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아킬레스건과 대안 - “일본식 장기불황 가능성은 작다”
한국경제 아킬레스건과 대안 - “일본식 장기불황 가능성은 작다”
한국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경제성장률뿐만 아니라 잠재성장률도 떨어지고 있다. 각 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4% 남짓이다. 지난해 경제성장률 6.2%보다 크게 떨어진 수치다. 미국·유럽을 비롯한 선진국 경기침체로 수출 전선도 불안하다. 고용불안·물가상승·내수시장 침체 등 악재도 겹쳐 있다.
이에 따라 서민경제도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올 3분기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4.8%를 기록했다. 2008년 이후 최고치다. 생필품 가격은 날로 올라가고 있다. 올 초 20㎏에 4만4000원 하던 쌀값은 현재 4만9000원으로 올랐다. ㎏당 1100원 정도 하던 밀가루는 1300원으로, L당 1950원이던 우유는 2300원까지 올랐다. 고물가는 계속되고 있지만 임금상승률은 0.5%에 그쳤다. 그 결과 실질 임금상승률은 3.9% 떨어졌다. 200만원을 받는 근로자의 실제 임금은 전년보다 8만원 정도 줄었다. 아울러 부동산 가격은 떨어지고 노령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은퇴 시기가 다가온 베이비붐 세대는 피해를 볼 공산이 크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4%(약 700만 명)가 베이비붐 세대다. 이들의 특징은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현금유동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집을 담보로 노후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최근 부동산 경기가 하락하면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이들의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것도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일할 사람이 급감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MB정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10월 3일 라디오·인터넷 연설에서 “한국경제는 자신감을 가져도 될 만큼 튼튼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또 “재정 건전성은 세계에서 가장 양호한 수준이며 GDP(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33%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평균 98%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월 5일 개최된 정부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대외 불안에 국내 경제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실물경기와 고용이 개선되고 있는데도 시장의 불안감이 지나치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중국 리스크’ 대비해 의존도 낮춰야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추가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재영 서울대 교수는 “경제가 회복돼도 개도국 시절처럼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경제가 본격적으로 저성장 국면에 돌입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저성장 국면은 당연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김소영 서울대 교수는 “경제가 성숙할수록 성장 속도가 둔화되는 경향이 있다”며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인호 서울대 교수도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며 “한국경제가 기술적으로 상당히 진보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한국경제가 저성장 국면을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체질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고 강조한다. 첫째 대안으로 ‘대외의존성’을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은 대외무역의존도가 85%(세계 1위)에 달하는 수출의존형 국가다. 세계시장이 위축되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김재영 교수는 “수출이 어려워지면 경상수지가 악화되고 국제 투자자본이 한국을 빠져나간다”며 “수출에 의존하면 세계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영 한양대 교수는 ‘중국 리스크’를 지적했다. ‘중국 리스크’란 저임금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경제도 언젠가는 고물가와 고임금에 발목이 잡힐 수 있음을 말한다. 그는 “2020년 중국 리스크가 실제 위기로 나타날 수 있다”며 “2010년 중반부터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남미·아프리카 등으로 수출지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주요 국가 수출 비중은 중국이 23.4%로 가장 많고, 유럽(14.7%)·미국(10.1%)이 뒤를 잇고 있다.
“불안한 금융시장이야말로 한국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제외환시장에서 한국은 ‘핫머니’의 천국이다. 외환시장 거래액이 하루 100억 달러 정도인데 역외선물환 시장규모는 50억 달러로 추산된다. 국제 핫머니가 원화시장을 흔들고 있다는 말이다. 이영 교수는 “외환거래에 대해 토빈세를 도입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토빈세는 단기성 외환거래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김병연 교수는 “한국의 외환시장은 ‘섀도 마켓(그림자 시장)’ 성격이 짙기 때문에 국제투기자본들이 환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며 “따라서 외환시장을 육성하고 토빈세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영 교수는 “국제 금융시장이 악화되면 신흥국 시장에서 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이 선진국 시장이나 주요 신흥국으로 분류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IMF와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에서 이런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말했다.
환율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항구적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소영 교수는 “지금처럼 외환보유액 축적만으로는 외환시장의 불안전성을 극복하는 건 어렵다”며 “항구적인 통화스와프, 투기적 단기자본 이동에 대한 제약, 지속적인 아시아 금융통화 협력 등 다양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극적인 방법론도 제기되고 있다.
고용창출 여력 큰 산업 규제 풀어야
신관호 고려대 교수는 한국경제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으로 ‘가계부채’를 꼽았다. 올 1분기 한국의 가계부채는 처음으로 800조원을 넘어섰다. 개인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53%로 미국(132%)·일본(130%)을 크게 웃돈다. 신관호 교수는 “가계부채 증가는 소비수요를 감소시켜 총수요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가계부채뿐만 아니라 정부부채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증세보다는 재정지출의 효율화가 좋은 대안이라고 말했다. 김소영 교수는 “세금만 가지고 정부부채를 줄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정부 지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재영 교수는 “세금 인상은 곧바로 민간 경제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일단 ‘쓰고 보자’는 식의 재정운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인호 교수 역시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해 증세하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서비스업 더 키워야서민경제의 부활을 촉진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김병연 교수는 서민경제의 핵심을 ‘일자리 창출’이라고 했다. 그는 “고용창출이 큰 산업들에 대해 규제를 풀되 상대적인 저리대출을 지원해 잠재력 있는 기업가의 유동성 제약을 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소영 교수는 “세금으로 만든 재원으로 공공부문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보다는 고용 창출을 위한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인호 교수도 “서민들이 일하면서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환경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며 고용창출이 한국경제의 선결과제라고 밝혔다. 이영 교수 역시 “자본 중심에서 인적자본과 노동 중심으로 조세와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병연 교수는 “이미 직장을 가진 사람은 프리미엄을 받고, 취업을 못한 사람은 불이익을 받는 구조의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킬 필요가 있다”며 “사회보험을 늘려 실업 등의 부작용을 완충하는 장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산업구조 재편도 시급하다. 내수시장을 키울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신관호 교수는 “의료·법률·교육·유통 등 서비스업의 규제를 점진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 교수는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산업, 수출보다는 내수 쪽으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며 “특히 의료·교육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인호 교수는 “높은 교육 수준을 활용할 수 있는 서비스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는 것이 맞지만 상황에 따라선 규제가 필요한 분야도 있다”며 “대표 서비스업인 금융은 신뢰 유지를 위해 더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병연 교수는 “내수산업인 서비스업이 규제 때문에 제약을 받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서비스업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고서는 고용·성장 등 성과가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의료·교육 분야의 규제를 완화하고 관광산업 육성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산업구조 재편과 규제 완화를 통해 신성장동력을 찾는다면 일본식 장기 불황에 돌입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영 교수는 “현재 한국의 산업과 시장이 더 다각화된다면 일본처럼 장기 불황 국면으로는 접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영 교수는 “선진국 단계로 진입한 상태에서 불황을 맞은 일본과는 상황이 다르다”며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아직 고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장기 불황을 맞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병연 교수는 “일본의 장기 불황은 금융위기에 대한 잘못된 대응과 일본식 제도의 문제점이 결합돼 발생한 것”이라며 현재 한국경제의 위기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박성민 이코노미스트 기자 sampark2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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