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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s History] 영화로 만나는 ‘철의 여인’

[Movies History] 영화로 만나는 ‘철의 여인’



자신을 에워싼 채 노려보는 유럽 지도자들 앞에서 영국 총리가 홀로 용감하게 맞선다. 그들은 모두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억양으로 비난을 퍼붓는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장면이다. 지난해 12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정부예산 통제권을 유럽연합에 넘겨줄 수 없다고 버텼듯이 수십 년 전 마거릿 대처도 유럽 지도자들에 맞서 싸웠다. 다른 점이라면 그 ‘철의 여인’은 큰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언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야심적인 관료들에게 호통쳤다. 당신들이 세우려는 인위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거대국가는 독일의 지배를 받고 경제위기로 분열된 ‘바벨탑’이 될 것이라고. 그녀는 통화통합 참여를 거부하다가 1990년 물러났지만 유로화 위기가 잦아지면서 그녀의 회의론이 힘을 얻는 듯하다. 2011년 12월 대처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전기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으로 그녀가 빅스크린에 등장했다. 메릴 스트립이 불가사의한 리얼리즘으로 그녀를 연기했다.

“대처 여사는 30대(30ish)”라고 1957년 BBC 방송 메모는 기록했다. “아주 예쁘고 옷차림이 대단히 매력적이다(very pretty and dresses most attractively).” 그 정치 지망생은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한다(assembles her thoughts well)”고 그 보고서는 평가했다. “하지만 그녀의 주된 매력은 ‘직업여성(career woman)’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거릿 대처가 매드 멘 세대(the Mad Men generation, 1960년대 흡연, 음주, 성차별, 인종차별의 특징을 지닌 남성중심적인 문화)의 만연한 성차별(sexism)을 극복하고 1979년 총리에 오르기까지 22년이 걸렸다. “그녀가 총리가 된 걸 모두 내심 껄끄럽게 여겼던 일이 기억 난다(I remember everybody was sort of secretly tweaked that she got in)”고 대처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메릴 스트립이 회상했다. “여자가 총리가 되다니. 그렇다면 미국에서도 언제든 여자 대통령이 나오게 된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대처가 뜨자 그녀의 역설적인 신비감이 비판자와 지지자 모두의 환상을 부채질했다. 그녀의 정치경력과 함께 페미니즘도 진화했지만 대처에게는 비유와 비하 발언(put-downs)이 계속 따라다녔다. 열 추적 미사일 같은 눈(eyes like heat-seeking missiles), 철의 여자 속옷(Iron Knickers), 바람둥이(flirt), 재수 없는 여자(bitch), 손가방(the Handbag 또는 the Bag) …. 다른 여성 실력자들은 그런 수모를 겪지 않았는데 유독 대처에게만 그런 일이 생겼다. 그녀를 외조하는 점잖은 남편은 엄처시하의 공처가(a cowering milquetoast)로 묘사됐다. 그녀가 체제(status quo)에 주는 위협은 그만큼 대단했다. 하지만 그녀는 국내의 보수파 혁명가이자 세계 지도자로 총선에서 세 번이나 승리했다. 세계 지도자로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냉전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으며 구미 세계의 이념적 지형을 바꿔놓았다.

실권 후 20년 사이 그녀의 정신은 희미해지고 한때 신비스럽던 이미지도 바랬다. 노조를 깔아뭉개는 여장부의 캐리커처로 화석화되거나(calcified as a caricature of a union-busting battleax) 앙겔라 메르켈, 힐러리 클린턴, 콘돌리자 라이스 등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다른 여성들의 업적에 빛을 잃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예견했던 유로화의 동요 그리고 그녀가 가장 열정적으로 자유시장을 옹호했던 이념적 갈등의 재개로 상황이 바뀌고 있다. 그녀는 모호한 언행(equivocation)을 참지 못했다. 당 대표 시절 몇몇 보수당원이 노선을 벗어나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다고(showing deviationist liberal tendencies) 판단되자(그녀는 그들을 wets 즉 ‘자유보수주의자’로 불렀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책을 들고 보수당 본부를 찾아가 선언했다. “이게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영화는 대처의 정신적 퇴화에 초점을 맞춰 대처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그녀에 비견되는 정치 지도자 레이건의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의 이미지와 유산을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의 비판은 더 광범위한 문제 한 가지를 간과한다.

