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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이 반기 든 진짜 이유

현대그룹이 반기 든 진짜 이유

‘고집이 생각보다 세다’. 현대그룹 안팎에서 현정은 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틀린 얘기가 아니다. 현 회장은 한번 밀어붙이겠다고 맘먹으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다.

타협도, 절충도 잘 하지 않는다. 한때 현대그룹의 실세였던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을 퇴출시킬 때 그랬고, 북측이 ‘김윤규 복귀’를 볼모로 으름장을 놓을 때도 그랬다.

‘불도저’로 불렸던 시아버지(고 정주영 명예회장)를 닮았다. 지금이 그런 상황일까. 현대그룹과 외환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의 갈등이 갈수록 격해진다.

채권단은 이미 ‘신규 대출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던진 상태. 현대그룹이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거부한 데 따른 제재다. 현대그룹은 지난해 약정 체결 대상에 선정됐지만 ‘2009년 실적을 지켜보는’ 조건으로 면제됐다.

그러나 현대그룹 전체 자산(금융계열사 제외)의 80%를 차지하는 현대상선이 지난해 부진한 실적을 기록하자 약정 체결 대상에 다시 올랐다. 이를 현대그룹이 수차례 거절하자 갈등이 초래된 것이다.



채권단 제재에 “주거래은행 교체” 맞불현대그룹은 ‘멀쩡한 기업을 부실기업으로 전락시켰다’며 강경하게 맞선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이 재무평가를 공정하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선박을 확보할 때 차입이 발생하는 해운업계의 특성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까닭도 있다. 현대그룹은 “이참에 주채권은행을 변경해 다시 재무평가를 받겠다”며 발끈하고 나섰다.

6월 28일엔 외환은행 여신 1600억원 중 400억원을 상환했다. ‘(주거래은행을) 진짜 바꿀 수 있다’는 선전포고다. 금융권의 압박에 현대그룹처럼 대놓고 반발하는 사례는 드물다. 현대그룹이 채권단의 압박에도 반기를 들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당분간 버틸 수 있다”= 현대그룹이 보유한 현금 유동성은 1조3000억원으로 알려졌다.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금융권 여신 규모는 5000억원 선. 채권단이 여신 회수에 돌입해도 당분간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특히 현대그룹은 주력회사인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를 제외하곤 차입금이 거의 없다. 당장 쓸 돈도 많지 않아 채권단의 압박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올 상반기 실적에서 보듯 회사가 살아나고 있고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어 채권단의 제재조치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적도 가파르게 개선된다. 현대상선은 올 1분기 세계 선사 가운데 첫 번째로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세계 최대 선사 머스크도 따돌렸다.

2분기 매출은 전분기 대비 13% 증가한 1조9885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1분기 116억원에서 2분기 1536억원으로 12배가 됐다. 실적 개선은 더 뚜렷해질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에 봄바람이 불면서 물동량이 덩달아 증가하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의 올 2분기 컨테이너 처리 물동량은 71만8000TEU(6m 규격 크기의 컨테이너)로 전분기보다 17% 늘었다.

이에 따라 해운업계의 실적은 빠른 속도로 개선될 전망이다. 특히 3분기는 성수기다. 벌써 미주 및 구주 노선에서 성수기 할증운임을 부과하는 등 운임 상승세가 계속된다. 해운업체들이 올 3분기 이후 대규모 흑자를 달성할 것으로 예고되는 건 이런 이유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요즘 선박과 컨테이너 박스가 100% 가동률을 보이고 있다”며 “당분간 이런 호황은 계속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3분기, 반전 있다= 3분기 실적이 크게 개선되면 현대그룹은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외환은행이 멀쩡한 기업을 죽인다”는 논리가 입증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상선을 부실기업으로 몰아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관철하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말을 이었다.

“현대상선은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세계 최대 선사 머스크에 이어 두 번째로 적은 손실률을 기록했다. 올 2분기엔 2008년에 버금가는 실적을 기록했다. 3분기엔 실적이 더 개선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환은행이 약정 체결을 강요하는 것은 현대그룹의 이미지와 신용도를 훼손하려는 의도다.”

▎외환은행 등 채권단이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거부한 현대그룹에 대해 신규 대출을 중단하기로 했다. 사진은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현대그룹.

▎외환은행 등 채권단이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거부한 현대그룹에 대해 신규 대출을 중단하기로 했다. 사진은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현대그룹.

하지만 이게 현대그룹이 버티는 이유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금융권의 압박이 장기화되면 제아무리 유동성이 풍부해도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

추가 제재 조치로 대출을 연장해주지 않거나 신규 대출로 갈아타는 기회를 차단하면 현대그룹으로선 위기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현대그룹의 부채는 2조원대. 현대상선이 한 해 지불해야 하는 이자는 2500억원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출금이 끊기면 현대그룹은 그야말로 ‘죽음의 바다’로 직행하는 격이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내 해운업체가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현대건설 M&A가 변수= 현대그룹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강경노선을 걷는 건 현대건설 M&A(인수합병)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대그룹이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하면 자산매각 등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신규 대출은 사실상 막힌다. 그러면 적어도 3조원 이상이 필요한 인수자금 마련이 어려워진다.

현대건설 M&A가 물 건너간다는 얘기다. 그러면 현대건설 M&A를 통해 현대가(家)의 적통을 이으려는 현 회장의 구상에 차질이 생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룹의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사업 포트폴리오의 다각화를 위해 현대건설 M&A를 오랫동안 준비했다”며 “하지만 채권단의 제재 조치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 8.3% 지분 누가 쥐나

현대그룹에 부담스러운 건 또 있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지분 8.3%를 보유하고 있다. 이 지분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현대그룹 경영권의 향배가 결정될 수 있다.

만약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M&A하면 범(凡)현대가의 보유 지분은 38.81%가 된다. 현 회장 쪽 지분율 38.55%보다 많다. 현대그룹의 경영권이 위협받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범현대가가 현대건설을 M&A 해도 경영권은 끄떡없을 것”이라며 “7%에 이르는 우호지분이 있기 때문에 혹여 지분 경쟁을 해도 밀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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