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연장 논란 - 일자리 놓고 父子 세대 갈등 모락모락
정년연장 논란 - 일자리 놓고 父子 세대 갈등 모락모락
정년 퇴직을 앞둔 아버지가 있다. 아들은 올해 대학 졸업반이다. 아들 등록금을 내야하고, 결혼도 시켜야 하는 아버지는 회사에 정년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회사는 정년을 연장하면 당신 아들이 취직할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연금을 받으려면 4~5년을 기다려야 하는 아버지는 아들 눈치를 보고,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취직 못 할까 조바심을 낸다. 일자리 하나를 놓고 벌이는 ‘부자(父子)의 갈등’. 이른바 세대간 일자리 경합 논란이 정년 연장을 막는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아들이 취직을 못 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요즘 정부와 정치권의 행보를 보면 정년 연장은 기정 사실로 보인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잇따라 정년을 늘리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새누리당은 57세 안팎인 정년을 임금피크제와 연계해 60세로 법제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정치권 정년연장 기정 사실화민주통합당은 정년을 60세로 의무화하고, 국민연금 수급연령에 맞춰 단계적으로 정년을 연장하기로 했다. 자유선진당은 퇴직 정년을 65세로 연장한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정부는 지난해 말 국무회의를 통해 2017년에 60세 정년 연장을 권고 조항이 아닌 기업의 의무로 하는 방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베이비붐(1955~1963년생)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정년 연장이 사회적 쟁점이 된지는 오래지만 여전히 난항이다. 예전에는 ‘정년 연장=기업 부담’이라는 차원에서 주로 논의가 됐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년 연장=청년 일자리 감소’라는 프레임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정년 연장을 위해 기업이 양보하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공식 실업률 8.7%, 실질 실업률은 20%에 육박하는 청년층에 일자리를 양보하라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골칫거리인지는 노사정위원회만 봐도 알 수 있다. 2010년 3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노동계·경영계·정부·공익위원 16명으로 구성된 ‘베이비붐 세대 고용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이후 열 다섯 차례 전체 회의를 개최해 베이비붐 세대 고용 연장과 촉진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지난해 3월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합의에 실패하고 해체됐다.
당시 경영계는 “베이비붐 세대 고용연장을 위한 환경조성과 인프라 구축이 더 중요하다”며 반대했다. 정부는 합의문에 ‘60세 이후에도 일할 수 있도록’이라는 문구를 명시하면 부정적 효과가 우려돼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동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60세 미만 정년국가는 한국뿐”이라며 60세 명시를 주장했다. 공익위원들은 “사회보장부담, 인력부족 등을 감안하면 정부나 경영계의 반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 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공익위원은 “당시 세대간 일자리 경합 논란이 튀어나오면서 논의가 진척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알맹이가 빠진 노사정 합의문이 발표됐는데, 제1항이 ‘중고령층과 청년층이 한정된 일자리를 가지고 경쟁한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일자리 총량을 늘리고 세대 간에 상생형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정년 연장이 청년 일자리를 뺏는다는 인식은 재계·학계뿐 아니라 관가에도 널리 퍼져 있다.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정년이 너무 빠르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정년 연장이 청년 일자리 축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정년 연장을 유도해 갈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2014년까지 기업이 청년층을 미리 뽑고 그 이후부터는 퇴직자들의 정년을 연장하는 방법 등을 강구해 장년층을 현장에 두는 인력운용이 필요할 것”이라는 제안을 내놨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위원회’도 생겼다. 노사정위원회는 올 3월 9일 각계 20명이 참여하는 ‘세대 간 상생위원회’를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1년간 운영된다.
고령 일자리와 청년 일자리는 대체재?세대 간 일자리 경쟁은 고용 총량은 고정돼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청년 일자리와 고령자 일자리가 서로 대체재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 정년을 늘리는 것은 아랫돌(청년 일자리) 빼서 웃돌(고령자 일자리) 괴기라는 것이다.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세대 간 일자리 경합 논란은 그동안 ‘별 관계가 없다’는 쪽이 우세했다. 한신대 전병유 경제학과 교수는 “기존의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들을 종합하면, 세대간 일자리 경합과 갈등은 과장된 것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문제를 다룬 해외 논문 상당수는 ‘청년과 고령층 사이에 대체관계는 발견되지 않는다’ ‘정년 연장이 청년층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가진다는 증거는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2010~2011년 나온 한국고용정보원, 현대경제연구원,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난해 말 삼성경제연구소가 낸 ‘인구고령화의 경제적 파장’ 보고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보고서는 2005년 이후 세대 간 일자리 대체가 부분적으로 진행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2005년에서 2010년까지 50대의 고용률이 1%포인트 상승할 때 20대 고용률은 0.5%포인트 하락했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과 금융위기의 정점이었던 2007~2009년에는 50대 고용률이 1%포인트 상승할 때 20대는 0.84%포인트 하락했다. 보고서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기존 인력의 유지가 부분적으로 신규인력 채용 여력의 감소로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제조업과 건설업 등에서 세대 간 일자리 대체가 뚜렷하게 진행됐다는 것이 보고서의 분석이다.