스트립은 ‘철의 여인’의 마스크 뒤에 감춰진 나약한 인간을 섬세하게 묘사했다(nuanced portrayal of the vulnerable human being). 이는 정치인이자 지도자로서뿐 아니라 하나의 여성, 아내, 어머니로서 대처의 업적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일깨워 준다. 하지만 영국에선 그녀를 둘러싼 논란이 상당히 많아 여권운동계에서도 그녀를 같은 편으로 내세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2009년 해리엇 하먼 노동당 부대표가 영국을 바꾼 16인의 여성 정치인 리스트를 공식 발표하면서 대처를 빠뜨렸다. 비난여론이 거세진 뒤에야 리스트를 수정해 발표했다. “여권운동가조차 그녀를 거부했다는 건 여자가 권력을 갖는 데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거부감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have something to do with our profound ... discomfort with women in power)”고 스트립이 말했다. “아니면 그에 대한 공포이거나.”

어쩌면 더 중요한 사실(그리고 이것이 그녀의 궁극적인 승리일지 모른다)은 그녀가 여권운동의 선구자였다는 점이 아니라(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분명 여권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녀의 아이디어가 아직도 우리 현실과 관계있다는 점일지 모른다(is still relevant for her ideas). 이 모두는 오늘날 우리가 대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1925년 마거릿 로버츠(대처의 결혼 전 이름)가 태어난 잉글랜드는 계급에 의해 종종 운명이 결정되는(class often determined destiny) 나라였다. 그녀의 아버지 앨버트는 14세 때 학교를 그만둔 뒤 훗날 식품점을 운영하며 현지 정치의 지도적 인사가 됐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자(Sacrifice today for a better tomorrow)”가 앨버트 로버츠의 캐치 프레이즈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게으름뱅이들에게 유리하고 근로자들에게 불이익을 준다고(for penalizing the workers in favor of the shirkers) 비판했다. 그의 가족은 식품점 2층에서 살았다. 집에 사치품이라곤 전혀 없었다. 예컨대 실내 화장실도 불필요한 시설로 여겼다. 모든 게 마거릿의 교육에 희생됐다. 집에 책이 넘치고, 그녀는 음악 레슨과 웅변강습(지방 사투리를 없애려고)을 받았으며 물론 매주 마을 의회 모임(town-council meetings)에 참석해 아버지 로버츠 시장의 업무를 지켜보며 토론에서 배움을 얻었다. “마거릿은 아버지로부터 아주 강하고 일관된 정견을 물려받았다”고 어느 전 측근이 회고했다.

대처는 영국에서 그녀가 속한 계급의 여성은 물론 거의 누구에게나 대학교육이 그림의 떡일 때(when few in Britain could hope for a university education) 옥스퍼드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아버지의 교육열에 보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 같은 개천의 용(little upstarts)을 배척하고 억누르기 위해 세워진 장벽에 처음으로 맞닥뜨렸다. 식품가게 딸은 웅변강습을 받았더라도 미래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다수의 기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 대학의 유명한 토론 모임(debating society)이 대표적이었다. 5월 무도회(May Balls)나 정장 만찬(black-tie dinners)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총리로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조차(at the height of her powers) 소시민 계급(petit-bourgeois) 출신으로 낙인 찍혔다(was stigmatized). 언젠가 벨기에의 한 정치인이 영국인인 로이 젱킨스 유럽공동체(EC) 위원장에게 그녀를 가리켜 말했다. “이제 진짜 식품점 딸이 연설하는군(there speaks a true grocer’s daughter).”

