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기 글로벌 경영] 과장도 그룹 전용기 타고 바이어 기선 제압
[전용기 글로벌 경영] 과장도 그룹 전용기 타고 바이어 기선 제압
대기업 전용기, 정확히 비즈니스 제트기 등급 기준은 항속 거리다. 한 번 급유로 얼마나 날아갈 수 있느냐로 전용기 수준을 매긴다. 최상급 전용기라면 5000마일 이상, 즉 8000㎞ 넘게 항속할 수 있어야 한다. 삼성은 1995년 프랑스 닷소의 팰컨 900 두 대를 구입해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 항속거리가 5600㎞인 중형급이라 한 대는 미국에 등록해 미주와 유럽지역을, 한 대는 한국에 두고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게 했다.
노승영 코리아 익스프레스 에어 대표는 “최근 그룹 전용기 도입 가격을 두고 비싸다는 여론도 있지만 항속거리가 길어지는 만큼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노 대표에 따르면 운항 중 급유를 위해 중간 기착할 경우 공항 이용 비용이 만만치 않다. 특히 중국, 러시아 등은 기착료가 비싼 곳으로 유명하다. 중간 기착에 따른 서류도 복잡하다. 이 때문에 최근 각 그룹의 전용기 도입은 장거리 운항이 가능한 최상급 비즈니스 제트기가 대세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전용기를 기준으로 2011년 현재 가격은 ‘BBJ2’로 불리는 보잉사의 B737-700의 경우 6000만 달러 선. ‘글로벌 익스프레스’란 닉네임을 가진 캐나다 봄바디어사의 BD-700-1A10은 5750만 달러 정도다. 걸프스트림사의 ‘G550(GV-SP)’은 5350만 달러면 구입할 수 있다. 모두 전자장치 등 각종 옵션과 인테리어 비용은 별도다.
항속거리 외에도 전용기의 가격을 결정하는 다른 요소가 존재한다. 바로 그룹 간 자존심이다. 특히 재계 서열이 비슷한 라이벌 그룹 간에는 총수가 타는 전용기에 대한 첨예한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엔진 업그레이드 방식이나 소음 방지 장치 탑재 여부, 인테리어 등을 특히 따진다. 침실과 회의실, 바와 식당은 물론 대리석 화장실과 가죽 소파, 최고급 원목 가구는 기본이다. 노 대표는 “항속거리와 최고급 인테리어를 감안한다면 전용기 가격은 최고 1억 달러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 가장 먼저 전용기 개념을 도입한 것은 쌍용그룹이다. 김석원 당시 쌍용 회장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 의장을 역임했다. 1991년 국내에서 거행된 잼버리대회를 앞두고 비즈니스 제트기인 ‘챌린저’를 도입한 김 회장은 스카우트 활동과 관련한 국제회의 등에 참석하기 위해 전용기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매각했다.
전용기 경영 효시는 삼성, 현대차는 최고급대우그룹과 동아그룹도 1990년대 초 전용기를 구입했으나 그룹이 해체되면서 모두 팔았다. 노 대표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경우 팰컨 항공기를 파리공항에 계류해 놓고 유럽 등지를 운항했다”며 “세계경영을 외쳤던 그였지만 당시 국내 분위기상 ‘총수 전용기’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용기에 ‘경영’을 접목한 것은 삼성그룹이다. 삼성은 현재 ‘글로벌 익스프레스(BD-700-1A10)’와 ‘BBJ-2(B737-700)’를 한 대씩 보유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물론 최근엔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자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관계자는 “계열사 임직원의 해외출장이 활발해 1년의 절반 이상은 운항하고 있다”며 “그룹 전용기의 공식 명칭도 아예 ‘업무용 비행기’로 바꿨다”고 말했다. 삼성의 경우 해외에서 수행하는 업무의 중요도에 따라 과장급도 전용기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전용기로 간부 사원들의 사기를 높여주면서 상대 바이어의 기선을 제압하는 효과도 거두는 셈이다.
