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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래?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

누가 그래?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

국내 대기업은 그간 ‘고용 없는 성장’의 주범인 양 여겨졌다. 돈은 많이 벌면서 일자리는 늘리지 않는다는 혐의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대기업을 연좌제로 묶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10년간 국내 100대 기업의 일자리를 분석한 결과 그렇다.

지난 10년간 국내 매출 상위 100개 대기업의 고용증가율은 16.2%로 나타났다. 3년간 증가율은 4.6%였다. 또한 조사 대상 기업 중 최근 3년 사이 고용이 증가한 곳은 75%였다.

3년간 고용 증가율이 10%를 넘긴 곳은 33개사였다. 참고로, 우리나라 1인 이상 사업체의 최근 10년간 평균 고용률은 대략 2.5% 남짓이다. 2009년 3분기 현재 100대 기업의 고용인원은 64만9000명이었다.

이는 이코노미스트가 한국거래소 상장공시시스템을 통해 매출 상위 100개 기업을 뽑아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활용해 각 기업의 10년 치 분기보고서를 분석한 결과다.

100대 기업 중 조사 대상 기간에 고용 증감에 영향을 끼친 내외부 합병이나 분할(분사 포함)이 있었던 기업은 고용 증가율 순위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순고용 증감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결과 10년 치는 68곳, 3년 치는 85곳을 분석 대상으로 했다. 합병과 분할은 아니지만 조직개편이나 사업 부문 양수도에 따라 고용 변동이 생긴 일부 기업은 분석에 포함했다. 이번 조사는 그간 대기업이 소위 ‘고용 없는 성장’의 주범으로 몰려왔지만, 각 기업 상황에 따라 ‘고용 있는 성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성장동력을 발굴해 과감한 투자를 한 기업은 대부분 큰 폭의 고용 증가율을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기업 간에도 고용 양극화가 심하다는 것도 확인됐다. 조사 결과 최근 10년간 비교 가능한 기업 68곳 중 가장 큰 폭의 고용 증가율을 보인 곳은 LG디스플레이였다. 10년 사이 470%나 늘었다.

10년 전 4000명이 안 됐지만, 2009년 9월 현재 임원을 제외한 직원 수는 2만2400여 명이었다. 이 회사는 최근 3년간 일자리 수를 가장 많이 늘린 기업 순위에서도 1위(5668명)였다.


대기업 간 고용 양극화삼성엔지니어링은 10년 동안 200% 넘게 고용을 늘려 2위였다. 3년간 고용 증가율은 84%. 이번 조사 대상 기업 평균 증가율의 20배에 가까운 수치다. 삼성전자와 LG텔레콤은 각각 99%, 92% 늘어나 3위와 4위에 올랐다.

GS건설은 80%로 5위를 기록했다. 같은 기준에서, 10년간 일자리 수 자체를 가장 많이 늘리 곳은 삼성전자다. 2009년 9월 현재 직원 수는 8만4000명으로 10년 전의 두 배 수준이었다.

다음으로는 LG디스플레이 1만8500명, 현대자동차 6955명, 삼성중공업과 LG전자가 각각 5200명, 3500명의 일자리를 늘렸다. 3년 치를 분석해 보면, 고용 증가율 부문은 삼성엔지니어링(84%), 대우건설(49%), OCI(42%), 현대제철(38%), LG디스플레이(34%) 순이었다.

고용 수치에 변동이 큰 합병·분할이 있었거나 2006년 9월 이후 상장돼 3년 전 분기보고서가 없는 곳을 제외한 85곳을 대상으로 한 결과다. 같은 기간 일자리 수를 많이 늘린 기업은 LG디스플레이, 삼성중공업, 하이닉스반도체, 현대제철, 삼성엔지니어링 순이었다. 상위 다섯 개 기업이 3년간 늘린 일자리는 1만4400명. 3년 사이 포스코(1만6500명)에 육박하는 기업 하나가 차려진 셈이다.

앞서 밝혔듯이 이번 조사에서는 인수합병이나 기업 분할로 고용인원 변동이 생긴 기업은 순위 분석에서는 제외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 중에도 인수합병과 상관없이 꾸준히 고용을 늘려온 기업이 많다. 합병이나 기업 분할을 한 곳을 포함해 상장사 매출 상위 100대 기업 전체를 놓고 보면, 지난 10년간 고용 증가율이 가장 큰 기업은 웅진코웨이, LG디스플레이, OCI, 삼성엔지니어링, 신세계 순이다.