1951년 26세의 나이로 10년 연상의 남자와 결혼할 때 마거릿 대처는 이미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수년간 군 복무 후 제대하자마자 첫 부인에게 이혼을 당했다. 드니스 대처는 3대째 이어져 내려온 가업인 페인트·플라스틱 회사를 운영하는 익살스런 중소기업 사주였다. 드니스는 논쟁적이지 않고 붙임성이 있었으며(personable without being controversial) 내성적이지만 따분하지 않아(retiring but not anodyne) 완벽한 배우자(the perfect consort)였다. 그는 아내의 높은 지위를 시샘하지 않았으며 적어도 대처만큼 보수적이었지만 결코 그녀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풍자잡지들이 그의 아주 드문 기벽을 과장하려고(to talk up his few eccentricities)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 없었다. 마거릿 대처의 생애에서 2003년 사랑하는 남편 드니스의 죽음보다 더 큰 비극은 없었다.

드니스가 결코 재벌(a plutocrat)은 아니었지만 마거릿은 그의 부와 사회적 지위 덕분에 후보 선정 위원회의 속물근성에 위압당하지 않을(face down the snobbery) 수 있었다. 그녀도 보수당의 필수품인 모자와 진주를 가졌으며 큰 저택과 정원을 자랑할 수 있었다. 일부 중산층의 정원에 반유대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지만(the anti-Semitism that lay hidden like a noxious weed) 대처는 그런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런던 북부 핀칠리 지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대인 집단은 1958년 그녀를 공화당 의원 후보로 선출했다. 그녀는 마침내 매번 퇴짜를 맞던 패턴에서 벗어나 승리를 얻어냈다. 훗날 보수당 지도자들은 그녀에게 다른 선거구를 배정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아랍 지도자들이 그녀를 ‘시온주의자들의 포로(a prisoner of the Zionists)’로 간주할까 두렵다고 외무부 관계자들이 피터 캐링턴 상원 원내대표에게 귀띔한 직후였다.

대처는 정력적으로 의정활동을 했다. 영화는 대처가 쌍둥이 자녀 마크와 캐럴을 돌볼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무척 애를 쓰지만(goes to great lengths) 그녀는 언제나 변함없이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고수했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고집스럽게 가족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항상 남편을 위해 저녁식사를 요리하며 훌륭한 부부관계를 이뤘다.

대처는 의회에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눈에는 잘 띄지만 신뢰성은 떨어진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녀는 셜리 윌리엄스 노동장관에게 말했다. 대처는 재무부 차관 시절 국가연금에 관한 논쟁 중 자신의 탁월한 화력을 처음 과시했다(brought out her superior firepower). 그 주제에 관한 그녀의 방대한 조사에 의원들이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Her massive research on the subject reduced the House to shocked silence). 의장이 반대 의견이 없는지 두 번이나 소리쳐 물어야 할 정도였다.

1970년 대처의 노력이 마침내 열매를 맺어 에드워드 히스 총리 내각의 교육장관으로 임명됐다. “내 존재는 주로 구색용 여성(statutory woman)이었다”고 그녀는 회고록에 썼다. “말썽 많은 현안에 관해 ‘여성’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원할 가능성이 높은지 설명하는 일이 나의 주요 업무였다.” 히스는 개인적으로 그녀를 싫어했다. 다른 각료들도 처음부터 대처를 냉대했다(from the outset Thatcher was cold-shouldered by the rest of the cabinet). 하지만 그녀에 대한 왕따는 곧 사소한 문제가 됐다(The sense of being an outsider was soon dwarfed for her). 그녀가 학교재건 프로그램을 위해 초등학교 우유 무료배급을 중단하자 비난여론이 빗발쳤다. 피 냄새를 맡은 노동당은 전례 없는 ‘악녀 추방(Ditch the Bitch)’ 캠페인에 앞장섰다. 사람들을 선동해 ‘우유도둑 대처(Milk Snatcher Thatcher),’ 그녀의 집, 심지어 가족까지 공격하도록 했다. “그때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고 그녀가 회고록에 썼다. “정치적 소득은 눈곱만큼 얻으면서 정치적 비난은 바가지로 덮어썼다(had incurred the maximum of political odium for the minimum of political benefit).”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실제 정치에서 그 교훈이 자신의 상사 히스에게 적용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1974년 석탄광부 파업이 끝나지 않자 그는 총선을 요구하며 ‘영국을 누가 통치하나?’라는 주제로 공격을 시작했다. 연료 절약을 위한 주 3일 근로제(a three-day workweek)에 넌더리를 내던 국민은 모호한 판정을 내렸다(gave an ambiguous verdict). 근소한 표차로 해럴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의 복귀를 선택했다. 일반 보수당원들은 히스에는 염증을 느꼈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내각까지 싫어하지는 않았다. 대처가 그의 당 대표 자리에 도전했을 때 영국의 최대 도박체인은 그녀의 승률을 50 대 1로 예상했다(gave her 50-1 odds). 그녀는 자신이 여성임을 강점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손을 털고 떠나갈 때(when everyone else walks off and leaves it)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일을 계속하는(stick with a job and get on with it) 여성의 능력이 있습니다.”

