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ria Political Crisis] 시리아의 봄은 오는가
[Syria Political Crisis] 시리아의 봄은 오는가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에겐 자신의 아버지인 하페즈 전 대통령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들이 있다. 하지만 바샤르는 아들의 후계 수업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needn’t worry about training his son for future rulership). 현재 시리아에서는 바샤르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로 9개월째 유혈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40년 전 하페즈 아사드가 세운 왕조적 독재정권이 위기에 처했다.
왕조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Dynasties are made, not born).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1세의 노고와 재능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그는 14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국경지대를 주름잡던 전사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사람들은 오스만 제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된 과정에 무척 흥미를 느꼈다(So beguiling was the advance of this Ottoman dominion). 그래서 후대에 와서 오스만 제국의 위대성을 말해주는 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스만 1세가 노아(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히브리 족장)의 52대손이라는 내용이다. 현재에 걸맞게 과거도 고귀하게 포장된다(The present ennobles the past). 위대성의 정도는 위대한 과업을 시작한 사람들(그리고 그 배경)과 보통 사람들의 거리가 멀게 느껴질수록 더 커진다(Greatness is in proportion to distance from the men—and the settings—of great undertakings).
북아프리카의 위대한 역사학자 이븐 칼둔(1332~1406)은 왕조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왕조는 생겨나서 왕국들을 낳고 쇠퇴해 간다(they rise, they beget kingdoms, then they decay). 다른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다(like all created things).” 그는 또 “한 왕조가 영광과 위세를 얻고 잃는 과정은 4세대 안에 끝난다(Glory and prestige are gained and lost within four successive generations)”고 말했다. “한 가문의 영광을 이룬 사람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주고 그것을 지탱하게 해준 자질을 지켜나간다.”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은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접하며 그에게서 교훈을 얻는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아들은 아버지보다 열등하다. 세상 이치를 학습을 통해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체득한 사람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다(A person who learns things through study is inferior to a person who knows them from practical application).” 그 뒤를 잇는 3세대는 조상들을 모방하고, 4세대는 모든 걸 잃는다. 그들이 누리는 영광이 혈통에 따라 주어진 것일 뿐이며, “집단적인 노력이나 개인의 자질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아랍인들은 나사브(nasab, 혈통)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우수성, 즉 고귀한 혈통을 굳게 믿는다. 하페즈 아사드가 자신의 배경에 대해 상반된 설명을 늘어놓은(was ambivalent about his beginnings)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사드는 집권한 지 10년 째 되던 1980년 학식 높은 명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린 시절의 역경을 이야기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학비를 구하지 못해(couldn’t scrape together the modest tuition) 학교를 잠시 그만둔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평민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가(aga)’ 계층에 가까웠다.” 오스만어로 ‘아가’는 어느 정도 지위나 재산이 있는 사회 지도층(a chief, a man of some standing or means)을 말한다. 또 같은 해 한 농민조합에서 연설할 때 하페즈 아사드는 농민들에게 자신이 그들과 다름없는 농민이라고 말했다. “난 뼛속까지 농민이며(I am first and last a peasant) 농민의 아들이다. 곡식단이 쌓인 탈곡장에 누워 있으면(To lie amid the spikes of grain on the threshing floor) 세상에 어떤 궁전도 부럽지 않다(worth all the palaces in this world).”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원했다(He had pined to leave that poverty). 그래서 산골 마을을 떠나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라타키아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군복은 그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하마와 알레포, 다마스쿠스 등 유서 깊은 도시의 재래시장과 이슬람사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무슬림 형제단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도시의 인구 밀집지역에 모여 살던 수니파 장인들은 이슬람의 핵심 종파가 아닌(beyond the pale of Islam) 산골의 무명 종파(알라위파)의 농민 출신인(an Alawite peasant at that, hailing from an esoteric mountain sect) 아사드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a violation of the natural order of things)이라고 여겼다. 