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혁명?
패션계의 혁명?
MAC MARGOLIS 뱀가죽 무늬의 모노키니(비키니와 원피스가 합쳐진 형태의 수영복)에 핑크색 데님 핫팬츠를 입은 레아 T(29)가 열대지방의 별장을 연상케 하는 무대에서 걸어 나온다. 중남미의 대표적인 패션 행사인 ‘패션 리우’의 2012 여름 컬렉션 현장이다. 수주일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이 행사에 비치웨어를 입은 늘씬하고 아름다운 모델들이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하지만 레아와 비교하면 나머지 모델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무대를 걸어 내려가던 레아는 카메라를 향해 입을 뾰루퉁하게 내밀고 엉덩이 한쪽을 살짝 퉁기는 듯한 모델 특유의 포즈를 취했다. 그녀의 골반에는 용 문양의 문신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휘파람 소리로 객석이 술렁였다. 요즘 브라질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이 신인 모델이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가 눈치챘겠는가?
브라질의 미녀들은 세계 패션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 왔다. 지젤 번천(브라질 출신의 세계적 모델)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요즘 패션계에서 새 바람을 일으키는 주인공은 트랜스젠더 모델 레아 T다.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패션계에 입문한 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패션쇼 무대에 선 지 1년도 채 안 됐지만 여러 패션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고, 보그지 프랑스판에 누드 화보가 실렸으며, 파파라치의 표적이 됐다. ‘패션 리우’에선 브라질 디자이너 알렉상드레 에르시코비치의 수영복과 블루 맨 컬렉션의 수영복을 선보였다.
올 1월엔 프랑스 패션지 러브의 표지에 영국 출신 톱모델 케이트 모스와 키스하는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2월에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가릴 곳은 가리면서도 섹시하게 옷 입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레아는 현재 Models.com 선정 세계 최고 모델 50인 중 42위다. 하지만 최근 ‘패션 리우’에서 그녀에게 쏟아진 뜨거운 관심을 생각할 때 앞으로 그녀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패션은 위험부담이 큰 사업이다. 연간 거래규모가 어마어마하고 경쟁이 치열한 패션업계에서는 수익을 올리려 무슨 일이든 한다. 언론의 주목을 끌고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겠다며 온갖 수단이 다 동원된다. 전쟁에서 숨진 병사의 피 묻은 군복과 사형수의 얼굴 사진을 게재한 베네통의 광고부터 사진가 데이비드 소렌티의 헤로인 시크(heroin chic: 창백한 피부와 눈 밑의 진한 다크서클 등 마약 중독자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 룩까지 충격적인 요법도 등장했다. 대형 패션 업체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 소비자 취향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상업윤리의 한계에 도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는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마다 패션은 충격적인 방향으로 흐른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젠더 벤딩(gender bending: 남녀 구분이 없는 옷차림)이 그런 경향 중 하나로 꼽힌다. 보그지 이탈리아판과 프랑스판은 최근 남녀 양성을 주제로 한 이미지를 선보였다. 세르비아계 호주인 모델 안드레이 페이직은 국제 패션쇼 무대에서 이런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금발 머리에 납작한 가슴을 가진 이 남자 모델은 무대 위에서 남성복과 여성복을 모두 소화하며 영국 남성잡지 FHM(For Him Magazine) 선정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 98위에 올랐다. 최근 ‘패션 리우’에서 그가 입었던 속이 훤히 비치는 블라우스엔 ‘오 주여, 저는 죄를 지었나이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레아를 필두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당당히 밝히는 트랜스젠더 모델이 늘어나는 추세다. 레아를 ‘패션 리우’의 자사 모델로 발탁한 브라질 수영복 브랜드 블루 맨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토마스 아술라이는 이런 경향을 “벽 허물기”에 비유했다. “우리 브랜드는 민주적이다. 해변은 모두의 공간이며, 레아는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완벽한 상징이다.”
뭔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레아 역시 대가를 치를 만큼 치렀다.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길거리에서 남자들의 저질스러운 농담과 조롱을 참아낸 건 일부에 불과하다. 레아의 본명은 레앙드루 메데이루스 세레주로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른 유명한 축구 선수 토니뉴 세레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니뉴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면서 74경기에 출전해 7골을 득점했다. 거칠고 억센 인상에 키가 큰 그는 브라질 내륙의 미나스 제라이스주 출신으로 국가대표팀에서 탈퇴한 뒤에는 브라질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프로 축구계의 스타로 자리잡았다. 토니뉴는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는데 자녀의 진로를 그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면 그들 모두 축구 선수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앙드루는 아버지나 다른 형제들과 달랐다.