당에 불만을 품은 한 그룹의 의원들이 대처를 도와 승리를 이끌었다. “전형적인 여성이었다”고 선거 승리 소식이 전달됐을 때 자리에 있던 한 의원은 돌이켰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우리 모두에게 키스했다(she burst into tears and kissed us all).” 하지만 길 아래쪽 보수당 중앙사무국의 반응은 더 원색적이었다(was more visceral). “맙소사! 그 계집이 이겼다(The bitch has won)!”고 당 부의장이 외쳤다. 그녀는 여성으로선 사상 최초로 보수당 대표가 됐다. 히스는 즉시 TBW(That Bloody Woman, 저 망할 여자)를 성탄절까지 몰아내자는 캠페인에 착수했다.

그녀는 두 차례 잇따라 미국을 방문했다. 케인즈주의의 실패부터 소련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안에 관한 대담한 성명으로 대처는 화제의 인물(a sensation)이 됐다. 한 미국 언론이 페미니즘에 빚을 지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성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성해방 운동이 태동하기 오래 전에 우리 중 일부는 성공을 이뤄내고 있었다(Some of us were making it long before women’s lib was ever thought of).” 그러나 귀국길에 이미지 변신수술(reconstructive surgery on her image)이 필요하다는 당 공보 보좌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헤어스타일, 음성, 옷차림을 모두 바꿔 시트콤 캐릭터보다 정치가에 가깝게 면모를 일신했다. 모자도 벗어 던졌다.

소련 언론이 그녀를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부르면서 그녀의 새 이미지가 정착됐다. 심각한 파업이 수개월 동안 계속된 탓인지 사람들은 구부러지지 않는 금속(unyielding metal)에 매력을 느꼈다.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은 영국을 붕괴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had pushed the country to the brink of collapse). 시체가 매장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매장 인부 노조 파업) 수퍼마켓의 상품이 바닥났다(운수 노조). 이런 전국적인 혼란은 TV를 통해 과장되게 전달됐다. TV 기술자 노조가 파업을 하지 않을 때뿐이지만 말이다. 1978년 3월 29일 철의 여인은 노동당 정부를 상대로 한 불신임 투표(a vote of no confidence) 그리고 이어 다음 해 총선에서 승리했다.

총리 취임 후 첫 두 해 동안 정책이 실패하고 집행은 미숙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히스가 떨궜던 고개를 다시 쳐들어(reared his embittered head) 대처의 통화정책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1981년에 이르러선 대처의 지지도가 사상 최저수준인 23%까지 떨어졌다.

그녀는 사납게 반항했다. 보수당 대회에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넣어 유턴을 요구하는 진보파에 맹타를 퍼부었다. 감동적인 연설이었다. “한마디만 하겠습니다(I have only one thing to say). 원하는 사람은 되돌아 가세요. 나는 돌아가지 않습니다(you turn if you want to. The lady’s not for turning).”

대처는 다시 해외에서 주된 성과를 올렸다. 유럽연합의 복싱 링에 올라(in the pugilistic arena of the EU) 영국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고 미국에선 새로 선출된 레이건 대통령과 만나 우정을 다졌다. 하지만 서로 존중하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never let their mutual regard inhibit her in the slightest). 레이건이 자신의 동의 없이 영연방의 일원인 그레나다 침공을 명령했을 때는 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expressed her rage directly). 반대파들이 유치한 말로 놀려댈 동안(몇몇 동료는 하층계급 출신배경을 강조하려고 힐다라는 중간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명성과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그녀를 가리켜 이렇게 불평했다. “불쾌하고 거칠며 시야가 부족하고 지도력이 없다(She’s a bitch, she is tough, she lacks scope, and cannot lead).”