시리아는 이슬람 세계에서 자국의 위치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다마스쿠스는 아랍 최초의 왕국의 본거지였으며, 헤자즈(사우디아라비아 서부의 홍해 연안 지방)에서 출발한 사막의 전사들이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서 처음으로 머무르던 곳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선지자 마호메트는 이 도시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다마스쿠스 주변의 언덕에서 이 도시와 구타(Ghouta, 한때 다마스쿠스를 둘러쌌던 정원과 과수원)를 내려다 봤다. 다마스쿠스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하는 말에 따르면 이곳의 경관에 매료된 마호메트는 이 도시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마호메트는 자신이 다마스쿠스를 천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그곳에 들어갔다간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he feared he would be denied paradise in the afterlife were he to enter it in his lifetime)고 말했다.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초에 빌라드 알-샴(동방제국)의 영토를 정복했다. 아나톨리아부터 이집트까지, 이라크 사막부터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땅이다. 그들은 이 땅을 세 지방(베이루트와 알레포, 다마스쿠스)으로 나눴다. 제국은 성쇠를 거듭했다(Imperial power ebbed and flowed). 그리고 각 도시는 정계와 종교계 지도자, 그리고 도시에 살면서 농민과 소작인들을 지배하던 지주들이 통치했다. 이런 사회 질서를 설명하는 말이 바로 봉건제도다(Feudalism was the word that described that order). 시골 지역은 방치됐고 도시 상류층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so consuming was the hauteur of the urban elites). 산골 농민 출신이 성지 순례의 중간집결지인 다마스쿠스를 지배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would have been heresy at the time).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in the aftermath of the Great War) 프랑스는 시리아(그리고 레바논)의 신탁통치권을 얻었다(acquired a mandate). 프랑스는 이 불안한 나라를 25년 동안 통치했다. 도시 지역에 거주하거나 수니파인 시리아인들은 프랑스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가난했고, 레반트(동부 지중해 연안의 제국들)의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But for all its brevity) 프랑스의 신탁통치는 시리아 독립 이후의 국가 형성에 일조했고, 하페즈 아사드가 정권을 잡는 데도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indirectly gave rise to the rule of Hafez Assad).
프랑스는 ‘레반트 특수부대(프랑스 신탁통치 하의 시리아 군대)’의 병사를 드루즈파와 알라위파, 이스마일파 등 소수파에서 주로 뽑았다. 도시에 사는 수니파는 군복무를 하층민의 일로 여겨(thought it the work of lessers) 회피했다. 하지만 가난한 산골 오지에 사는 알라위파에게 군복무는 구원이었다. 1930년생인 하페즈 아사드는 군입대를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택했다(took that route out of poverty). 라타키아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그는 힘든 노동과 가난한 삶(life of toil and destitution)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시리아가 프랑스에서 독립한 지 10년이 지난 당시 시리아 정치는 매우 불안했다.
시리아 최초의 쿠데타는 시리아 독립 3년 후인 1949년에 일어났다. 그후로도 이런저런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구질서가 무너져갔다. 혈통과 재산을 자랑하던 봉건 귀족들의 내분으로 의회 정치는 엉망이 됐다(had given parliamentary politics a bad name). 이데올로기가 기득권 세력을 공격했다(Ideology was battering the world of the notables). 공산주의자들, 대시리아 민족주의 신봉자들, 무슬림 형제단 추종자들, 그리고 농민들이 구질서의 전복을 꾀했다(had made certain that the old order would be overwhelmed). 여러 정당 중 바트당이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다마스쿠스 출신의 재능 있는 젊은이 두 명(그리스정교 신자 미셸 아플라크와 수니파 무슬림 살라 알-딘 알-비타르)이 파리의 라틴 지구에서 설계한 정당이다.
폭넓은 독서로 지식을 쌓은 이들은 야망에 부풀어 귀국했다. 이들은 교사가 돼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들이 자신들의 조직으로 끌어들인 젊은 학생들은 시리아(그리고 이웃 나라 이라크)의 정치 판도를 바꿔 놓았다. 이들이 설립한 바트당은 하페즈 아사드의 지평을 넓혀 주었고, 그가 정치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데 바탕이 된(that carried him to the summit of political power) 정치 철학과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바트당의 두 설립자는 정계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플라크는 1966년 자신이 설립한 정당에서 축출됐고, 비타르는 1980년 시리아 정권의 보안요원에게 살해됐다).
