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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대한제국 황실에서 무슨 일이?

100년 전 대한제국 황실에서 무슨 일이?

조 우 석

얼마 전 소개했던 ‘히로히토 평전’(허버트 빅스 지음)의 그 대목을 기억하시는지? 핏덩이 히로히토에 대한 치밀한 제왕학 교육을 결심했던 일제는 생후 100일이 채 안 된 그를 아예 후견인 집안에 옮겨 살게 했다. 응석받이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게 할아버지 메이지 천황의 생각이었는데, 그는 과연 냉정했다. 공식 의전에 따라 알현하는 군복 차림의 꼬마 히로히토에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주는 게 할아버지 애정 표현의 전부였다. 육친의 정을 그토록 아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 땅의 인질 황태자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히로히토보다 네 살 위인 이은(영친왕)에겐 “정성을 쏟았다”(58쪽). 1907년 당시 조선 통감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온 이은을 처음 만나면서 선물 하사 등 애정표현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정치적 배려를 포함한 복잡한 계산이 섞여 있었겠지만, 그 전후에 전개됐던 풀 스토리가 3권짜리 시리즈물 ‘마지막 황태자’(송우혜 지음, 푸른역사 펴냄)에 상세하게 나온다. 장르는 일반 역사책과 달리 다큐멘터리 소설. 약간의 픽션이 가미된 작업일 텐데 저자에 따르면, 그건 한마디로 ‘독 묻은 사랑’이었다. ‘못생긴 엄상궁의 천하’ ‘황태자의 동경 인질살이’ ‘황세자의 혼혈결혼의 비밀’로 이뤄진 3권 중 제2권에 ‘독 묻은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등장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소년 황태자 이은(영친왕)을 모셨다

▎이토 히로부미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소년 황태자 이은(영친왕)을 모셨다

이은에 대한 배려는 메이지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의 공모였다. 이를테면 이토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깍듯하게 소년 황태자 이은을 모셨다. 냉엄한 메이지 천황은 이은의 도쿄 도착 때 이런 이례적 칙명을 내렸다. “만사, 일본 황태자와 똑같이.”(2권 241쪽) 그런 구도 아래 진행된 황태자의 도쿄 인질살이는 대한제국에 격변이 일어났던 1907년을 기점으로 한다. 그해 7월 고종에 이어 순종이 등극하며 이은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당시 초대 한국 통감으로 이런 변화를 조율하던 이토가 구상한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황태자 이은을 일본에 끌고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일본 황족 여성과 결혼시키는 작전이었다. 근대 일본의 형성과정에서 천황 히로히토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따져본 일본 쪽 이야기인 ‘히로히토 평전’에는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한 한국이, 주로 옆모습을 중심으로 무시로 등장한다. 그 때문에 ‘마지막 황태자’ 시리즈는 ‘황실사로 본 한일합방 100년’을 우리 쪽 시각에서 다뤘다. 더욱이 올해는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가 아니던가?