대처에게 지도력이 없다는 말은 슈미트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was spectacularly wrong). 무엇보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그녀의 통솔력과 권위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사건으로 ‘여성지도자(Leaderene)’ 그리고 대단히 호전적인 애국심을 가진 영국 총리로서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섬을 침공한 뒤 대처는 아르헨티나인들을 쫓아내기 위해 신속하게 해군 기동타격대를 파견했다. 미국은 미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날까봐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reacted queasily). 레이건은 알 헤이그 국무장관을 파견해 대처를 실망시켰다. 그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타협을 중재하려(to broker a deal) 노력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대처는 군대를 철수하도록 배후에서 압력을 가한 사람을 모두 물리쳤다(had seen off everyone who behind the scenes pressed her to back down).

당시 마침 런던을 방문 중이던 헨리 키신저가 그녀를 겨냥한 음모(caballing against her)를 목격했다. 외무부에서 오찬을 할 동안 외무장관, 외무부 당국자 그리고 그 방에 있던 모든 전직 외무장관들로부터 “협상을 선호한다(in favor of negotiation)”는 말을 들었다. 그날 늦게 키신저는 다양한 협상 방안 중 무엇을 선호하는지 대처에게 물었다. “그 말에 그녀가 폭발하고 말았다”고 키신저가 말했다. “그녀는 ‘오랜 친구인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느냐(how could you, as an old friend, even suggest this)?’고 발끈했다. 나는 아무 제안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부하들이 내게 한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아르헨티나의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72일이 걸렸다. 총 사망자는 아르헨티나 군인 649명, 영국군 255명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대처는 그녀의 사전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했다. “그 소식을 기뻐하라 … 기뻐하라(Just rejoice at that news ... rejoice)!” 그녀의 반대파들은 그녀의 억양이 너무 의기양양하고 부적절하다고(was too triumphalist, too unseemly)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대다수 영국인은 이 전쟁으로 그녀를 영웅시하게 됐으며 그녀는 고대 영국의 여왕 전사 보아디케아의 현신이라고(as a modern-day incarnation of Boadicea) 칭송받았다. 1983년 총선에서 과반수를 144석 초과하는 압승을 거뒀다(romped home).

하지만 또 하나의 전쟁, 국내에서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벌이는 전쟁에선 고전했다(there was nothing to celebrate). 1984년 10월 12일 그녀는 IRA에 살해당할 뻔했다. 그녀는 브라이턴에 있는 그랜드 호텔 객실에서 당대회 연설문을 가다듬고 있었다. 호텔에서 터진 폭탄으로 5명이 숨졌으며 그중 두 명은 대처 정부의 장관이었다. 그녀와 남편은 간신히 부상을 모면했다(narrowly escaped injury). 그녀는 곧장 당대회에 나가 “여왕폐하의 민선정부를 해치려는 시도(an attempt to cripple Her Majesty’s democratically elected government)”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대처 정부의 경제정책 중 적어도 일부가 먹혀 든다는 잠정적인 신호도 있었다. 인플레이션은 5%로 떨어졌고 금리도 9%로 내려갔으며 경제성장의 아주 작은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2기 정부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Her second term was a juggernaut). 그녀는 혼자 힘으로 유럽 위원회가 10억 파운드를 뱉어 내게 만들었다. 사실상 매서운 푸른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by fixing them with her steely blue eyes) 핸드백으로 테이블을 내려친 게 전부였다. 히스파의 마지막 잔당이 내각에서 쫓겨났다(were booted out of the cabinet). 국유 독점기업들이 분리돼 민영화됐다. 공공주택(government-owned subsidized housing) 100만 호를 분양해 새로운 주택소유자 계급을 형성했다. 이른바 빅뱅 법안(Big Bang legislation)은 런던의 금융업종을 외부에 개방해 경쟁을 유도했다. 최고세율이 60%에서 40%로 인하된 반면 평균소득은 25% 증가했다.