토니뉴는 레앙드루가 남다르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눈치챘다. 어쩌면 브라질 프로 축구팀 코린치안과 상파울루의 경기가 있던 그날부터였는지도 모른다. 토니뉴는 브라질인의 맥박을 뛰게 만드는 축구 경기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려고 자녀들을 경기장에 데려갔다. 그날 어린 레앙드루는 관중석에서 잠만 잤다. 그러나 토니뉴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탈리아 제노아의 삼도리아 축구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 그는 자녀들을 축구 캠프에 등록시켰다. 하지만 레앙드루는 여전히 축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레앙드루가 얼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로부터 한참 후였지만 서서히 자신의 새로운 성정체성을 찾아나갔다. 처음엔 머리를 길게 길러 화려한 스타일로 치장을 하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엔 가슴 성형수술을 받았다. 비쩍 마른 꺽다리 레오가 서서히 나긋나긋한 레아로 바뀌어갔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늘씬한 키를 뽐내는 그녀는 요즘 20대 여성 모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우아하다.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커피색 피부의 섬세하게 각진 얼굴, 그리고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혀 짧은 소리 덕분에 그녀에게서는 아주 나약한, 어쩌면 지나치게 여성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다만 유난히 기다란 손가락과 떨리는 테너 음색(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저음을 내려고 노력한다)은 그 천사 같은 모습과 조화되지 않아 약간 어색한 느낌을 준다.
요즘 레아는 자신감이 넘친다. 하지만 십대 시절 내내 자신의 불분명한 성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했다. 때로는 여자에게, 때로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면서 가끔 끔찍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의 빈정거림과 모욕적인 욕설을 견뎌내야 했다. “사람들은 나를 매춘부, 섹스광이라고 욕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내 주위에 벽을 쌓게 됐다.”
레아는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이탈리아에서 스타일리스트 패티 윌슨의 조수로 일하면서 얼마 안 되는 봉급으로 근근이 살아갔다. 그 무렵 이탈리아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현재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를 알게 됐다. 티시는 레아의 이국적인 미모에 감탄하며 패션계 진출을 권했다. “난 미술을 공부했지만 리카르도가 패션에 심취해서 나도 그의 열정에 전염됐다”고 레아는 말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갈수록 돈독해졌고 레아는 그 우정을 기리려고 자신의 이름에 T(티시의 머리글자)를 덧붙였다. 유명인사의 자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姓)을 버린 예는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레아가 그 길을 택한 이유는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명성 속에 갇힌 안락한 삶보다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스스로 헤쳐나가는 삶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는 어디를 가나 레아 T라는 새 이름을 사용했다. 세레주라는 이름은 출입국 관리소나 관공서용으로만 필요한 이름이 됐다.
레아는 티시의 권유로 카메라 테스트를 받기 시작했다. 처음엔 패션업계 내부의 몇몇 인사와 사진가들만 레아의 존재를 알았다. 하지만 곧 기자들 사이에 이국적인 미모의 브라질 신인 모델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녀의 정체가 밝혀졌다. 브라질에서는 해마다 열리는 카니발 때가 되면 여장을 즐기는 남자 동성애자들과 복장도착자들이 인기를 끈다. 하지만 카니발이 끝나는 동시에 그런 장난스러운 분위기도 함께 사라진다. 레아가 모델로 데뷔했다는 소식은 세레주 가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레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에겐 여자 형제가 일곱 명 있다. 모두 전통을 매우 중시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가톨릭 교도다. 처음엔 아무도 이 소식을 반기지 않았지만 누구도 내게 등을 돌리진 않았다.” 그녀는 가족 중 몇 명이 ‘패션 리우’에서 활약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리우까지 왔었다고 말했다.
아버지 토니뉴도 의연하게 대처했다. 처음에 브라질 언론은 레아와 아버지의 불화 소식을 크게 떠들어댔다. 브라질 북동부의 프로 축구팀 페르남부코에서 코치 생활을 하던 토니뉴는 올해 초 갑자기 “생활을 정리하고 싶다”면서 사임했다. 하지만 그는 공개적으로 레아의 일이 잘 되길 바란다고 말했고, 지금은 이 모든 일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는 최근 브라질의 인터넷 스포츠 매체 LanceNet!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끔 누군가가 내게 모욕적인 욕설을 퍼부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전에 내 어머니 욕도 많이 했다. 우리는 이 일을 극복해 낼 것이다.”
레아는 이미 극복한 듯하다. 그녀는 요즘 성전환 수술을 앞두고 호르몬 치료를 받는다고 차분히 말했다. 그녀에게선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어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트랜스젠더가 모두 매춘부는 아니며 사회의 일원이 되려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난 끝까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당당히 드러내고 활동할 생각이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패션의 문호가 활짝 열려 있는 듯 보인다.
[필자는 오랫동안 뉴스위크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코노미스트와 워싱턴포스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등에 기고했다. 저서로는 ‘마지막 신세계(The Last New World: The Conquest of the Amazon Frontier)’가 있다.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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