이 보고서는 2018년까지는 기업의 일반 정년 나이인 55세에 도달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규모가 확대되고, 20대 인구의 감소폭도 그리 크지 않아 세대 간 일자리 경합이 부분적으로 지속할 것으로 전망했다. 2017년에 정년 60세 의무화를 추진하는 정부 정책 방향과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세대 간 상생위원회’에 위촉된 한 위원은 “국내에서 20대와 50대 간 일자리 경쟁 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몇 안 되는 논문이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임금시스템 조정이 필수하지만 이 보고서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 금재호 선임연구위원은 본지에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대해 전반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금 연구위원은 “50대 고용률이 증가할 때 20대 고용률은 감소한다는 실증 분석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2005년 이후 20~24세 고용률은 큰 폭으로 낮아졌지만, 25~29세 고용률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05년 20~24세 고용률은 51.6%에서 2011년 43.5%로 낮아졌다. 반면 같은 기간 25~29세 고용률은 68.9%에서 69.7%로 오히려 소폭 늘었다. 금 연구위원은 “20~24세 취업자의 상당수는 아르바이트생 또는 여성으로 이들의 일자리는 50대로 인해 영향을 받기 어려운 일자리”라며 “50대 고용률 증가가 20대 고융률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논리적 근거가 취약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20대는 고기능·고임금·정규직 등 ‘괜찮은 일자리’를 희망하는 한편, 50대 이후는 저기능·저임금·비정규직의 질 낮은 일자리가 많아 양 세대 간 일자리의 질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금 연구위원은 “일자리 질의 차이를 감안하지 않은 분석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금재호 연구위원은 세대 간 일자리 경합 논란과 관련 “정년 연장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2011년 기준으로 50대의 71.6%, 60대의 36.5%는 취업해 있다”며 “정년 연장은 50~60대 인구의 고용률을 높이자는 것이 아니라 중년층의 고용 안정을 강화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53세 정도에 ‘주된 직장’을 떠나 더 질 낮은 일자리에 재취업하는 실정을 고려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정년을 늘리자는 것은 아니다. 정년을 갑자기 대폭 늘릴 경우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늘고 기업은 장기적으로 신규 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는 청년 취업에 영향을 준다. 이에 대해 금 연구위원은 “(기업의) 임금시스템 조정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임금구조를 바꿔) 정년 연장이 이뤄진 이후에도 임금조정이 충분히 이뤄진다면 이는 청년의 신규 채용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임금조정이 얼마만큼 이뤄지는가에 따라 정년연장이 청년고용을 촉진할 수도, 축소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홈플러스가 좋은 모델이 될 것 같다. 이 회사는 올해부터 정년을 55세에서 60세로 연장했다. 일각에서는 홈플러스 같은 초고속 성장 기업은 인력을 계속 충원해야 하고, 근로자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아 정년 연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홈플러스를 모델로 다른 기업을 압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홈플러스의 2011년 말 기준 직원 수는 2만1053명이다. 이 중 정규직은 6152명(남성 4857명, 여성 1295명)이다. 나머지는 주 40시간 이하 근무하는 시급제 파트 타이머나 아르바이트 직원이다. 근속연수는 남성이 4년, 여성은 2.7년이다. 1인당 평균 급여는 남성 2500만원, 여성 1200만원이다. 미등기 임원(상무~부사장) 31명의 평균 나이는 52.1세다.
언뜻 정년 연장에 대한 부담이 적은 것으로 비친다. 하지만 이 회사의 50세 이상 직원은 2000여 명이다. 이 회사가 정부 방침대로 2017년에 정년을 연장했다면 이 사이 이 직원들은 대부분 은퇴를 해야 한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정년 연장이 청년 신입사원 채용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회사는 지난해 국내 대형마트 중 최대 규모인 150명의 대졸 신입사원을 채용했다. 올해도 지난해 수준을 공개채용 할 것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정년 연장하는 기업은 늘어직원 근속연수가 19.9년이 현대중공업도 올해 정년 퇴직한 직원을 상대로 계약을 1년 연장하는 제도를 실시한다. 현대중공업에 따르면 지난해 정년퇴직자(만 58세) 780명 중 연장 근로를 희망한 621명과 계약 연장에 합의했다. 현재 신입사원 공채를 진행 중인 이 회사의 올해 채용 규모는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포스코는 지난해부터 정년을 56세에서 58세로 늘렸다. 57세에는 56세 연봉 기준으로 90%, 58세에는 80%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GS칼텍스는 올해부터 정년을 60세로 2년 연장했다.
임금피크제도 점차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제도 도입 초기에는 월급이 줄어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득의 관성 효과’로 민간기업의 활용률이 매우 저조했다.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지난해 중순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60%가 임금피크제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최대 20%까지 임금 삭감을 수용하겠다는 응답은 80%에 달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100인 이상 사업체의 임금피크제 도입률은 12.3%로 최근 5년 사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최근 낸 보고서에서 “정년이 현재보다 4년 늘어나면 2011~205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0.051%포인트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청년·여성 일자리를 늘리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경제성장률을 더 높이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50~60대의 전문성과 노하우가 기업이나 사회의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높이고, 후배 세대 인력의 질을 높여주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pin21@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종로학원 “서울대 의예 294점·경영 285점…눈치작전 불가피”
2의대생 단체 "내년에도 대정부 투쟁"…3월 복학 여부 불투명
3‘5만 전자’ 탈출할까…삼성전자, 10조원 자사주 매입
4하나은행도 비대면 대출 ‘셧다운’…“연말 가계대출 관리”
5 삼성전자,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 “주주가치 제고”
6미래에셋증권, ‘아직도 시리즈’ 숏츠 출시…“연금 투자 고정관념 타파”
7대출규제 영향에…10월 전국 집값 상승폭 축소
8“하루 한 팩으로 끝”...농심, 여성 맞춤형 멀티비타민 출시
9미래에셋, ‘TIGER 글로벌BBIG액티브 ETF’→’TIGER 글로벌이노베이션액티브 ETF’ 명칭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