어쩌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노조(the trade unions)의 힘을 축소하는 법이 새로 제정됐다는 사실이다. 대처는 히스를 무릎 꿇린 석탄 광부들과도 대결할 준비가 돼 있었다(was ready for the showdown). 그녀는 석탄 재고를 비축한 뒤 좌파 광부들과 정면으로 맞섰다(piled up coal stocks and went toe to toe with the left-wing miners). 그들의 지도자는 노조원들의 여론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리비아의 카다피로부터 돈을 받았다. 1년에 걸친 광원노조의 파업은 많은 탄광 마을에 폭력과 생활고를 초래했다(이들의 파업은 영화와 연극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로 극화됐다). 그러나 1973년과 1978년의 성공적인 파업과는 달리 다른 지역의 조명이 꺼지지 않고 경제가 계속 원활히 돌아갔다.

일찍이 대처는 종종 성적인 뉘앙스를 교묘히 풍기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got her way through the skillful manipulation of sexual assumptions). “나와 대화한 많은 정치인은 그녀가 처음에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었다고(how attractive and flirtatious she was) 평했다”고 스트립이 말했다. “그녀는 여성적인 매력의 힘을 알았으며 그룹의 홍일점이 되는 걸 정말 좋아했다.” 런던의 만찬 파티에선 커피 마실 때 숙녀가 자리를 비켜주는 관습이 있었다. 뒤에 남은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며 정치와 스포츠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다른 숙녀들이 물러날 때도 마거릿은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made a point of staying). 그리고 다른 부인들에게는 합석을 권하지 않아 그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샀다.

대처는 남성들에게 털끝만큼의 경의도 표하지 않았다(never showed a scrap of deference to the men). 그녀는 누가 한가지 문제에서 자신에게 동의하면 모든 문제에서 동의하기를 기대했다. 로드 하웰 에너지 장관을 비롯한 각료들은 토론 대신 언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대처는 아주 날카로운 면모를 보였는데 어느 정도는 전술이었다(could be very shrill, partly as a tactic)”고 그녀의 외교 보좌관 로드 파웰이 시인했다. “그녀는 많은 상황에서 여자라는 점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했다. 예컨대 정치·내각 동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경우다. 공립학교 교육을 받은 영국 남성은 여성과 논쟁하도록 교육받지 않았다는 점을 그녀는 알았다.” 대처의 오만한 행동(bossy-boots routine)은 몇몇 젊은 의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번은 약간의 간섭을 한 적이 있다”고 현 보수당 정부의 프랜시스 모드 재무부 국고국장(paymaster general)이 말했다. “그녀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eyes blazed) 마치 테이블 위로 기어올라 핸드백으로 나를 후려칠 듯(wallop me with her handbag) 테이블 맞은편의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데이비드 캐머런 현 영국 총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대처 여사와의 첫 만남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캐머런이 회상했다. “보수당 조사부의 성탄절 파티 때였다. 나는 통상산업 데스크의 젊은 직원이었다. 총리가 우리 모두와 대화하러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따뜻한 와인잔을 들고 서 있었다. 총리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서더니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오늘 나온 무역통계를 봤소(Have you seen the trade figures out today)?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갑자기 음악이 딱 멈춘 느낌이었다(felt like the music had suddenly stopped). 불행히 나는 수치를 보지 못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1987년 총선 승리 이후(총선에서 3회 연속 승리한 총리는 그녀가 160년 만에 처음이었다) 대처는 국제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국제무대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폴란드에 희망을, 아프가니스탄에 스팅거 미사일을 줬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거래할 만한 사람(a man I can do business with)”이라고 판단되자 그와 레이건 셋이서 함께 비할 데 없는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해(formed an extraordinary troika) 유럽 공산주의의 몰락을 이끌었다. 하지만 독일 통일에 관해서는 상당한 우려를 품고 있었다.