특히 1970년 이후 창업한 기업 중 유일하게 매출 1조원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웅진코웨이는 지난 10년간 850%(2775명)에 달하는 폭발적인 고용 증가율을 보였다. 신세계 역시 할인점 시장에서 공격적인 경영으로 10년간 신세계맨을 8600명 이상 늘리며 120%가 넘는 증가율을 기록했다.

그동안 많은 경제 전문가와 언론은 대기업이 고용 없는 성장을 고착시킨다고 비판해 왔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이번 이코노미스트 조사에서 100대 기업의 연평균 고용 증가율은 10년간 1.6%, 3년간 1.8%에 머물렀다. 지난 17일 상장사협의회는 국내 10대 그룹 상장 계열사의 고용인원이 5년간 1.2% 늘어나는 데 그쳤다는 보고서를 냈다.

앞서 한 언론은 10대 그룹의 핵심 기업 10곳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 “지난 1년간 매출은 0.95% 늘었는데 고용은 0.43% 줄었다”고 보도했다.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대기업이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제 몫을 다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전경련이나 경제 5단체장 모임에서 연례행사처럼 반복됐던 “몇만 명을 신규 채용하겠다”는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그런 약속은 대개 대통령이나 경제장관과 만나는 날이나 직후 나온다). 그렇다 해서 “대기업이 돈 쌓아두고 고용은 안 한다”(전국금속노조)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타당한가?

대기업도 대기업 나름이다. 이미 대기업 간에도 고용 양극화가 벌어지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3년간 고용 변동의 비교가 가능한 85곳 중 단 한 명이라도 고용이 늘어난 곳은 63곳이었다. 세계 금융위기의 전진(前震)이 시작돼 세계 경제를 휩쓸고 여진(餘震)이 남은 지난 3년 동안 이들 63개 기업이 3만5000명의 일자리를 늘렸다.

평균 고용 증가율은 14.6%, 3년 평균 5%에 가깝다. 그 와중에 15% 넘게 고용을 늘린 기업도 23곳이다. 이들 기업까지 한 묶음으로 ‘고용 없는 성장의 주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반면 이번 조사에서 일자리가 줄어든 기업은 22곳이다. 이들 기업에서 3년간 약 1만 명이 줄었다. 고용 감소율은 평균 -5.9%다.

이들 기업 상당수는 지난 3년뿐 아니라 10년을 놓고 봐도 고용이 줄었다. 22곳 중 대규모 분할이나 분사가 없었던 곳은 18개 기업. 이들 중 10년 사이 일자리가 줄어든 기업이 16곳이다.

고용이 정체되거나 줄었어도 지속적으로 성장한 기업도 있지만, 상당수는 외환위기 파장에 따른 대규모 감원, 신수종 사업 발굴 실패, 무리한 인수합병(M&A) 후유증, 장기적인 업황 불황, 신규 채용보다 많은 자연감소분 등이 원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대한상공회의소 신년회에 참석한 그룹총수들.

▎대한상공회의소 신년회에 참석한 그룹총수들.



획기적 고용 확대는 한계원인이 다른 곳도 물론 있다. 일자리가 줄어든 22곳 중 감소폭이 가장 큰 LG전자(3500명)의 경우 그동안 “인위적 감원은 없다”는 경영진의 입장이 확고했다. LG전자 관계자는 “PCB(인쇄회로기판) 사업부를 LG마이크론에 넘기는 등 조직개편이 있었고, 신규 채용인력을 적정하게 줄인 것이 이유”라고 밝혔다.

삼성전기 역시 일부 사업 부문 분사로 인원이 줄어든 경우다. 대기업이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매출과 이익이 오르고 투자를 할수록 고용이 덩달아 늘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그게 쉽지는 않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대기업은 체질을 완전히 바꿨다. 수많은 기업이 쓰러지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은 대가다.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 국내 대기업은 체질 개선 효과를 누렸다. 바로 그 체질 개선이 일자리 늘리기에는 장애가 된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과거 제조업 중심 사회에서는 경제가 1% 성장하면 8만~9만 명의 고용이 늘었는데 이제는 3만~4만 명이 고작”이라고 말한 것처럼 대기업이 주력하는 산업 대부분이 취업유발계수는 낮아지고 고용생산성은 높아졌다.

많은 대기업이 집중하는 자본집약적 산업이나 중후장대형 장치산업 역시 투자한 만큼 고용이 늘지는 않는다. 정유·에너지나 IT 업종이 대표적이다. 이번 이코노미스트 조사에서 SK가스, S-OIL, E1 등은 고용 인원 자체도 적었고 매출 또는 투자 규모에 비해 고용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SK텔레콤, SK브로드밴드, LG데이콤 등도 비슷하다.

