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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경제’가 뒤집었다

‘바닥경제’가 뒤집었다

이명박 정부 임기 반환점에 치러진 6·2 지방선거. 전 선거와 비교하면 한나라당의 완패지만 지역 분할 구도를 보면 모처럼 지방 권력이 균형 있게 분산된 선거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집권 여당은 당혹했다. 압승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여론조사와 딴판이었다. 부러 강조하진 않았지만 천안함 사태는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청와대와 여당은 “바닥 민심을 몰랐다”고 한탄했다.

무엇이 바닥 민심이었을까? 선거 직전까지 몸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민심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현 정부 집권 후 단 한 번도 정당 지지율에서 여당을 압도하지 못했던 야당은 어떻게 지방선거에서 승리했을까? 이코노미스트는 민심의 실체를 ‘경제’에서 찾았다.

기분 좋은 거시경제 지표는 속속 발표되는데 막상 내 지갑과 집안 사정은 좋아지지 않는 중산층과 서민층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실망이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반대 표심으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그런 정황은 충분하다. 아울러 지방선거 이후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내다보고 부동산, 주식, 채권 시장 등 하반기 투자전략도 알아봤다.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한 여론조사 방식으로는 도저히 훑어낼 수 없었던 바닥 민심은 6·2 지방선거를 또 한번 ‘여당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선거 직전까지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았던 바닥에 깔린 민심. 그것은 천안함의 북풍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풍도 아니었다. 바로 ‘경제’였다.

▎천안함 사태는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천안함 사태는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선거에서 표면적으로 경제 이슈는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한국 경제가 위기를 잘 넘겼다는 외신의 칭찬 때문이었을까? 올 들어 부쩍 좋아보이는 여러 경제 지표 때문이었을까? 집권 여당은 경제를 간과하고 과신했다. 야당도 경제 이슈로 맞붙기를 꺼렸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이변’이라고 부르는 이번 선거 결과는 경제만 놓고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지난 2년간 대다수 유권자는 힘든 날을 보냈다. 중산층과 서민층은 더 괴로웠다. 월급은 안 오르고, 일자리는 줄었다. 대규모 해고 사태는 없었지만 고용 사정은 열악했다. 가계 빚은 늘었고 돈 쓰는 것은 팍팍해졌다. 그 와중에 상하위 계층 간 소득 차는 벌어졌다. 청년 실업률은 속수무책이다.

그게 다 정부 탓이냐고? ‘경제 대통령’을 내세우며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억울할 것이다. 집권 초기 광우병 파동을 겪고 겨우 수습했더니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정부는 어떤 나라보다 신속하고 과감하게 재정을 집행해 큰 위기를 넘겼다. 실제로 해외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신용등급도 올랐다.

거시지표도 좋았다. 아마도 정부는 박수 받을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유권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전체 경제 성적표는 좋아졌지만 지표에 반영되지 않는 개별 서민경제는 힘들었다. 가계가 힘들면 국민은 정부에 책임을 묻는다. 그게 표로 이어진다.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 좋은 사례가 있다. 2007년 대선 직전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 SBS, 한국리서치가 공동으로 조사한 ‘대선패널 1~5차 조사’다. 2007년 17대 대선은 경제 선거였다. 경제가 다른 모든 이슈를 압도했다. 패널 조사에서 경제 성장을 잘 해결할 것 같은 후보를 묻는 질문에 1200명 응답자 중 68%가 당시 이명박 후보를 꼽았다.

대선에서 이 대통령에게 540만 표 차로 패한 정동영 후보는 7%였다. 이때 재미있는 분석이 나왔다. 5차 조사에서 나라 경제 상황에 만족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대부분 그 원인을 기업 혹은 개인의 역할에서 찾았다. 하지만 불만족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그 책임을 정부(58%)와 정치권(32%)에 물었다.

가계 경제도 마찬가지다. 당시 조사 대상자 중 가계경제에 불만족한다고 답한 응답자 중 90%는 정부 책임이라고 답했다. 결국 참여정부는 실권했다.



부유층 vs 서민·중산층 갈린 서울시이를 두고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국가경제나 가정경제에 대해 그 책임을 정부에 돌리는 사람들일수록 정부나 여당 후보에 대해 책임을 묻는 회고투표 성향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쉽게 말하면 경제가 나쁜 것이 정부 책임이라고 판단하면 유권자는 ‘응징의 표’를 던진다는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아무리 장밋빛 거시 지표 전망을 내놔도 정작 중요한 것은 국민 개개인이 느끼는 체감 경기다. 이명박 정부 집권 후부터 지방선거까지 서민과 중산층의 경제 행복도는 높지 않았다. 2009년 초 시장조사업체인 닐슨컴퍼니코리아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 3명 가운데 2명은 ‘경제 위기로 소득이나 자산이 줄었다’고 답했다.

‘경제 위기로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답변은 80%였다. 이 회사가 1년 후 같은 조사를 했을 때 응답자의 88%는 ‘10년 전에 비해 부유층 진입이 어려워졌다’고 답했다.