음모와 쿠데타의 공화국인 시리아에서 하페즈 아사드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as the supreme practitioner of the art) 두각을 나타냈다. 바트당의 쿠데타는 1963년과 1966년, 1970년,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쿠데타에서 아사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았고, 2차 쿠데타에서는 공동 주모자(a partner)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옛 동료를 상대로 한 3차 쿠데타에서는 승자가 됐다. 아사드는 이 3차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그는 2대 바트 정권의 부절제와 극단주의에 대항하는 “교정운동(corrective movement)”의 지도자를 자처했다. 쿠데타에 성공한 아사드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It was winner take all). 그가 축출한 대통령은 투옥됐다가 1992년 석방된 후 들것에 실려 파리로 추방됐다(sent to Paris on a stretcher). 그리고 그곳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아사드와 같은 알라위파로 예전의 군 동지였던 한 인사는 1993년까지 옥살이를 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하페즈 아사드의 공화국은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Violence was at the ready in Hafez Assad’s republic). 하지만 그는 가학적인 성격을 지니진 않았다(But he was not a sadist)[이런 특성은 아사드 정권의 실무 총책임자(chief enforcer)였던 그의 남동생 리파트에게서 나타난다]. 아사드의 폭력은 선택적이고 체계적이었다(His violence was selective and methodical). 그는 소수파 출신답게 늘 약삭빨랐다. 모든 일을 은밀히 진행하면서도 대담했다(There was stealth and steel in him). 그와 협상에 나섰던 사람들은 그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상대의 그런 면모를 유심히 살피고 배운 인물이다. 그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직후 아사드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협상을 끝낸 키신저는 아사드의 지성과 끈기를 칭송했다. “아사드는 평정을 잃는 법이 없었다(never lost his aplomb). 그는 마치 전문 도박사처럼 대담하면서도 집요하게(daringly and tenaciously) 협상에 임했다. 상대로부터 얻어낼 만한 양보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얻어내려(to make sure that he exacted the last sliver of available concessions) 했다. 언젠가 난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협상 테이블에서 고의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who deliberately moved themselves to the edge of a precipice) 사람들을 봐 왔다. 더는 내놓을 카드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to show that they had no further margin of maneuver) 제스처다. 심지어 한발을 벼랑 밖으로 내디디며(put one foot over the edge)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하는 사람들도 봤다. 하지만 정말로 벼랑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다. 물론 벼랑 중턱에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 매달리려는 심산이지만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아사드는 빙긋이 웃었다.”
시리아인들은 아사드의 폭정으로 두려움에 떨었지만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적 위상을 높인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시리아를 중동 지역의 꼭두각시에서 능동적인 주역으로 탈바꿈시켰다(he had changed Syria from a plaything in the region to a player)고 극찬했다. 하지만 그는 국방장관 시절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골란 고원을 빼앗겼다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골란 고원을 되찾을 수 없게 되자 그는 그에 버금가는 수확을 거둬들였다(he did the next best thing). 사실상 레바논과의 국경을 없애고 레바논을 거의 합병하다시피 했다(he all but came into possession of Lebanon).
아사드는 1976년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도들의 요청을 받고 레바논으로 가서 그들이 팔레스타인과 좌익 민병대에 대항하도록 도왔다. 그는 수시로 입장을 바꿔 가며(He changed sides innumerable times) 레바논인들에겐 허울뿐인 주권을 남겨주고(left to the Lebanese the shell of their old sovereignty) 다마스쿠스에 앉아 레바논을 통치했다. 무슬림, 기독교도, 성직자, 정치인을 막론하고 그에게 반대하는 레바논 지도자들은 모조리 암살되거나 차량폭탄 테러를 당했다. 모두 아사드가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국제사회는 레바논 문제라면 진저리를 쳤고, 하페즈 아사드는 실제론 방화범이면서도 외부 세계에는 유능한 소방관처럼 보이는 재주가 있었다(Hafez Assad, the arsonist, had a knack for presenting himself to powers beyond as a capable fireman).
