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 부자만 볼 수 있는 Maastricht Art Fair를 가다
세계 1% 부자만 볼 수 있는 Maastricht Art Fair를 가다
"마스트리흐트 아트 페어 가보셨어요?”
2009년 여름, 세계 최대의 예술품 장터라는 스위스 바젤 아트 페어 전시장을 둘러보다 잠시 쉬고 있던 내게 한 한국인 화가가 말을 붙였다. “여기는 현대 미술이 중심이잖아요. 그런데 거기는 고미술과 앤틱이 주로 나와요. 유럽의 1% 부자들이 모이는 곳이죠. 한번 꼭 가보세요.”
세계사 교과서에서 읽었던 무슨 조약의 체결지 정도로만 알고 있던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Maastricht)는 ‘세계 최고급 아트 페어’라는 이미지를 더하며 그렇게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마스트리흐트 가는 길은 상쾌할 뻔했다. 런던 생 판크라스역에서 벨기에 브뤼셀까지 유로스타로 3시간, 기차를 갈아타고 벨기에 리에주까지 1시간,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까지 30분.
정식 오프닝 시간보다 일찍 마스트리흐트 ‘유러피언 파인 아트 페어’(The European Fine Art Fair, 이하 TEFAF)가 열리는 MECC(Maastricht Exhibition & Congress Centre)에 도착했다. 전시장 입구에 도열해 있는 아르데코풍의 검정과 흰색 무늬 기둥부터 시선을 압도한다. 기둥 사이사이엔 수만 송이의 흰색 장미꽃(물론 생화다)이 장식돼 품격을 더했다.
이미 로비는 인산인해. 척 봐도 때깔이 다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사한 정장으로 차려 입은 남녀들로 가득했다(이날 오프닝에만 1만5000명이 참석했으며 이는 TEFAF 사상 가장 많은 수였다. 전체 관람인원은 7만3000명으로 집계됐다).
벨기에 브뤼셀(1시간 30분), 독일 뒤셀도르프(1시간), 프랑스 파리(3시간) 등과 접근성이 뛰어나다고 TEFAF 조직위는 주장하지만, 아무래도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 열리는 행사에 비해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일 터. 그럼에도 무엇이 유럽의 부자들을 이 네덜란드 남쪽 끝자락의 작은 도시로 이끄는 것일까.
TEFAF의 역사는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스트리흐트에 1975년 만들어진 픽투라(Pictura) 파인아트 페어와 78년 만들어진 앤티쿠아(Antiqua)가 85년 합쳐져 통합 페어가 됐다. 올해는 통합 25주년이다. 네덜란드 앤틱 상인들이 시작한 TEFAF는 지금까지의 고미술 전문 아트 페어를 넘어 현대 미술까지 두루 망라하며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이집트 미술, 유럽 오리엔탈 앤틱 아트, 보석과 희귀한 돈, 회화와 드로잉, 판화, 모던아트, 현대 미술, 희귀 서적과 지도 등 다양하다. TEFAF의 명성이 지금까지 지속된 이유로는 무엇보다 조직위의 철저한 ‘물 관리’를 꼽을 수 있겠다. 우선 부스 관리다. 아무나 이 페어에 부스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직위는 어떤 작품을 갖고 있는지, 신용도는 어떤지 등을 조사하는데 그 정도가 매우 철저하다. 이미 입점한 갤러리의 추천까지 요구한다. 이에 따라 웨이팅 리스트도 길다. 지난해부터 TEFAF에 참가하기 시작한 국제갤러리의 경우 7년 동안 지원서를 내왔다고 한다.
조직위의 철저한 ‘물 관리’둘째, 전시 작품의 철저한 검증이다. 이를 위해 168명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구성된 26개 감정위원단이 페어에 앞서 진품 여부와 출처, 상태 등을 일일이 점검한다. 베팅(Vetting)이라 불리는 단계다. 이 단계를 통과하지 못한 작품은 전시될 수 없다. 또 도난 예술품 리스트인 ‘Art Loss Register’와도 비교해 ‘장물구입’을 예방한다.