“그녀는 거인처럼 전 세계에 걸터앉았다(bestrode the world like a colossus)”고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이 말했다. 처음에는 나약함의 상징이었던 대처의 핸드백은 더 없는 권력을 상징하게 됐다. “대처에 관해 이야기한 남자들은 그녀가 가방을 집어들 때 무엇이 나올지 몰라 불안했다고 털어놓았다”고 스트립이 말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Your heart went into your feet)고 하더라.” 한 각료회의에 장관들이 도착했을 때 대처는 없고 그녀의 가방만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이를 본 환경장관이 “핸드백이 여기 있으니 회의를 시작합시다”고 제안했다. 핸드백은 그녀의 핵심 테마(leitmotif)가 됐다. 그녀와 충돌한(fell foul of her) 정치인들은 종종 언론에서 “핸드백질 당했다(handbagged)”고 묘사됐다. 사실상 사람의 겉과 속을 모두 털어가는 강도질의 절충형태(a cross, in effect, between a mugging and an evisceration)를 의미했다. 1988년 조지 슐츠 미 국무장관은 핸드백 대훈장(the Grand Order of the Handbag)을 그녀에게 수여했다. 그녀의 촌철살인 문장을 가득 채운 애스프리 핸드백이었다.

]결국 대처 자신도 한때 그녀 앞에서 설설 기던 남자들에게 당하고 말았다(mugged by the men who had once cowered before her). 1989년 보수당은 유로 가입 문제를 두고 의견이 양분됐다. 대처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그녀의 가장 오랜 동지 중 제프리 하우 부총리와 나이젤 로슨 내무장관 두 명이 등을 돌렸다(broke with her). “많은 보수당 의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당이 승리하려면 그리고 더 중요한 차원에서 자신들의 의석을 지키려면 그녀를 몰아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오스본이 말했다. 당 중진의원들의 은밀한 실태분석에서 대처가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0년 11월 중순, 쥐 죽은 듯 조용한 의원들 앞에서(to a hushed assembly of M.P.s) 하우가 사임을 발표하며 행동을 촉구했다. 이어 대처 내각의 국방장관이던 마이클 헤즐타인이 총대를 메고 리더십에 도전했다(by initiating a leadership challenge). 자신은 불사신이라고 믿었던(believed she was invulnerable) 대처는 지지세력을 규합하지 않았다. 유럽에 관한 노선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총리직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녀는 재정주권을 포기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경고했다. “우리가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금리든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단일통화(one single currency)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게다가 냉전 종식을 기념하는 파리 정상회담 기간 중에 선거일정을 잡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게 치명타였다. “그녀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파리에 가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고 키신저가 회고했다. “그녀의 반대세력이 커진다고(forces were building up against her)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처 자신도 한때 그녀 앞에서 설설 기던 남자들에게 당하고 말았다(mugged by the men who had once cowered before her). 1989년 보수당은 유로 가입 문제를 두고 의견이 양분됐다. 대처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그녀의 가장 오랜 동지 중 제프리 하우 부총리와 나이젤 로슨 내무장관 두 명이 등을 돌렸다(broke with her). “많은 보수당 의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당이 승리하려면 그리고 더 중요한 차원에서 자신들의 의석을 지키려면 그녀를 몰아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오스본이 말했다. 당 중진의원들의 은밀한 실태분석에서 대처가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0년 11월 중순, 쥐 죽은 듯 조용한 의원들 앞에서(to a hushed assembly of M.P.s) 하우가 사임을 발표하며 행동을 촉구했다. 이어 대처 내각의 국방장관이던 마이클 헤즐타인이 총대를 메고 리더십에 도전했다(by initiating a leadership challenge). 자신은 불사신이라고 믿었던(believed she was invulnerable) 대처는 지지세력을 규합하지 않았다. 유럽에 관한 노선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총리직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녀는 재정주권을 포기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경고했다. “우리가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금리든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단일통화(one single currency)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게다가 냉전 종식을 기념하는 파리 정상회담 기간 중에 선거일정을 잡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게 치명타였다. “그녀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파리에 가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고 키신저가 회고했다. “그녀의 반대세력이 커진다고(forces were building up against her)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 남짓 뒤 대처는 당 대표직에서 밀려났다(was deposed as party leader). 그녀가 의회에서 한 마지막 연설은 전설로 전해진다(is the stuff of legend). “내 평생 목격한 가장 용감한 연설 중 하나였다”고 대처의 가까운 친구 로밀리 매컬핀이 말했다. “그녀는 으르렁거리는 폭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was going into a baying mob).” 대처는 일생일대의 연설을 했다(gave the greatest performance of her career). 연설을 마칠 무렵 의원들은 환호하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밖에 있던 군중은 “딩동, 마녀는 죽었다(Ding Dong, the Witch Is Dead)”고 노래 불렀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대처의 주된 일거리는 강연이었다. 아주 많은 강연을 하고 아주 많은 돈을 받았다. 스트립은 노스웨스턴대에 딸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그런 행사를 목격했다. “그녀의 강연은 매끄럽고 대단히 통제됐다. 마지막에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 동안 질의응답을 계속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활기와 열성을 더해갔다(gaining in animation and zeal as she went on). 나는 ‘맙소사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she’s absolutely formidable)’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속 정당이 준 상처는 무엇으로도 치료되지 않았다. 회고록 부록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그녀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내뱉었다. “미소띤 얼굴로 나를 배신했다(It was treachery with a smile on its face).” 하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뒤 오랫동안 의문이 남았다”고 오스본이 말했다. “‘그녀에 관한 신임투표에서 의원으로서 어느 쪽에 투표했느냐’는 의문이다.” 과연 누가 검을 휘둘렀느냐는 의문(the question as to who wielded the dagger)은 의원들 사이에 자신들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개입했다는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중 어떤 비극일까?