그의 포학한 행동이 절정을 이뤘던 곳은 종교적 색채가 두드러지는 레바논 중부 평원의 도시 하마다. 하마는 수니파인 무슬림 형제단의 본거지로 일찍이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바트당원들과 갈등을 겪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바트당이 농지 “개혁”으로 조용하게 지내던 농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반대하며 마찰을 빚었다. 하마의 기득권 세력과 정부 보안군 간의 충돌은 1982년 2월 레바논 사상 초유의 유혈 사태로 치달았다. 도시의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하페즈의 동생 리파트가 스탈린의 숙청을 모방해(took the Stalinist purges as a model to emulate) 이 일을 수행했다. 당시 하마의 인명피해 규모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게 잡아도 1만 명은 될 것으로 추명되며, 그 4배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하페즈 아사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정권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his regime was there to stay)는 메시지를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 주었다. 그는 국민을 정치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거래를 제안했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만 않는다면(so long as they led apolitical lives)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바트당의 한 관리에게 자신이 지닌 세계관의 핵심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땅과 자동차, 집 등 경제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런 욕구는 어떻게든(in one way or another) 채워줄 수 있다.” 하지만 시리아 국민 중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치에 깊이 관여하며 그에게 반대하는 소수(많아야 200명)의 사람들이 있다. “메제 감옥은 그런 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다마스쿠스 교외에 있는 메제 감옥은 무시무시한 곳이다. 그밖에도 한 정치범이 “죽음과 광기의 왕국”이라고 부른 팔미라의 사막 감옥 등 그와 유사한 감옥들이 있다.)
하페즈 아사드는 1994년 개인적인 비극을 맞았다. 자신의 후계자로 훈련시키던 장남이 바셀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안과의사인 차남 바샤르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아사드는 헌법을 자신의 뜻대로 수정했다(He bent the Constitution to his will). 2000년 그가 사망하자 차남 바샤르(당시 34세)가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낙관적인 시리아인들(Syrians hoped for the best)은 런던에서 유학한 훤칠한 키의 이 젊은 대통령이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던 자유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다마스쿠스의 봄’을 기대했다. 새 대통령은 서양 담배의 수입을 허용했고, 다마스쿠스에 재즈 클럽과 미술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샤르는 국민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offered his people an olive branch). 그는 홈스의 수니파 가문 출신으로 런던에서 태어난 상류층 여성 아스마 알-아크라스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줬다. 하지만 ‘다마스쿠스의 봄’은 곧 끝났다. 시민 광장이 폐쇄됐고, 반체제 인사들이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The young inheritor was his father’s son).
1년 전 ‘아랍의 봄’이라고 불리는 정치 폭풍이 중동을 휩쓸었을 때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는 끄떡없다”고 공언했다. 당시 국민들이 퇴진을 요구한 통치자들은 나이가 들었지만 그는 젊었고, 반미·반이스라엘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정권은 그런 폭풍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는 자신이 국민과 뜻을 함께 하는 대통령이라고 말했다(He was at one with his people, he said). 하지만 지난해 3월 중순 남부의 황량한 도시 다라에서 일단의 소년이 건물 벽에 정권을 비난하는 내용의 낙서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소년들은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독재 정권 내부에서도 기존 질서가 붕괴할 위기에 처했다(their order hung by a thread)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시리아의 독재 체제는 국민의 두려움을 바탕으로 유지돼 왔지만(The system rested on fear), 그 두려움이라는 벽이 무너져 버렸다. 바샤르는 의사 출신답게 시위대를 병균(germs)에 비유했다. 40년 동안 독재에 시달려온 시리아인들에게도 유머 감각은 남아 있었다. 시위대는 ‘시리아의 병균들엔 새 의사가 필요하다(The Syrian germs require a new doctor)’는 피켓을 들고 항의했다. 바샤르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지키지 못했다(had squandered his father’s bequest).
[필자는 스탠퍼드대 후버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며 후버 연구소 이슬람교 및 국제질서 조사위원회의 공동 위원장이다.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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