자영업자를 살리기 위한 대책의 골자는 저리 대출 또는 세금 감면이다.
가령 최근 3년간 매출액이 2억원 미만인 영세자영업자가 올해 안에 폐업할 경우, 향후 1년 동안 500만원까지 사업소득세·부가가치세 납부의무 면제, 연 매출 4800만원 미만의 음식숙박·소매업체는 각각 1.5%, 3%로 낮아진 부가가치세율을 2011년까지 연장 적용받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당장 급한 불만 끌 수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부천대 임재석(경영학) 교수는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며 “20~30대를 위한 생계형 창업지원을 했더니 비슷비슷한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 과잉문제가 초래된 경험이 있지 않은가”라고 꼬집었다.
물고기를 잡아 주기보단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창업 및 업종 전환 관련 교육을 매년 실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이 역시 허점이 적지 않다. 중소기업청 , 소상공인지원센터에선 2005년 이후 예비 창업인 등을 대상으로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총 3091명의 교육생이 배출됐다. 올해엔 1만여 명을 교육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들 교육생이 창업에 성공했는지 아니면 폐업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사후관리 프로그램이 전무한 탓이다. 당연히 정부의 교육프로그램 성과를 평가하는 것도 어렵다.
중소기업청이 인가한 창업교육기관 한 관계자는 “예비 창업자가 중소기업청의 대출을 받으려면 반드시 (소상공인지원센터의)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며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시장을 파악하고, 실무를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출 받을 목적으로 교육프로그램에 참가한다”고 말했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다는 일침이다. 창업 전문가들이 ‘자영업자 몰락을 막을 수 있는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 이상 미봉책을 양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왜곡된 자영업 구조를 바꾸는 게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도소매·음식숙박업 등 개인·유통 서비스산업에 몰려 있는 자영업자를 분산시켜야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전체 자영업자 중 도소매·음식숙박업 종사자는 3분의 1가량이다. 임재석 교수는 “소자본 생계형 자영업을 금융·법률·관광·레저 등으로 넓혀 외식업, 도소매업에 몰려 있는 자영업자가 사업을 전환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출 받기 위해 교육 이수
세종대 전태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가치 있는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자영업자 몰락을 막을 수 있는 주요 해법”이라며 “OECD국가의 취업자 25%가 사회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11%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또 “이런 사회적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전제한 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한 사람이 음식업에 종사하면 그 경험이 아깝지 않은가?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런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하면, 지역 기업으로선 경험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퇴직자는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정부·지자체만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영업자도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 한국의 경우 자영업자가 되는 이유는 대부분 비자발적 퇴직이다. 등 떠밀려 회사에서 나오고, 마땅히 갈 곳도 없으니 자영업계에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자영업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자영업의 아이템 회전 수는 2년이 채 안 된다. 그만큼 경쟁이 심하고, 상권변화도 빠르다. 일량도 만만치 않다. 자영업자들은 하루 평균 13.5시간을 일한다고 한다. 아침 일찍 출근해 늦은 밤 퇴근 보따리를 싼다는 얘기다. 이상헌 소장은 “이제 자영업자들도 기업가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사꾼이 아닌 기업인의 자세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자영업으로 출발해 그럴듯한 기업을 일군 사람들은 적지 않다. 맥주 프랜차이즈업체를 이끌고 있는 (주)디즈의 한윤교 대표가 단적인 인물이다(관련기사 42~46면). 이들은 주변 사람들이 ‘가능성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을 때 발품을 팔고, 피땀을 흘려 기업을 일궜다.
성신여대 강석훈(경제학) 교수는 “자영업도 궁극적으로 경영을 하는 것”이라며 “자영업자 스스로 장사꾼 마인드를 훌훌 털어버리고 기업가정신을 가질 때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선빈 수석연구원은 ‘빈곤의 늪에서 구출: 생계형 자영업의 활로 모색’이라는 보고서에서 생계형 자영업자(도소매·음식숙박 등 생활형 서비스업 종사자)의 현실을 ‘3저(低)’라고 표현했다. 저소득·저숙련에 저희망이라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틀린 말은 아니다.
생계형 자영업자의 평균 소득은 100만원에 채 미치지 못하고, 직업 훈련 경험이 있는 생계형 자영업자도 전체의 7%에 불과하다. 임금 근로자(13%)의 절반 수준이다. 게다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미약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런 ‘3저’에 시달릴 순 없지 않은가.
더구나 자영업자 몰락은 한국경제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 말로 정부·지자체·기업이 탄탄한 공조의 끈을 만들어 자영업자의 몰락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자영업자도, 한국경제도 부활의 축배를 들어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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