보잉 737을 개조한 삼성의 BBJ-2는 미국까지 직항이 가능해 이동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실내 공간이 넓어 업무용 전용기 가운데 최고급 기종으로 통한다. 노 대표는 “이 전용기에는 응급 사태에 대비한 첨단 의료시설을 탑재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돼 있다”고 말했다.
화려하기로는 현대차그룹의 전용기가 단연 으뜸이다. 삼성이 ‘전용기 경영’의 시초라면 현대차는 ‘최고급 전용기’로 유명하다. 현대차그룹이 보유한 전용기는 삼성과 동종인 BBJ-2. 특히 이 비행기는 100인승 보잉 737-700을 16인승으로 개조한 것으로 국내 전용기 가운데 최고급 기종으로 꼽힌다.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등 해외 유명인사들이 애용한다. 구입과 개조 비용은 8000만 달러 선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테리어에만 1000만 달러 이상이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그룹은 전용기 도입 과정에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이 전용기는 2008년 초 계약하고 2009년 들여왔다. 그러나 이때는 자동차산업이 위기를 맞아 대부분 기업이 ‘초긴축 비상경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급 전용기를 들여왔으니 구설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현대차가 미국 등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게 된 요인 중 하나가 정몽구 회장의 전용기를 이용한 신속한 현지 경영이라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현대차는 전용기 조종사 스카우트 과정에서 삼성과 자존심 싸움을 펼치기도 했다. 삼성과 동종 모델을 들여오면서 삼성 전용기의 엔진과 전자장치를 담당하는 정비사 2명을 스카우트한 것. 비밀리에 진행된 스카우트전에서 두 그룹 간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했다고 한다.
LG그룹 전용기, 가장 자주 떴다재계에서는 전용기를 가장 잘 활용하는 곳으로 LG를 꼽는다. LG는 2008년 4월 걸프스트림사의 비즈니스 제트기 ‘G550’을 도입하면서 전용기 시대를 열었다. 이후 2년 동안 1만100시간에 걸쳐 지구 25바퀴(100만㎞)를 비행하며 그룹 경영진의 글로벌 경영을 지원했다. LG 전용기가 가장 많이 오간 곳은 중국(45회), 유럽(40회), 북미(30회) 순이다.
LG는 올해 2월 최신형 걸프스트림 전용기 한 대를 추가 도입했다. 이 전용기는 지난해 9월 1일 걸프스트림사가 생산한 GV-SP 신제품으로 12인승에 탑승감이 좋다. 항속거리가 1만2500㎞에 달해 보잉 747-400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걸프스트림 전용기는 삼성, 현대 등이 보유한 보잉 737 전용기보다 작은 제트기”라며 “LG가 전용기 매입에서도 외양보다 내실을 따지는 등 그룹 색깔이 드러났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옛 비행기는 오토랜딩(자동착륙 기능)이 없었지만 새로 도입한 신형은 이 기능을 구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LG그룹 관계자는 “이번 전용기 도입은 기존 전용기의 교체 목적”이라며 “가지고 있던 것은 매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항공업계에는 LG가 2013년까지 BBJ-2를 도입하기로 보잉사와 계약한 상태라는 말이 돌고 있다. 2007년 계약이 이뤄졌지만 주문이 밀려 납품이 늦어지자 급하게 기령 5년짜리 중고 항공기를 구입했다는 것이다. LG그룹은 2013년이면 G550 외에도 BBJ-2를 보유할 전망이다.
삼성, 현대차, LG그룹에 이어 전용기를 도입한 곳은 SK다. 2009년 9월 LG와 동종인 걸프스트림사의 G550을 들여왔다. 재계 서열이 비슷한 LG 수준에 맞췄다는 게 항공업계와 재계의 후문이다. 전용기가 없던 시절 최태원 회장 및 계열사 사장단은 해외출장 시 일반 여객기를 이용하거나 대한항공의 임대 전용기를 주로 탔다.
가장 최근 전용기를 도입한 곳은 한화다. 한화는 지난해 9월 기령 4년의 중고기를 들여왔다. 재계와 항공업계에서는 전용기를 도입할 그룹으로 한화를 주목해 왔다. 재계 서열이나 김 회장의 스타일 면에서 가장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김 회장이 세계 석학이나 국가 수장, 재계 인사를 만나기 위해 해외출장이 잦아지면서 도입 시기가 왔다는 분석이 강했다.
