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새로운 ‘망명세대’
러시아의 새로운 ‘망명세대’
예브게니 치치바르킨은 4년 전만 해도 장래가 촉망되는 34세의 러시아 사업가로 런던에서 각광받았다. 빨간 운동화, 스프레이 낙서가 적힌 청바지, 자신은 ‘모스크바산(産)’이라고 말하는 윗옷 차림으로 러시아경제포럼의 무대에 뛰어올라 엘리트 청중 앞에서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휴대전화 회사 유로셋을 단 5년 만에 10억 달러 규모의 제국으로 키워냈노라고. “신세대 사업가들이 러시아를 세계경제에 통합시키겠다”고 그는 외쳤다.
그가 다시 런던에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러시아 투자자의 간판 스타가 아닌 도망자 신세다. 그의 사업 파트너 두 명이 교도소에 갔다. 그의 회사는 러시아 경찰이 수 차례 급습한 뒤 헐값에 매각됐다. 어머니는 지난 4월 미심쩍은 정황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은 납치와 협박 혐의로 러시아에서 수배 대상에 올랐다. 그는 ‘유니폼을 입은 인간늑대 떼’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법을 이용해 기업체를 강탈하고 훔치는 관료와 경찰을 뜻한다.
치치바르킨은 이른바 ‘러시아의 망명세대(Generation Exile)’다. 러시아의 부패한 법집행 관리들에게 재산을 강탈당하고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국외로 도피한 사업가, 법률가, 회계사, 금융업자들을 일컫는다. NGO인 국제투명성기구는 러시아 사업가 중 정확히 3분의 1이 경찰의 기업체 강탈 표적이 됐다고 추정한다. 모스크바 시청에 설치된 핫라인에 접수된 기업 피해 신고가 지난 한 해 동안 10배로 늘었다(200건에서 2000건 이상). 런던에 거주하는 러시아인 약 30만 명 중 어느 정도가 경찰을 등에 업은 재산 강탈의 피해자 또는 수혜자인지 정확히 집계하긴 어렵다. 그러나 체포의 두려움 때문에 조국을 등진 망명 사업가가 기천 명은 되고도 남는다. 모스크바 소재 여론조사기관 레바다 센터가 지난해 실시한 조사를 보면 더 많은 사업가가 자발적으로 러시아를 떠날 가능성이 크다. 응답자 1600명 중 13%가 러시아를 떠나고 싶다고 했다. 혼란이 극에 달했던 소련 붕괴 1년 뒤인 1992년과 같은 비율이다.
두뇌 유출과 그 원인이 되는 관리들의 공갈 때문에 러시아 경제가 입는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정권을 잡은 지 10년이지만 그동안 러시아는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 경쟁력 순위가 52위에서 63위로 떨어졌다. 오일머니 덕분에 가능해진 막대한 재정 지출과 야심적인 현대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재산권 부문에선 119위로 밀려나 말라위, 니카라과와 비슷한 수준이다. 사법부 독립 항목에선 116위, 경찰 신뢰에선 112위, 전문 경영에선 77위를 기록했다.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의 상승 덕분에 거시경제 측면에서 점진적인 성장을 이룩했지만 석유 이외의 분야에서 러시아가 발전할 조짐은 거의 없다. 주요 야당 중 하나인 ‘다른 러시아당’을 이끄는 블라디미르 리즈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진취적인 사람만이 현대화의 동력이 될 능력을 갖췄다. 하지만 그들이 정부의 박해에 시달린다. 가장 성공한 기업가들이 체포가 두려워 국외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러시아가 어떻게 서방 투자자들을 유치하겠나?”
문제의 핵심은 법집행 당국과 범죄 세계의 결탁에 있다. 그런 야합으로 지난 10년 동안 “떼려야 뗄 수 없는 권력의 결합체”가 만들어졌다고 변호사 블라디미르 파스투코프가 지적했다. 경찰, 비밀 경찰, 정부 관료의 상당수가 법집행보다는 러시아식 ‘기업 사냥’의 만만한 대상을 물색하는 일에 정력을 허비한다. 월스트리트식과 달리 러시아의 공격적인 기업인수는 대부분 무장한 복면 경찰의 폭력적인 급습으로 이뤄진다. 그들은 설득력 없는 혐의를 바탕으로 발부된 영장을 휘두른다. 그 다음 사업체를 강탈하고 합법적인 소유주를 협박하려는 목적으로 장부와 내부 문서, 컴퓨터를 압수한다. 그런 관행은 2003년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유코스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크렘린은 유코스를 분할하고 모호한 증거에 기초해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과 임원, 변호사들을 체포했다. 유코스와 체결한 계약상 인터뷰가 금지된 한 법률고문은 “러시아의 관료들이 ‘푸틴이 한다면 우리라고 왜 못해?’라고 판단하게 됐다”고 말했다.