시리즈 제목처럼 스토리 전개의 중심축은 황태자 이은의 생애와 대한제국의 운명이다. 저자 송우혜가 ‘마지막 황태자’ 시리즈를 쓰게 된 출발점도 의외로 소박했다. 여러 자료에 이은이 일본에서 공부할 때의 학업 성적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그게 그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은이 일본 학습원에서 거둔 우수한 성적에 관한 기록들은 내가 그간 막연하게 알고 있던 황태자 이은의 실체를 대면하는 계기였다. 그 사실을 통보받은 순종이 느꼈던 크나큰 환희와 기대치가 그 짧은 전보문의 문장 안에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음을 밝히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 읽는 재미로만 따지면 아마도 1권이 으뜸 아닐까? ‘못생긴 엄상궁의 천하’에선 이은의 생모인 궁녀 엄상궁이 궁중 권력을 장악한 끝에 ‘황귀비(皇貴妃) 엄씨’ 곧 ‘엄귀비’로 불리게 된 과정을 다룬다. 이에 따르면 엄상궁은 대한제국의 핵심 인물이다. 하지만 그걸 누구 하나 주목한 이가 없었다. 이에 따르면 엄상궁은 뛰어난 지력과 당찬 뱃심, 놀라운 정치 감각과 남다른 권력욕까지 갖춘 여걸로 봐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관파천을 결행한 주역이 바로 그녀였다.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기괴하고 착잡하고 극적이고 기이한 사건인 아관파천의 연출자를 엄상궁으로 설정하고 나니 당시 풍전등화의 황실이 새롭게 읽힌다. 당시 상황과 정세로는 그런 형태의 모험 자체가 정신 나간 짓이었다. 그만큼 최악의 여건에서 발휘된 놀라운 지략이었다. 저자는 그걸 엄상궁 본인의 노력은 물론 상당 대목은 ‘라이벌’ 민비로부터 배운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본래 지밀상궁. 즉 내전에 소속돼 왕비를 측근에서 모시는 역할이었다. 때문에 민비의 일거수일투족과 지모를 곁눈질할 수 있었다. 낮근무 외에 밤에는 독수공방이었고, 그런 나날에는 ‘춘추좌전’을 읽고 또 읽으며 안목을 키웠다.
▎이은의 생모인 ‘못생긴 엄상궁’은 뛰어난 지력과 놀라운 정치 감각을 갖춘 여걸이었다.

▎이은의 생모인 ‘못생긴 엄상궁’은 뛰어난 지력과 놀라운 정치 감각을 갖춘 여걸이었다.

그가 고종의 눈에 들었던 것은 1886년. 당시 엄상궁의 나이는 놀랍게도 서른 셋이었다. 당시 기준으론 중년을 넘어선 시기다. 용모는 출중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체구는 뚱뚱했다. 책 제목처럼 정말로 못생겼던 그가 자신이 모시던 민비를 제치고 고종의 이부자리에 들어갔던 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생각해 보라. 나이 다섯 살에 아기 궁녀로 입궁했던 그가 30년 가까운 와신상담 끝에 당시 궁정의 최고 권력자 민비를 따돌리고 이른바 승은(承恩)을 입었다니! 그건 저자의 표현대로 “조선 궁궐사에서 가장 기이한 일 중 하나”(1권 71쪽)가 분명하다.

물론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 묵고 있을 때라는 초비상 상황임을 감안해야 한다(한 가지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동침 직후 고종이 “정녕 너는 모과와 같구나”하면서 엄상궁의 방중술에 만족했음을 한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고 있는데, 그 대중적 장치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책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법이니 그 점 참조 바란다). 어쨌거나 이 시리즈의 마무리 3권 ‘왕세자 혼혈결혼의 비밀’은 다소 슬프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메이지 천황이 이은에 대한 대우를 180도 바꾸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은에겐 고난의 시절이 닥친 것이다.

황태자에서 왕세자로 불려야 했고, 저택에서 개인교습을 받는 대신 특별귀족학교인 학습원에 편입해 일본 학생들과 경쟁해야 했다. 일본인들은 이은을 열등생으로 만들려고 학령이 높은 학생들과 같은 반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우등생이었던 그를 일본인들은 군사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에 편입시켜 그를 열등생으로 만드는 데 열중했다. 군사학교의 조건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저자의 애국심이 섞인 주장이다. 그건 “소년 인질의 조그만 입을 벌리고 독약을 들이부은 것과 같았다”는 표현한다.

그게 맞고 틀리고를 떠나 서술 자체에 저자의 의중이 너무 도드라지는 대목이라서 역효과를 낸다. 한 가지. 시인 고은은 이 시리즈의 저자에 대해 “견고한 작가이며 사학자”라고 말했다. 그건 오래전 작품 ‘윤동주 평전’에 대한 평가인데, 그런 평가를 이 시리즈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 시리즈는 분명 평가받을 만하지만 그렇게 순도 높은 서술은 아니다. 사학적 엄밀함과 문학적 픽션의 경계가 다소 혼란스럽다. 그리고 문장이 올드패션이다. 그가 47년생이라면 아직 구투(舊套) 문장과는 거리가 있을 나이인데….

[필자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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