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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가 나를 채찍질한다

콤플렉스가 나를 채찍질한다

뜻밖이었다. 열다섯 나이에 TV CF로 데뷔한 이래 52편의 드라마와 영화·연극을 섭렵한 배우, 내로라하는 시상식에서 웬만한 상은 두루 받아본 톱스타,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 99%가 알아볼 대중문화의 ‘아이콘’. 그런데도 이 배우, ‘콤플렉스’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린다.

그러더니 반박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정말이에요”라고 못 박기까지 했다. 김혜수(40)의 입에선 “자격지심” “부족함” “빈 곳투성이”란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지난 9일 오후 MBC의 국제시사 프로그램 ‘김혜수의 W(옛 ‘세계와 나 W’·이하 W)’의 새 진행자로서 첫 녹화를 마친 뒤였다.

그는 “10대 때부터 연예인이란 좁은 틀에서 살다 보니 늘 일반인의 감수성이나 경험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국제 시사프로그램이란 낯선 도전에 나선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보편적 세계와의 거리감, 그 아득한 콤플렉스가 실은 이제껏 그를 새로운 세계로 떠민 힘이었나 싶었다. 더구나 세계 곳곳을 누비는 이들의 경험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데다 이를 직접 전달한다니 그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World

약자의 고단한 삶을 끌어안다
대기실 거울 앞에 앉아 한숨 돌리던 참이었다.



첫 녹화 잘 하셨나요?“아유, 잘 모르겠어요(웃음). 편안하게 하기는 한 것 같은데.”

마주 앉은 그는 쑥스럽다는 듯 털털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떤다. 짙은 아이라인 아래 반짝이는 눈망울엔 첫출발의 설렘과 긴장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의외였다. 이미 김혜수는 토크쇼 MC 경험이 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SBS ‘김혜수의 플러스유’를 100회까지 이끌었다.

지상파 TV에서 여성 MC가 단독으로 진행한 대화중심의 토크쇼로는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상대방과 쉼 없이 호흡해야 하고 때론 기 싸움까지 해야 하는 ‘인터뷰어’가 돼 본 경험이 있으니 이번엔 부담이 덜할 듯했다. 단독진행인 데다 대본이 있고 실수가 허용되는 녹화방송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미 11년 동안이나 청룡영화상 사회를 도맡아 온 그 아닌가? 그런데 손사래를 친다.

“시사프로그램 진행은 처음인 걸요. 게다가 이 프로는 제작진들이 해외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아주 힘들게 취재해 온 내용을 제가 ‘마무리’하는 역할이니까요.”

W는 간단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지난 5년간의 궤적이 이를 말한다. W는 우리의 시각으로 국제 문제를 취재하고 해석한 첫 심층 시사프로그램이다.

시청자들이 다시 보고 싶은 ‘베스트 W’로 꼽은 아이티의 진흙쿠키, 엘살바도르 맹그로브 숲의 소년 마누엘, 필리핀 딱정벌레 학교, 시에라리온 소년병 등은 분쟁과 빈곤으로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힌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또 ‘영국인 남편의 한인 아내 살인사건’에선 재외 한국인의 안전문제를, 남태평양의 키리바시 섬에서 한국인 선원을 상대하는 10대 성매매 여성들을 취재한 ‘꼬레꼬레아’에선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지적했다.



원래 W를 즐겨 보셨다면서요?“네. 언니가 알려줘서 보게 됐는데 처음 시청한 이후로 시간만 되면 빠뜨리지 않고 봤어요.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잖아요. 보면서 ‘어쩜 아직도 저런 일이 있을까’ 분노하기도 하고, ‘저런 문제는 해결되려면 너무 오래 걸리겠다’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요. 특히 먹을거리가 없어서 진흙쿠키를 먹는 아이티 아이들을 다룬 꼭지는 저한테 조카가 있어서 그랬는지 더 마음에 남았어요.”

“먹을 게 없어서 진흙”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는 금세 촉촉해졌다.

“W를 계기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함께하는 세상 속에 내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죠.”

지난해 11월엔 아예 W취재팀과 함께 네팔로 날아가 구호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게 W를 맡게 된 연결고리였다.

“사실 네팔에 가기 전에 구호단체를 통해서 W취재팀을 만나뵙고 싶단 뜻을 전한 적이 있어요. 평소에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작진에서 출연 제의가 오기 전 일이죠. 이제 세계 각국을 훑으면서 힘들게 취재하고 또 가장 직접적인 경험을 하시는 이 위대한 (제작진)분들과 매주 수시로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얻으면서 그들의 모습을 가까이 보게 됐으니 저로서는 큰 영광이죠.”



