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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장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자리

조합장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자리

재건축·재개발 조합장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자리라고 말한다. 뭉칫돈이 오가면서 비리의 유혹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이다. 조합장의 막대한 권한은 사리판단의 눈을 멀게 한다. 최근 조합장 비리로 유죄 판결이 확정된 모 지방국립대 교수도 그런 예다.

한 국립대 교수가 재건축 조합장 비리로 교수직을 잃었다. 지방국립대 행정학과 K교수는 지난해 5월 서울중앙지방법원 항소심에서 업무상 횡령·업무상 배임·뇌물 수수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다.

K교수는 상고했지만 대법원이 지난 1월 28일 상고를 기각하면서 유죄가 확정됐다.

국립대 교수는 법적으로 공무원이다. 행정안전부 인사실 관계자는 “K교수는 유죄 확정일로부터 당연 퇴직”이라고 밝혔다. K교수가 재직 중이던 대학 인사팀장은 지난달 24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1월 28일자로 소급해 퇴직 발령이 났다”고 밝혔다. K교수는 지방행정 분야에서 이름난 교수였다.

지방재정학회 부회장과 한국정부회계학회 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다는 재건축 조합장을 맡았다가 결국 발을 헛딛고 말았다.

K교수가 560여 가구 규모의 방배동 소라아파트(현 방배래미안아트힐) 재건축정비사업 조합장을 맡은 것은 2000년. 2001년 중순 한 일간지는 “최근엔 대학교수·기업인 등 신망을 받는 인사들이 조합장을 맡으면서 주민들에게 신뢰받는 조합으로 변신하고 있다”며 K교수 사례를 보도했다.

당시 신문은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지위에 있으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건축 사업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례적”이라고 썼다. 하지만 K교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건축 사업에 나섰다가 수많은 조합장이 그랬던 것처럼 죄를 짓고 명예를 잃었다. 우선 법원이 판단한 K교수의 범죄 사실을 보자.

먼저 업무상 배임. 재건축 전 소라아파트에 상가가 있던 조합 사무장 L씨는 재건축 후 자리가 좋은 101호를 배정받았다. 하지만 기존 상가의 감정효용평가 1순위자인 N씨가 항의하자 101호를 N씨가 배정받고 L씨는 102호를 배정받았다. 사무장인 L씨는 상가 변경으로 인한 감정평가액 차이에 해당하는 5600만원을 N씨로부터 보상받았다.

그런데 L씨는 조합장인 K교수에게 상가 변경에 대한 추가 보상으로 또 다른 상가를 분양받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K교수는 이를 승낙했다. L씨는 수의계약으로 감정가보다 싼 가격에 상가 하나를 더 매수했다.



재개발·재건축 비리의 공통 패턴법원은 “조합 재산 처분에 있어 경쟁입찰,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한 매각 등 공개적인 방법으로 공정하게 처분해 최대한 높은 가격에 매각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적절한 처분 방법에 의하지 않고 조합 사무장으로 특수 관계에 있는 L씨에게 상가를 수의계약해 조합에 재산상 손해를 입혔다”고 판결했다.

횡령죄는 2건이었다. K교수는 사무장인 L씨가 “조합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건선 등 질병을 얻게 됐다”고 하자 공상처리비(공무 중 부상에 대한 비용) 명목으로 돈을 주기로 했다. K교수는 조합 경리직원에게 지시해 조합 계좌에서 채권·채무 조사비용 명목으로 2650만원을 인출해 1650만원은 관련 법무법인에 지급하고, 나머지 1000만원을 L씨 명의 계좌로 송금해 횡령했다.

K교수는 또한 조합과 무관한 자신의 친구에게 조합 자금 4000만원을 임의로 송금했다. 조합 운영비 사업 내역에 이런 인출 내역은 기재되지 않았다. 대여 이틀 후 K교수의 친구는 4000만원을 반환했지만 법원은 “범죄 성립 이후의 사정에 불과하다”며 “피고인(K교수)에게 4000만원에 대한 불법영득 의사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건축 조합장의 단골 비리인 뇌물 수수죄도 비켜가지 않았다. 소라아파트 재건축 단지 내에 조형물 설치공사를 도급받은 것은 K교수 아내 고교동창의 남편인 S씨였다. S씨는 K교수의 처가 자신의 아내와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고 K교수 아내에게 “조형물 설치공사를 자신이 도급받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S씨는 공개 경쟁입찰 없이 수의계약으로 1억8500만원 상당의 공사를 따냈다. 이때 K교수는 사례비 명목으로 S씨로부터 1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K교수 측은 법원 항소에서 K교수의 처가 S씨의 아내에게 이자 없이 1000만원을 빌렸고, 1년 후 돌려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친구 사이임을 고려해도 차용증이 없고, 계좌 이체 등 사후에 차용에 대한 증거자료도 남김 없이 현금 1000만원을 이자 없이 대여하고 돌려받는다는 것이 경험칙상 이례적이고, 또한 K교수의 처가 1년 후에 1000만원을 반환했다는 영수증이나 금융자료 등 객관적인 자료가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K교수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사업체의 치열한 로비 경쟁재개발·재건축 비리는 공통된 패턴이 있다. 시공사는 용역업체에 수주를 주는 대신 조합에 줄 뇌물과 사례비를 받는다. 시공사는 용역업체로부터 받은 금품을 조합에 건넨다. 조합장은 각종 공사업자로부터 공사 수주 청탁을 받으면서 금품을 수수한다. 이 과정에서 정비사업 관리업체는 공무원에게 조합설립 인가 대가 등으로 뇌물을 건네기도 한다.

재건축·재개발 사업은 시작과 동시에 막대한 돈이 소요된다. 그만큼 조합장들이 비리에 얽히기 쉽다. 조합장의 권한이 너무 크다는 점도 문제다. 조합장은 최소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의 사업비를 집행하면서 시공사와 각종 공사업체를 선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시공사, 시행사, 각종 공사업체는 사례비와 뇌물을 제공하고라도 공사를 따내면 이익이기 때문에 치열한 로비 경쟁을 벌인다.

대부분 조합이 불투명하게 운영되는 것도 근본적인 문제다. 조합장과 조합 간부들이 사업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지 않고, 오히려 공모해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한 재건축 조합위원 출신은 “조합장들이 비리에 연관되는 이유는 다수의 조합원과 비리를 함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재건축·재개발을 민간에 맡길 것이 아니라 공공 부문이 주도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아직 공론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줄줄이 구속되는 조합장들을 보면 정부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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