파스투코프는 2007년 그 여파를 실감했다. 경찰은 자신의 고객이었던 에르미타주 캐피털 매니지먼트를 급습한 뒤, 곧바로 유죄를 선고받은 범죄자에게 소유권을 넘겨주고는 그 회사를 부당하게 이용해 2억3000만 달러의 세금 환급을 받았다. 에르미타주가 당국에 항의하자 경찰은 체포 영장으로 보복했다. 파스투코프는 회사의 새 소유주가 아니라 에르미타주의 이름으로 소를 제기했다는 기이한 이유로 업무상 배임 혐의를 뒤집어쓰자 에르미타주의 임원, 변호사들과 함께 런던으로 도피했다. “난 법학 교수로 헌법재판소장의 보좌관이지만 요즘 러시아에선 권력으로 통하는 범죄화된 법집행 기관들과 맞붙으면 어떤 특권으로도 보호받지 못한다.” 사업가들은 러시아 법원에 항소할 엄두도 못 낸다. 재판 전 보석이 거의 불가능하며 99.5% 유죄판결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피신처가 런던이다. 영국 법원이 러시아의 범죄자 인도 요청을 거부하고 정치적·상업적 망명자들에게 보호를 제공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미디어 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는 푸틴의 뜻을 거스르다가 2001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은 러시아에서 선의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과 순전히 정치적 망명자들의 도피처이기도 한다. 그러나 망명 러시아인 대다수는 치치바르킨 같은 사업가다.
러시아의 기업체 강탈은 종종 정치적 색채를 띤다. 기업주가 야당과 가까우면 특히 위험하다. 치치바르킨은 2008년 말 러시아의 진보민주 정당 ‘올바른 운동’에 가입하면서 당국의 눈밖에 났다. 야당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를 후원하는 주요 기업가 3명은 이스라엘, 런던, 미국으로 도피했다. 넴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푸틴 치하에서 대기업은 수사나 인수 위협, 기업 사냥꾼의 공격으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다. 해외로 도피해 정권이 교체될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는 길밖에 없다.”
러시아에선 심지어 범죄자들도 신변안전을 우려한다. “최고든 최악이든 우리 사회의 가장 활발한 부분이 빠져나간다”고 파스투코프가 말했다. “습격하는 쪽과 당하는 쪽 모두 말이다.” 변호사 알렉산드르 두브로빈스키는 “러시아에 재산을 두면 결코 안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의 의뢰인 블라디미르 네크라소프는 화장품 체인점 아르바트 프레스티즈를 빼앗겼다. 그는 2008년 회사를 터무니없는 헐값에 부패한 경찰관에게 매각하라는 압력에 맞서다가 투옥됐다.
물론 아주 좋지 않은 이야기다. 에르미타주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임원 이반 체르카소프는 1990년대 러시아 기업계를 호령하던 젊고 유능한 사업가들이 “다른 사람의 부를 삼키는” 관료들로 대체됐다고 말했다. “진정한 사업가가 시베리아 호랑이처럼 희귀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치치바르킨도 한때는 조국 러시아를 사랑했다. 그는 모스크바 사무실 바닥에 카펫 대신 유로화 지폐를 깔았다. 루블화를 신뢰한다는 표현이었다. 그런 그도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보는 건 부패라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일각이 러시아의 발전에 중대한 장애가 됐다”고 치치바르킨이 말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적어도 이론상으론 그 말에 동의한다. 메드베데프는 지난해 기업 강탈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격분하며 러시아의 관료집단을 향해 “업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러시아의 ‘법적 허무주의(legal nihilism)’ 문화도 비난했다. 최근엔 경제사범을 사면하는 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그의 대담한 반부패 연설은 대부분 묵살됐다. 메드베데프의 전임자로 여전히 실세를 움켜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지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런던, 뉴욕, 텔아비브로 도피하는 러시아인이 너무도 많아 이제 러시아도 이란, 쿠바, 시리아, 북한 등 두뇌 유출이 극심한 나라의 대열에 합류했다. 망명세대는 러시아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수많은 인재를 잃는다면 푸틴은 아무리 위대한 러시아를 외쳐도 성공할 가망이 없다.
With ANNA NEMTSOVA in Moscow
번역·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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