‘박물관, 미술관급 수준’의 작품을 사고파는 것이 TEFAF의 목표인 셈이다. 셋째로 고객 관리다. TEFAF 조직위 제임스 라운델 부회장은 “VIP들이 쉽게 마스트리흐트를 찾을 수 있고 TEFAF를 즐길 수 있도록 여행부터 모든 서비스에 신경 쓴다”고 말했다. VVIP를 위한 부스가 따로 있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이곳에서 따로 상담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런 세심함 덕분에 입장료가 1인당 55유로(약 8만4000원)지만 매일 아침 관람객들은 표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3월 12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올해의 경우 17개국에서 263개의 갤러리가 수조원의 가치를 지닌 작품 3만여 점을 들고 나왔다. 커다란 ㄴ자 모양의 전시장은 크게 5개 섹션으로 구분했다.
재미있는 것은 전시장 지명이 샹젤리제, 선셋 블러버드, 피프스 애버뉴나 트래펄가 스퀘어, 타임스스퀘어, 콩코드 광장, 방돔 광장 같은 유명 지명을 써놓았다는 점. 마치 유명한 명품 거리에서 직접 쇼핑하는 듯한 느낌이다. 유명 갤러러들이 만들어 놓은 각 부스도 그 자체로 볼거리였다.
여느 전시장처럼 흰색 칸막이 구조도 있었지만, 많은 부스가 10일간의 행사 동안 자신만의 장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투자한 흔적이 역력했다. 유럽의 고성 분위기를 살리거나 명품 전시장, 별장의 서재를 고스란히 옮겨온 듯한 곳도 많았다. 세계 최고의 컬렉터로 손꼽히는 악셀 베르보르트의 부스는 원목 상태의 나무 기둥들을 세워 오두막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이번 TEFAF에서 화제가 된 작품 중 하나는 런던과 뉴욕에 갤러리를 가지고 있는 디킨슨(Dickinson) 갤러리에서 내놓은 ‘성모마리아와 예수님께 경배하는 세례자 요한’. 르네상스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가 1493년에서 1495년에 그렸다고 추정되는 그림이다. 록펠러 가족이 과거에 소장한 적이 있어서 이 그림은 ‘록펠러 마돈나(Rockefeller Madonna)’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판매가는 1500만 달러(약 170억원)였다.
디킨슨 갤러리가 출품한 고갱의 ‘두 여인(Deux Femmes)’ 역시 이목을 집중시켰다. 2006년 소더비 런던 경매에서 2200만 달러에 팔렸던 작품으로 이번엔 2600만 달러에 나왔다.
몬트리올 갤러리인 랑도 파인 아트(Landau Fine Art)는 자코메티의 작품 ‘세 명의 걷는 남자(Trois hommes qui marchent)’를 2500만 달러(약 283억원)에 선보였고, 혼치 어브 베니슨 (Haunch of Venison)은 데미언 허스트의 돼지 포말데히드 작품 ‘This little piggy went to the market, this little piggy stayed home’(1996)에 1200만 달러(약 136억원)의 가격표를 붙였다.
런던 그래프 다이아몬즈가 마련한 ‘다이아몬드 공작 브로치’는 30.91캐럿이 얼마나 되는 크기인지 잘 보여주었다. 금을 실처럼 만들어 마치 모피처럼 가공한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고르바자의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그는 “10년간 연구한 결과”라면서 한 작품을 만드는 데 1250시간이 걸린다고 소개했다.
뉴욕의 티나 킴 갤러리와 공동으로 참여한 한국의 국제갤러리는 이기봉, 조덕현 등 한국 작가와 앤디 워홀, 아니슈 카포, 조지 나카시마, 루이스 부르주아, 빌 비올라 등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을 들고 나왔다.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은 “아트 페어에 나올 때마다 기본 경비로 2억원 정도가 들어가지만 계속 나와야 신용이 생기고 그래야 거래가 이어진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고가의 상품인 만큼 ‘(저 갤러리의 물건을 사도 되는지) 계속 지켜보는’ 고객들이 많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작품에 대해 물어보는 수준도 전문가 이상이어서 디테일한 것까지 공부해 놓지 않으면 망신당하기 십상이라고 했다.
유럽 최고의 부자들이라도 서열은 있었다. 전시장을 도는데 한 구석이 검정 양복 차림의 남정네들로 완전히 ‘점령’돼 있었다. “누가 부스에 들어갔느냐”고 물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마 어떤 VVIP가 문을 닫아걸고 상품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어느 나라 왕자님 아니면 공주님이라도 되는 걸까. 그들은 도대체 뭘, 얼마나 산 것일까. 세계적인 경제불황이라는 얘기는 적어도 TEFAF에서는 통하지 않는 얘기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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