이들 기업에 정부가 아무리 투자한 만큼 세제 혜택을 준다고 해도 일자리가 늘기는 어렵다. 국내 대기업이 다국적 기업화되면서 상대적으로 해외 투자가 늘어난 것도 한 요인이다. 2000년 국내 대기업의 해외직접투자액은 20억 달러. 하지만 2007년에는 80억 달러로 늘었다. 제조업 분야의 경우 2000년 10억 달러 안팎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50억 달러 안팎이다.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이다. 현대차는 지난 10년간 생산설비를 해외에 설립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회사로 올라섰다. 그사이 매출은 두 배 이상 늘었다. 반면 국내 고용인원은 2000년 4만9000명에서 2003년 5만1000명, 2006년 5만5000명, 2009년 5만6000명으로 소폭 늘어나는 데 그쳤다.

여기에 인력을 대체하는 IT·로봇 기술의 발달, 아웃소싱의 보편화, 중소협력업체의 확대, 대기업의 인력 효율화 및 보수적 경영 흐름, 주주 자본주의 확산, 경기 사이클의 단기화와 증폭된 불확실성 등 수많은 요인이 더해져 대기업에 고용 탄력이 붙기는 어려워진 상황이다. 이제 대기업에 ‘고용 있는 성장’의 기대는 접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1980~9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지난 10년간 많은 대기업이 과감한 투자로 일자리를 만들어왔다. 10년 전 매출 2조원을 갓 넘었던 LG디스플레이는 2004년 이후 파주 7·8세대 LCD생산라인에만 9조원을 투자한 결과 지난해 매출이 20조원을 돌파했다.

그사이 고용은 470% 늘었다. 정부와 지자체의 파격적인 규제 완화와 기업의 과감한 투자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이 회사는 올해 파주에만 4조원을 더 투자할 계획이다. 늘어난 공장만큼 일자리도 더 늘 것이다.


기업에 맡겨라

2000년 매출 35조원이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100조원-영업이익 10조원 클럽’에 가입했다. 삼성전자의 성장 이유는 전 국민이 다 안다. 1970년대처럼 연 50%씩 인력이 증가한 것은 아니지만, 10년 새 4만 명이 넘는 일자리를 만들었다.

업종별로 편차는 있지만 과감한 투자를 해온 기업은 알아서 일자리 창출에 기여해 왔던 것이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속도가 더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 대기업은 섬유, 건설산업에서 시작해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반도체, 유통, IT 산업에서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왔다.

옛날 대기업을 일군 창업자들에 비해 기업가정신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모든 대기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으로 규제를 풀어주고 기업 하기 좋은 환경에서 돈이 되는 시장이 눈에 들어오면 기업은 설비를 늘리고 공장을 짓게 마련이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분간 한국 경제는 수출 중심의 대기업이 잘해줘야 성장한다.그래야 대기업의 직접 고용이 기대만큼 늘지 않더라도, 수십만 중소 협력체가 가족을 건사할 수 있다.

대기업의 고용 기여도를 대기업 직접 고용에 한정해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정부가 대기업을 들들 볶는다고 고용이 획기적으로 늘 리 없다. 세무조사란 채찍을 들고, 법인세 인하라는 당근으로 유인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잘한 기업, 잘못한 기업 할 것 없이 통으로 묶어 대기업 집단을 비난하는 분위기도 고쳐 잡을 때가 됐다.

정부가 할 일은 이미 다 나와 있다. 서비스업 시장을 키우고, 공공 부문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전체 일자리의 87%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가고, 새로운 신성장산업을 육성하면 된다. 10년째 고용률이 60%를 넘지 못하고 ‘사실상 실업자’가 400만 명인 팍팍한 현실에서 단기 일자리를 만들어 실적 올리는 데 급급한 정부의 고용 정책도 대전환이 절실하다.

해외로 나간 기업이 ‘U턴’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주고 외국기업이 국내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경영 판단은 기업가의 몫이다. 정부가 희망근로사업을 늘리는 것처럼 기업이 고용을 막무가내로 늘릴 수는 없다. 특히 불명확한 경기 회복기에는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마당에 청와대나 전경련 회관에 재계 총수들을 불러놓고 일자리 늘리라고 하면 빈말을 하게 되고, 결국 거짓말쟁이들이 된다. 그동안 숱하게 그래 왔다. 잘할 기업은 알아서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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