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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보안칩’을 심었어요

종이에 ‘보안칩’을 심었어요

한국의 기술력이 줄줄 샌다. 산업기술 유출 건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지식경제부 자료를 보면 연도별 유출 건수는 2007년 32건에서 2008년 42건으로 31% 늘었다.

지난해엔 45건가량의 산업기술이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 예상 규모는 200조원에 육박할 전망. 산업기술 유출이 국가경제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산업기술 유출 경로가 주목된다.

전·현직 임직원의 기술 유출이 전체의 90%에 이른다. 집안 단속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이다. 유출은 대부분 USB메모리·CD 등 보조기억매체를 통해 이뤄진다.

각 기업이 산업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보안 시스템 구축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포스코, LG디스플레이의 문서 중앙화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이 시스템은 기업의 모든 문서를 중앙 서버에서 저장·관리한다.

개인PC에선 보조기억매체에 문서를 저장할 수 없거나 저장이 제한된다. 내부 임직원에 의한 문서 파일 유출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출력된 인쇄물의 유출은 어떻게 막느냐다. 최근 발생한 산업기술 유출 사건 가운데 인쇄물로 빼돌려진 사례가 적지 않다. 출력문서의 보안은 불가능할까.



삼성전자 사업장 보안용지 사용 계획올 3월 11일 한국조폐공사 기술연구원과 기업소모성자재(MRO) 전문기업 아이마켓코리아는 한 중소기업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사내 기밀을 인쇄한 문서의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보안용지 ‘시큐도큐’를 공급받기로 한 것. 이 용지를 개발한 코레이트의 오원식(40) 대표는 “3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보안용지를 개발했고, 지난해 2월 국내 특허를 받았다”고 말했다.

보안용지의 원리는 간단하다. 여기엔 금속성 센서물질(아모르펄스)이 들어있다. 보안 태그를 종이에 삽입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그래서 보안용지로 인쇄한 서류가 보안게이트를 통해 유출되면 경고음이 울린다. 대형 마트에서 보안 태그를 떼지 않은 제품이 보안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삐’ 소리가 나듯 말이다.

일반 보안게이트에 반응할 수 있도록 설계·제작돼 별도의 게이트 또는 검색대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특히 이 보안용지는 기존 용지와 동일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일반 팩스·프린터에서 사용할 수 있다. 조폐공사 기술연구원 위조방지센터 정대규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조폐공사는 위·변조 방지용 보안용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코레이트의 기술력이 합쳐지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코레이트의 보안용지는 해외 경쟁력도 상당할 전망이다. 보안용지 관련 해외 특허는 아직 없다. 품질과 기술력만 검증 받으면 보안이 절실한 세계 각 정부 또는 글로벌 기업에서 이를 사용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평가다.

오 대표는 “지난해 말 미국·중국·일본 등에 해외 특허를 출원했다”며 “해외 특허가 나면 미국·중국 등 세계 각 정부와 글로벌 기업에 마케팅을 펼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국내 중소기업이 해외 보안시장을 겨냥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코레이트의 임직원조차 예상하지 못한 청사진일지 모른다.

이들의 출발은 그야말로 초라했기 때문이다. 시계를 2005년으로 돌리자. LG CNS 보안사업 담당 과장이었던 오 대표는 그해 해외 바이어로부터 유독 똑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다. “보안시스템을 설치하는 것은 좋은데 인쇄된 문서 유출은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오 대표의 뇌리에 영감이 스쳤다.

‘그래! 보안 태그를 종이에 심으면 어떨까?’ 2006년 사표를 던진 오 대표는 사재를 툴툴 털어 자본금 5000만원을 마련, 코레이트를 설립했다. 직원은 단 5명. 영세 기업이었지만 먹을거리 아이템은 있었다. 출입통제시스템·CCTV 카메라 등 보안기기를 팔면 됐다. 이 회사는 실제로 설립한 지 1년 만인 2007년 2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보안 포장용지 내년 출시

하지만 정작 보안용지 개발 과정은 진통의 연속이었다. 연구개발비 및 사업운영비를 지원받기 위해 많은 기업을 노크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2007년 말 오 대표는 고육책으로 IT기기 유통업체 일본 M사의 문을 두드렸다.

M사 CEO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손으로 만든 보안용지 시제품을 들고 말이다. 이 회사 CEO의 반응은 예상대로 반신반의. ‘2개월 후 만나자’는 말을 되풀이할 뿐 확답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공연히 비행기 값만 날렸다’며 실망했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집었다. M사가 30여억원의 지원금을 쾌척한 것. M사 CEO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임원회의에서 사업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잘해보세요. 하지만 공짜는 아닙니다. 만약 보안용지가 일본에 수출되면 우리가 영업권 50%를 갖겠습니다.”

오 대표는 “한국 기업이 지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요즘도 든다”며 “그나마 일본 기업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후 기술보증기금과 우리은행에서 30억원에 달하는 대출을 받은 것은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 곳간을 채웠다. 이제 남은 것은 보안용지를 개발하는 일뿐.

하지만 이번엔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회사를 하루하루 꾸려나가기조차 힘들었던 시절. 오 대표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쪽배를 근근이 유지하면서 버티느냐 아니면 성장 DNA를 쌓느냐. 장고 끝에 그는 M사의 지원금과 대출금을 모두 연구개발에 쓰기로 결심했다. 직원들에게 ‘2년만 손가락 빨자’고 했다.

“남들은 미쳤다고 했지만 자신 있었어요. 불황에 맞설 힘이 없다면 참는 게 능사라고 여겼죠.” 뼈를 깎는 연구개발의 열매는 알차게 영근다. 코레이트와 조폐공사·아이마켓코리아는 늦어도 4월 중순 본계약을 체결한다. MOU를 체결한 지 한 달여 만의 일이다. 이 계약에 따라 코레이트는 올 6월까지 월 500만 장, 7월 이후엔 월 2000만 장의 보안용지를 조폐공사에 납품한다.

조폐공사는 내부 비밀문서와 각종 계약서에 이를 활용한다. 유출 문제가 심각한 여권에도 사용할 방침. 아이마켓코리아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기흥사업장 등에 순차적으로 이 종이를 공급한다. 비밀서류·설계도면 등에 활용된다. 오원식 대표는 “보안종이로 올릴 수 있는 올 매출은 100억원가량”이라며 “2011년 상반기엔 월 5000만 장 이상이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코레이트가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다. 높은 가격대는 이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보안용지의 소비자 가격은 장당 40원. 일반 종이보다 3배 이상 비싸다. 오 대표는 “생산량 및 판매 상황에 따라 가격은 낮아질 것”이라며 “소비자 가격을 낮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이런 단점을 새로운 아이템으로 극복하겠다는 전략도 세웠다.

일반 대형 마트·서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보안용 포장지를 내년 하반기께 출시할 계획. 보안용지가 아니면 출력되지 않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도 개발 중이다. ‘외부에서 일반 종이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출력해 유출하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다. 올 하반기 출시가 목표다. 이 밖에 보안용지를 선거용지에 활용하는 방법도 구상하고 있다.

코레이트는 코리아와 IT의 합성어다. 한국의 IT기술로 견고한 해외 보안시장의 벽을 뚫겠다는 오 대표의 의지가 이 이름에 담겼다. 코레이트는 오늘도 24시간 가동체제다. 진검승부는 지금부터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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