We


자격지심이 ‘나’에서 ‘우리’로 생각의 폭을 키우다


W를 맡으면서 새삼스레 그의 ‘관심사’가 주목 받게 됐지만, 그는 본디 오지랖 넓은 배우로 소문나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관심사를 세상에 드러내는 창구인 그의 ‘미니 홈피’는 한때 기사 스크랩으로 빼곡했다.

분쟁지역의 실상, 전쟁 피해, 한-미FTA, 기지촌 성매매 여성 인권, 스크린쿼터까지 국제·정치·사회·문화를 넘나들었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일반 공개를 안 한다.

여배우가 자신의 관심사를 모두 드러내놓는 일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풍토 때문인 듯했다. 다만 지금은 ‘Look Around’라는 코너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이나 분쟁지역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을 공개로 올린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굿네이버스’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궁금했다. 그는 왜 굳이 ‘나’가 아닌 ‘우리’ 또는 ‘사회’에 촉수를 세우게 됐을까? 그 정도 톱 여배우라면 현재의 안온한 삶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나라는 UN에서 가장 많이 국제원조를 받은 나라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받은 만큼 베풀지 않는 나라였죠. 이제는 우리가 받은 걸 돌려줘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어려서부터 어머니나 언니가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오는 걸 곁에서 봐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기도 했고요.”



신문이나 뉴스는 매일 챙겨 보나요?“그러는 편이에요. 밤샘 촬영을 하고 새벽에 다시 나가고 할 때는 그럴 여유가 없지만 가능하면 죄다 챙겨 봐요. 한때는 너무 사회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한동안 사회면 기사를 멀리했던 적도 있다니까요.”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의 입에서 난데없이 ‘자격지심’이란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저는 어릴 때부터 연예인이었잖아요. 연예인, 배우란 직업은 인간에 대한 많은 관심과 관찰이 바탕이 돼야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서 늘 생활의 폭이 좁다고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 남들한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저한테는 턱없이 부족한 면이 적지 않았어요. 나이 먹으면서 스스로 그런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자격지심, 위기의식을 느꼈어요. ‘내가 내 또래와 다르지 않다는 보편성을 확보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의식적으로 빈 곳을 채우려고 노력했죠.”

그의 입에서 ‘콤플렉스’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저는 도시(부산)에서 태어나서 도시(서울)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감수성도 풍부하지 못한 면이 있어요. 사실 ‘도회적인 세련됨’이란 건 나이 먹어서 어느 정도 노력만 하면 순식간에 갖춰지거든요. 그런데 자라면서 자연에서 얻은 정서나 감수성은 인위적으로 채우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걸 한 친구가 느끼게 해줬어요.

30대 초반이었는데 생일날 같이 밥을 먹던 중이었어요. 갑자기 그 친구가 뭔가를 가리키면서 ‘어머, 저것 봐. 감나무야!’ 이러는 거예요. 충격이었죠. 저는 그때까지 나무가 있는지, 그게 감나무인지조차 몰랐거든요. 감나무를 알아보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런 사람을 보고 감동해야 하는 저 자신한테 더 놀랐어요. 연기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감성이 무딘가 싶어서 한동안 감수성을 채워 넣느라 꽤 노력했죠.”(웃음)

그러니 그를 ‘10대 스타’에서 ‘배우’이자 ‘여성’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 콤플렉스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W’의 시청자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김혜수는 W팀과 함께 네팔에서 봉사활동을 벌였다.

▎‘W’의 시청자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김혜수는 W팀과 함께 네팔에서 봉사활동을 벌였다.



Woman

여배우가 살기 험한 세상이지만
김혜수는 보기 드물게 여성팬이 더 많은 여배우다. 팬들은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고 당당한 그의 태도를 선망한다. 반면 남성들의 시선은 이와 사뭇 다르다. 그의 ‘몸’에 집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혜수의 사진엔 ‘관능미’ ‘육감적’ ‘풍만한’이란 수식이 지겹게 붙어 다닌다.

그가 여러 차례 불만을 쏟아놓기도 했다. “이렇게 경박하고 천박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느냐”고. 지난해 말엔 한 매체가 집 앞에 한 달이 넘도록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어 ‘열애설’을 보도한 일도 있었다. 배우니까 감내해야 한다고 하기엔 너무나 폭력적인 일이었다.

여배우로서 자신의 인권이 짓밟혔다는 모욕감이 누구보다 강하리라 여겨졌다. 게다가 그는 요즘 인도의 여성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 덕분에 ‘에코 페미니즘(생태 여성주의)’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더 단단히 하는 셈이다. 그래서 물었다.