이런 분위기를 잘 반영한 지표도 있다. 지난 4월 삼성경제연구소가 개발해 발표한 경제행복지수다. 소비와 소득, 분배와 안정과 관련된 지표를 활용해 도출한 이 지표에 따르면 2008년 1분기 0.829였던 경제행복지수는 2009년 2분기 0.635까지 떨어졌고, 4분기에 0.665로 회복했다. 경제행복지수는 ‘1’이 가장 높고 ‘0’이 가장 낮다. 외환위기 때가 ‘0’이었다.

이에 대해 신창목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사견임을 전제로 “만약 그동안 경제가 좋았다면 선거 결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을 것”이라며 “경기 불황에 따른 불만이 이번 지방선거 표심의 기저에 깔려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북풍에 의해 다른 이슈들이 다 잠재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투표장에는 4대 강, 세종시, 무상급식 이슈들이 중요하게 작동했다”고 분석했다. 잠재돼 있던 체감경제 표심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 결과가 이를 잘 반영한다. 서울시가 좋은 예다. 지난 지방선거 때 25개 기초단체장 전부를 가져갔던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에서는 4곳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530표 차 승리로 3선 구청장을 배출한 중랑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다. 부자 동네다. 민주당은 나머지 21곳을 차지했다. 천안함 사태나 정권 견제론, 4대 강, 세종시 이슈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표심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은 “중산층과 서민층 표심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또한 선거 막판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정부가 안보를 선거에 이용해 경제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빠져나가 주가가 떨어지고 환율이 뛰고 있다”고 북풍에 맞서 경제 이슈를 제기한 것이 재테크에 민감한 30~40대 표심을 흔들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도 ‘경제 표심’의 힘을 읽을 수 있다. 심판과 견제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1주기 정국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야당이 승리한 지역은 중앙정치 무대의 이슈보다는 지역 경제 현안에 주력한 후보들이 승리를 거뒀다.

인천광역시에서 승리한 송영길 인천시장 당선자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3선에 도전하는 안상수 현역 시장의 경제 실정을 공략했다. 특히 7조원에 달하는 인천시의 부채 문제와 인천경제자유구역 개발 실패 등을 집요하게 공격한 것이 효과를 거뒀다.

송 당선자는 당선 확정 후 승리 요인에 대해 “초반부터 인천시 부채 문제와 구도심 문제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며 정책 선거를 펼친 것이 주효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텃밭에서 이변을 일으킨 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자 역시 최우선 공약은 일자리 창출이었다. 강원 지역 언론 역시 이 당선자의 승리 요인에 대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강원도 경제를 살려낼 지역 일꾼론을 편 것이 선거에서 주효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당선 직후 “서민들이 서럽지 않게 살아가는 강원도를 만들자”며 “일자리, 복지, 교육에 성공한 자랑스러운 강원도를 만들고 새 출발하자”고 말했다.



“중산층 이하 못 참을 지경 온 것”민주당이 처음으로 광역단체장을 배출하는 데 성공한 충청남도에서 안희정 충남도지사 당선자는 세종시 원안 고수를 강조하면서 지역 민심을 파고든 것이 승리 요인으로 분석된다. 또한 그의 10대 핵심 공약을 살펴보면 행복도시 원안 추진, 충남 내 소하천 정비, 친환경 급식, 혁신형 행복학교, 충청광역경제권 추진, 좋은 일자리 1만 개 창출,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등 지역 경제에 집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안 당선자의 당선 일성은 “지방도 선진국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균형발전의 가장 핵심인 세종시의 차질 없는 건설과 함께 지방재정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이한구 의원은 “MB정부의 경제 실적에 대해 중산층 이하 사람들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지경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유권자와 만나보면 처음에는 경제 실적에 대해 세계 경제 위기로 불가피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모범국가라고 하고, 특히 선거에 임박해 좋은 경제 지표를 많이 발표했다. 신빙성은 차치하더라도 자기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나는 뭐냐?’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근본적으로 현 정부가 부자를 위한 정책을 좋아한다는 선입견이 있는 상황에서 지표는 좋아진다는데 자기는 좋아진 게 없으니까 중산층이나 서민층이 홀대 받는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선거 결과 발표와 동시에 정부도 이런 상황을 절감한 듯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다음 날 아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지방선거 이후 정부는 다시 경제회복과 지속성장에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운찬 총리는 4일 열린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낮은 자세로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며 “단기적으로는 일자리 창출, 물가안정에 힘쓰고 장기적으로는 미래성장동력을 확충해 우리나라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용 변화는 불가피하다.

세종시, 4대 강 사업 등 굵직한 현안은 야당이 대거 포진한 지방권력과 충돌을 빚을 것이 뻔한다. ‘5+2 광역경제권 개발’이나 초광역권 개발 등도 정상 추진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앞으로 2년간 선거는 없다”는 생각으로 국정 현안을 밀어붙이거나 야당 또는 지방정부와 부닥친다면 민심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특히 정부가 국면 전환을 위해 부동산 규제를 대폭 완화하거나 포퓰리즘 경제 정책을 들고 나올 경우 그야말로 악수가 될 수 있다. 익명을 원한 한나라당 의원은 “앞으로 정부가 할 일은 국민이 싫어하는 것은 빨리 접고 괜찮은 일자리 창출과 서비스 산업 규제 완화, 공공부문 개혁, 노동시장 개혁, 지방재정 개혁 등 MB가 원래 약속한 정책을 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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