대처의 연설문 작성자 로널드 밀러의 경우 그녀가 사퇴 후 첫 당대회에서 보수당 열성당원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 답이 명확해졌다. 그뒤 그도 오찬 모임에 참가했다. “커피를 마시는 단계에 이르렀을 무렵 그녀는 ‘철의 여인’의 면모를 되찾았다. 정치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융단폭격을 퍼부었다(cannonballs raking the political spectrum from end to end). 나는 로마인들에게 누가 자신을 추방했다고 보느냐고 묻는 코리올라누스를 떠올렸다. ‘내가 너희들을 추방한다(I banish you).’

조지 오스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나치게 지배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살해당했다. 그러나 기억날지 모르지만 카이사르는 극의 중간쯤 죽는다. 그래도 후반부에선 여전히 카이사르에 관한 기억과 그가 드리운 그림자를 다룬다. 대처의 총리 임기는 1990년에 끝났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 뒤 모든 총리가 그녀를 총리관저(Downing Street)로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초대해 정치적으로 뭔가 얻을 수 있다고 느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녀의 명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보여주는 증명서다(is in itself a statement of how her reputation has grown).”

리어왕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비유라는 시각도 있다. 막강한 지도자였던 리어왕은 교만한 탓에 몰락했다(brought down by hubris). 보수파들이 유럽통합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대처는 무기력하게 분노했다. 그녀의 분노가 낳은 일부 개입은 상당한 악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1992년 뉴스위크 기고문 ‘내 업적을 무너뜨리지 말라(Don’t Undo My Work)’가 대표적이다.

메릴 스트립은 리어왕의 비유에 매료됐다. “나는 영화에 진실성이 있기를 바랐다. 다큐멘터리 측면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이다. 황야에서가 아니라 마지막에 딸 코델리아의 시체를 품에 안은 리어왕처럼(not on the heath, but cradling Cordelia at the end).”

근년 들어 대처의 세계는 친구와 돌보미들로 이뤄진 작은 그룹으로 축소됐다(has shrunk to a tiny circle of friends and caregivers). “그녀를 데리고 외출하기를 즐긴다”고 매컬핀이 말했다. “그녀는 성탄절 때는 발레를 좋아한다. 대개 신데렐라나 호두까기 인형이다. 지난번엔 저녁 시간이 너무 번잡하기 때문에 낮 공연을 다녀왔다. 박스석에 앉았다. 그래야 그녀가 좀더 사적인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막간에 서너 명의 소녀가 찾아와 사인을 요청했다. 아주 착한 아이들이었다. 마거릿이 그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아가야, 나중에 크면 뭐가 되련(what do you want to be, dear, when you’re grown up)?’ 꼬마가 대답했다. ‘아줌마처럼 되고 싶어요. 총리가 될래요.’”



번역 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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