“여성이자 얼굴이 잘 알려진 배우로서 본인의 인권을 고민해 본 적은 없나요? 우리나라는 너무나 여자 배우에게….” 여기까지 말하자, 단박에 “험하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곤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는 여배우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직 정착되지 못했죠.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척하는 단계라고 할까요.”



그런 시선이 못 견디게 싫었던 적도 있나요?“있었죠. 분노하거나 불편하거나 상처를 받았던 때도 있었을 거예요(이미 다 잊었고 지나간 일이므로 개의치 않는다는 어조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한테 큰 영향을 주진 못했어요. 그런 부당한 시각이나 대우 이면의 것을 생각하게 됐죠. 어떤 땐 (그런 시선을) 싹 무시해버리기도 하고요. 앞으로 우리 세대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여배우 혹은 여자로 살기가) 편한 때가 오지 않을까요.”



김혜수씨를 보면 나이가 들면서 더 평온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사실 나이를 의식하면서 사는 편이 아니에요. 주로 외부에서 제 나이를 인지하게 해주죠.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연예인 김혜수’와 ‘자연인 김혜수’를 분리하려고 애썼어요. 연예인이 아닐 땐 완벽한 자연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죠. 나이 들면서부터는 그런 강박관념을 버렸어요.”

그는 코를 찡긋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20대 때와 비교하면 서서히 성숙해지고 있죠.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겸손하게 말했지만 ‘삼십대의 강’을 건넌 뒤 그는 확실히 더 깊어지고 단단해졌다. 관객들도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것을 느낄 정도다. 영화 ‘모던보이’에서 소월의 ‘개여울’을 가슴으로 부르고, 드라마 ‘스타일’에서 자매애를 농도 있게 연기했던 건 그가 끊임없이 고민과 성장을 거듭해온 덕분일 듯하다. 하나 더 보태자면, 김혜수는 배우여도, 배우가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인 듯 느껴졌다.



늘 내면의 것을 쏟아내며 사는 게 직업인데 공허함을 느낄 때는 없나요?“주로 그래요, 주로…(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미소를 지었다. 앙증맞으면서도 처연했다). 카메라란 매개를 통해 보는 내가 내 의도와는 다를 때가 많아요. 진정을 다했는데 화면에서는 그게 안 보일 때도 있고 나는 다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진정이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아, 이게 뭔가’ 싶어서 참 허무하죠. 또 전 어릴 때 데뷔해서 인생이 참 단조로워졌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 콤플렉스가 있어서 개인적인 시간은 최대한 유용하게 활용하려고 노력하죠.”



그럼 ‘배우’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혹시 ‘전부’인 건가요?“(목소리를 높이며) 배우가 전부인 적도 전부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배우가 저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배우가 김혜수의 전부가 아닐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경계해요. 어떻게 사람이 배우만 하고 살아요.”

이런 생각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더 옹골진 배우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Will

김혜수의 초대
늘 공부하고 고민하는 이 배우는 다시 큰 숙제를 한 짐 떠안았다. 감사하며 이제 막 숙제를 풀어나가는 중이다.

김혜수는 요즘 영화 ‘이층집 악당’ 촬영 이외에는 W에 푹 빠져 산다. 그는 제작진에 자신이 소개할 꼭지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미리 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취재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도 충분히 말해 달라는 요청도 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하니 간접으로라도 미리 현장을 가보아서 느끼고 고민해본 뒤 시청자 앞에 서겠다는 각오다.

그는 “앵무새처럼 주어진 대본만 읽는 진행자는 되지 않겠다”고 말했다. 현장을 아는 진행자의 눈빛엔 ‘진정’이 담긴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김혜수가 진행을 맡으면서 W도 ‘김혜수의 W’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혜수의 창’이란 새 꼭지도 마련했다. 김혜수는 W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시작이 되길 바랐다.

“오랜 시청자뿐 아니라 ‘진행자가 바뀌었으니 어디 한번 보자’는 마음으로 처음 시청하는 분들까지도 W를 통해서 ‘함께’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게 변화로 이어지길 바라요. W로 마음의 변화가 일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오래도록 그 태도가 유지되면 참 좋겠어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진행이 김혜수이건 누구이건 W의 본질은 같고 저 역시 W의 일부로 있으니까요. 정말 열심히 해보려 해요.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맡고 싶어요.”

인터뷰는 시작한 지 1시간을 훌쩍 넘겼다. 까만 저지 티셔츠와 진으로 갈아입은 김혜수가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나이를 잊은 듯 앙증맞은 미소를 짓기도 하고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진정을 담은 눈빛으로 김혜수가 세계와 우리를 얘기한다. 오는 16일, 그의 첫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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