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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場’ 겹친 대기업 ‘진검승부’ 시작

‘戰場’ 겹친 대기업 ‘진검승부’ 시작

지난 2월 2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그린포럼 2010’에는 기업 관계자 10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SK와이번스(프로야구)와 삼성화재 블루팡스(프로배구), 현대모비스 피버스(프로농구)가 맞붙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국내 재계도 그랬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그동안 각자 확고한 영역을 지키며 성장했다. 산업별로 감히 넘볼 수 없는 진입 장벽 속에서 독주 또는 양강, 많아야 3~4강 구도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속히 달라졌다. 국내 대기업이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 나서면서 전장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각 그룹사가 신성장동력 투자로 점찍은 분야가 겹치기 때문이다. 라이벌 한두 곳만 신경 쓰면 됐던 대기업은 이제 수많은 경쟁자와 맞서게 됐다. 편한 날은 가고 ‘진검승부의 날’이 왔다.



대기업 영역이 무너진다그동안 국내 대기업 간 영역은 성역에 가까웠다. 특히 외환위기 때 정부의 빅딜 정책과 대기업의 사업 구조조정에 따라 대기업 간 영역은 더욱 확실히 갈렸다. 당시 정부가 빅딜을 추진했던 반도체, 자동차, 전자, 조선, 석유화학 등 8개 분야에서 각 기업은 핵심 역량을 집중하며 외국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면 됐다.

국내 대기업 간에 부딪칠 일은 없었다. 거의 모든 산업이 그랬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가전,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확실한 양강체제를 구축했다. 다른 기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통신은 SK, KT, LG가 정부의 보호정책 아래서 오랜 기간 3강 체제를 유지했다.

자동차는 현대·기아자동차가 독주하고 GM대우, 르노삼성, 쌍용자동차가 경쟁했다. 조선산업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STX조선해양, 한진중공업이, 해운산업은 한진해운, 현대상선, STX팬오션, 대한해운, SK해운이 ‘빅5’를 유지했다. 철강은 포스코의 압도적인 선두 속에 현대제철과 동국제강, 현대하이스코가 뒤를 이었다.

정유는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가 나눠 먹었다. 항공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과점, 주류는 진로와 롯데주류BG의 과점이었다. 기계·플랜트 산업은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중공업, GS건설 등이 경쟁했다. 백화점은 롯데·신세계·현대의, 할인마트는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의 3강 구도였다.

거의 모든 그룹에 계열사가 있는 건설산업 분야만 다강체제였다. 이런 구도는 녹색성장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흔들렸다. 우선 국내 주요 그룹이 밝힌 미래 신성장동력 분야가 얼마나 겹치는지 살펴보자. 최근 삼성그룹은 사상 최대의 투자 발표를 하면서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분야를 5대 신수종 사업으로 지정했다.

LG그룹은 태양전지, 차세대전지, OLED, 차세대 조명, 토털 공조를 내세웠다. 신성장 투자 분야가 상당히 겹칠 뿐 아니라 LG가 그동안 공을 들여왔던 생명과학 분야에 삼성이 대거 투자에 나섬으로써 양사의 쟁패는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더욱이 양사가 투자 발표를 하면서 밝힌 목표 시한도 2020년으로 같다.

투자액은 삼성이 23조원, LG가 20조원으로 비슷하다. 다른 대기업도 삼성, LG가 바라보는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SK는 올해 초 미래 성장동력 분야로 무공해 석탄에너지, 바이오연료, 태양전지, 이산화탄소 자원화, 그린카, 수소연료전지 등을 꼽았다. 현대자동차는 하이브리드카와 그린카, 그리고 연료전지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GS그룹은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원전과 신소재, 2차전지, 신재생에너지, 원전사업을 꼽았다. 현대중공업 역시 원전사업에 진출할 뜻을 밝혔고 태양광, 풍력발전, 친환경수처리 산업을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두산과 한화, LG그룹과도 겹친다. 두산그룹은 풍력과 연료전지 등 신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설비를 미래 먹을거리로 정했다.

한화그룹 역시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와 우주항공부품이 미래 성장동력이라고 밝혔다. LS그룹은 친환경, 신재생에너지 분야와 하이브리드 및 전기자동차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이 밖에 대우조선해양과 STX, 동부그룹 등이 친환경 및 신재생에너지, 2차전지 시장 투자에 나섰다.



산업 패러다임 전환기에 승패 갈려

범위를 좁혀보면 더 분명해진다. LG화학이 가장 먼저 치고 나갔던 2차전지 분야에는 SK에너지가 도전장을 냈고 제일모직과 삼성SDI도 2차전지 시장에 뛰어들었다.

태양광발전은 현대중공업, SK케미칼, 삼성정밀화학, LG화학, KCC, STX, OCI(옛 동양제철화학), 한화석유화학, 대한전선이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며 시장에 진출했다.

풍력발전에는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 효성, STX엔진 등이 경합에 돌입했다. 그린카 분야에는 현대·기아차, 현대모비스, LG화학, SK에너지, 삼성SDI, LS산전 등이 투자에 나섰다.

실제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3월 국내 R&D(연구개발) 투자 상위 4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0개 기업 중 7곳이 중점 R&D 투자 분야로 신재생에너지를 꼽았다.

지능형전력망(스마트그리드), 반도체 소자 등 신소재·나노융합, 2차전지와 그린카 등에 투자하겠다는 기업도 많이 겹쳤다. 두 가지 관전 포인트가 있다. 먼저 ‘그린 버블’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많은 대기업이 신재생에너지와 그린 비즈니스 분야로 몰리면서 각 기업의 내공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아직까지 절대 강자가 없는 미래 시장에 각 기업이 얼마나 과감한 투자를 하고 치밀한 전략을 세워 추진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점에는 항상 기업 간 격차가 역전되거나 더 벌어진다”며 “패러다임 전환은 이미 시작됐다”고 밝혔다.

삼성그룹이 대규모 투자를 발표하면서 ‘초격차’를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 사이타마 대학의 다이토 에이스케 교수는 대기업의 형성과 발전, 쇠퇴를 다룬 『국제경영사』를 통해 “대기업이 왜 강력한 경쟁력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떤 대기업이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는 때”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역시 녹색산업을 둘러싼 대기업 간 치열한 격전 속에서 경쟁 우열이 확인될 것이다. 또 하나. 국내 대기업의 미래 성장동력은 총수들이 직접 챙기는 사안이다. 시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올해 국내 주요 기업이 신수종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액수만 80조원이 넘는다.

그동안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현금을 쌓아놨던 대기업이 현실 가능한 ‘액션 플랜’을 속속 발표하고 곳간을 열면서 관련 중소기업으로도 돈이 흘러갈 전망이다. 일단은 대기업 협력사와 증시 수혜주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투자자라면 유심히 살펴야 할 포인트가 있다. 최근 1~2년 사이에 국내 대기업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변화가 있다.

그동안 국내 대기업은 새로운 시장에 진출할 경우 사내에 부서를 만들거나 계열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소형 M&A(인수합병)나 직접 지분 투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보인다. 여기에 초점을 맞춰 기술력 있는 중소벤처를 찾으면 대기업 투자 봇물 속에 ‘금맥’을 캘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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