재미있는 것은 한화가 재계 서열이 다소 높은 LG와 SK를 뛰어넘어 삼성과 현대차 전용기와 동종인 BBJ-2를 전용기로 선택했다는 것. 보잉737을 개조한 19인승으로 가격은 8000만 달러 선으로 알려졌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김승연 회장 스타일로 볼 때 신형 제트기를 살 것으로 예상했는데 갑자기 중고기를 들여와 의아했다”며 “그래도 이건희 회장, 정몽구 회장과 같은 기종을 선택한 것에서 그의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용기는 구입 비용은 물론 운항·관리를 맡는 별도팀을 운영해야 하는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보잉사가 제작한 전용기는 인테리어와 외장을 포함한 가격이 대당 7000만~9000만 달러(750억~970억원)에 달한다. 게다가 부장·이사급 기장을 포함한 승무원 인건비가 연간 10억원 이상 든다. 1회 운항 비용도 수천만원에 이른다. 서울~샌프란시스코를 왕복할 경우 기름값과 이착륙료, 조업료를 합쳐 5000여만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업계는 추산했다. 전용기 운영비만 연간 150억원 넘게 드는 셈이다.
STX·롯데·신세계도 전용기 구입 저울질이런 이유로 전용기 임대 사업도 호황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두 대의 전용기를 임대했던 대한항공은 올해 초 봄바디어사의 글로벌 익스프레스를 추가 구입했다. 사실 본격적 전용기 시대를 연 것은 한진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한진그룹은 1995년 걸프스트림사의 ‘G-IV’를 도입해 고(故) 조중훈 회장이 사용하는 등 그룹 전용기로 운영했다. 2006년 대한항공이 전세기 사업을 개시하면서 일반 고객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전용기가 없는 재계 인사들의 전세 이용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8 겨울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IO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선발대가 출국할 당시 조양호 유치위원장, 김연아 선수 등이 탄 전용기가 바로 대한항공 소속의 임대형 전용기 B737-700 기종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기업들의 전용기 도입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중소형 전용기 판매는 급감하고 있는 반면 대형 전용기 판매는 꾸준히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형 전용기 고객들의 경우 구입 시 은행 대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경제 상황에 민감하다. 하지만 대형 전용기 고객 중에는 중국·러시아 등 이머징 마켓 신흥 부자가 많아 불황과 관계없이 통 크게 주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전용기를 도입할 그룹은 어디일까? 항공업계와 재계 안팎에서는 STX와 롯데, 신세계 등을 꼽고 있다. 특히 최근 10년 사이 재계 서열이 급상승한 STX그룹의 경우 전용기 도입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현재 STX그룹은 미국 시코르스키사에서 제작한 S92 헬기를 국내에서 운영하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강덕수 회장은 이라크, 브라질 등 해외출장이 많아 사용 효과가 클 것”이라며 “업계에서는 곧 강 회장이 전용기를 갖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 또한 아시아와 러시아에 매장을 두고 있어 도입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노승영 대표는 “신동빈 롯데 부회장이 몇 번이나 전용기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아버지 신격호 회장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안다”며 “러시아 모스크바백화점에서 인도네시아 롯데마트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유통기업으로서 전용기 도입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룹 총수가 해외 현지로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해외 바이어를 모셔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룹 규모로 보면 금호아시아나그룹과 두산그룹도 전용기 도입 후보로 꼽힌다. 금호의 경우 해외 사업이 적고, 최근 그룹 분할이 되면서 사정이 복잡해졌다는 게 중론이다. 게다가 아시아나항공이 있어 큰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분석이다.
두산은 소형 전용기를 워싱턴주에 등록해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계열사 2~3개가 공동으로 소유해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 대표는 “그룹 전용기는 사치가 아니라 자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항공사를 이용했을 때의 시간과 비용을 아껴주기 때문에 경영 효율화에 도움이 된다”며 “전용기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바뀌고 있어 10대 그룹을 중심으로 글로벌 경영을 위한 전용기 도입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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