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서 배우는 성공 키워드 - 무작정 친환경 안돼~
실패에서 배우는 성공 키워드 - 무작정 친환경 안돼~
성공 스토리는 사업 시작 단계에서 노하우를 배우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실패 역시 경제활동의 일부분이다. 때에 따라서는 실패의 원인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사업에 더 큰 도움이 된다. 농업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사과농사를 지어도 잘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뉜다. 실패의 확률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 실제 현장에서 농민들이 겪는 다양한 실패 사례를 정리했다.
▶ 대책없는 유기농은 필패지금은 친환경 농법이 대중화됐지만 10년 전 만해도 부푼 기대감만으로 유기농법에 뛰어드는 사람이 꽤 있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에서 토마토 농사를 짓던 공모 씨는 1998년 토마토 시들음병이 찾아 오자 친환경 재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년 동안 다른 지방을 찾아 다니며 친환경 토양관리와 병충해 방제기술을 배웠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재배규모를 800평에서 3000평으로 넓혔다. 하지만 방제비용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들었다. 생산비는 급격히 올라가는데 상품마저 제값을 받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공판장에 출하한 그의 토마토는 때로 일반 농산물보다 더 낮은 가격을 받기도 했다. 친환경 농산물은 특성상 안정적인 판로 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기술적 자신감만으로 유기농법을 고집한 것이 원인이었다. 농법을 터득하는 데는 정성을 많이 쏟았지만 정작 마케팅에는 소홀했다.
서울에서 서점을 운영하다 경북 예천으로 귀향한 배모 씨는 2000년경 친환경농법으로 사과와 배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유기농 작물의 희소성이 있던 때라 안정적인 공급만 가능하다면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하지만 기본 지식과 준비가 없던 그는 그 후 4년 동안 손해만 입었다. 친환경 과수 재배를 하려면 유기농에 적합한 토양을 먼저 만들어야 하지만 배씨는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유기농이 어려운 작물로 손꼽히는 사과를 선택한 것도 실수였다. 심지어 그는 유기농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정부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결국 그가 생산한 배와 사과는 도매시장에서 가장 낮은 가격을 받았다.
▶ ‘친구 따라 강남’ NO!오가피 열풍이 불던 2006년 고향인 경기도 이천으로 돌아온 박모 씨는 건강식품으로 큰 인기를 모은 오가피 재배에 도전했다. 인근 사업장에서 11년생 묘목 4000주를 2억원에 구입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박 사업이라며 묘목을 판매한 오모 씨는 이미 오가피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묘목 역시 처분할 방법만 모색하는 상황이었다. 오씨로서는 박씨가 골치거리를 해결해 준 셈이다. 실제로 박씨가 오가피 가지를 수확해 판매했더니 시장가는 형편 없었다. 공급 과잉이었다.
가공하지 않고 판매하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박씨는 가공시설을 지어 제품을 생산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공시설의 설립조건이 까다로워 심리적, 경제적으로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가피의 높은 인기만 믿고 사전에 사업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결과였다.
경기도 포천에서 오이, 호박 등을 재배하던 장모 씨는 2000년대 초반 인삼이 돈이 된다는 지인의 이야기에 갑자기 작목을 바꿨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장씨에게도 인삼 재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삼 재배는 토양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장씨는 원래 2년 정도 소요되는 예정지 관리를 급한 마음에 1년만 하고 재배를 시작했다. 인삼의 생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도 부족했다.
당연히 병충해가 생기고 인삼이 말라 비틀어지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깨달은 장씨는 이후 최고농업경영자 등 각종 교육과정에 빠지지 않고 나가 인삼의 생리적 특성과 재배 방법을 기초부터 배웠다. 덕분에 2009년 유기농 인증을 획득했고 일반 인삼에 비해 수매가가 3~4배 높은 인삼을 출하하고 있다.
▶ 홍보 없는 홈페이지, 있으나 마나!충남 서산에 사는 김모 씨는 2001년 도시 소비자들이 앞으로 웰빙 먹을거리를 선호하게 될 것으로 판단하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길러먹을 수 있는 채소밭을 상품화해 특허를 출원했다. 개별적으로 홈페이지를 구축해 도시민과 직접 거래하면 비전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업은 김씨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년 전 기습폭설로 비닐하우스를 잃었던 김씨는 또 다시 1억원이 넘는 손실을 입고 실의에 빠졌다. 실패의 원인은 불성실한 홈페이지 관리였다. 김씨는 홈페이지만 개설하면 알아서 고객이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포털사이트에 등록조차 하지 않은 홈페이지를 굳이 찾아 줄 고객은 없었다. 2년 동안 홈페이지 방문자 수는 하루 평균 1~2명에 그쳤다. 문제점을 파악한 김씨는 소비자가 홈페이지에서 바로 쇼핑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고, 포털사이트와 카페, 블로그 등을 활용해 다각적인 홍보에 나섰다. 홈페이지 자체적으로 이벤트도 추진했다. 덕분에 2004년 380만원이던 전자상거래 매출액은 2007년 3720만원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반대의 사례도 있다. 경남 합천의 윤모 씨는 2006년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업인 컴퓨터 활용교육을 수료했다. 교육 후 자신감을 얻은 윤씨는 홈페이지를 개설해 자신이 생산하는 벌꿀과 로열젤리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윤씨는 모 박사가 벌꿀의 효능에 대해 발표한 자료를 인용해 홈페이지에 게재했는데 이 내용이 과대광고로 적발돼 벌금을 물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몇 달에 걸쳐 작성한 홍보자료를 삭제해야 했고 용기를 잃은 윤씨는 2009년 결국 홈페이지를 닫았다.
▶ 사업다각화는 신중 또 신중경북 예천에서 풋고추 농사를 짓던 남모 씨는 1988년 축산 붐이 일자 농업경영인 자금을 지원받아 한우 15두를 구입해 사육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육 기술이 부족한데다 가격변화에 대처하지 못해 손해만 입었다. 1989년에는 미꾸라지 사육을 시작했지만 이 역시 중국산에 밀려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2000년에는 읍내에 쌀가게를 열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기본 자금이 부족한 가운데 빌린 돈으로 신규사업에 계속 투자하다 보니 사정은 계속 나빠졌다.
1988년 정모 씨는 대구 달성군에서 생소했던 시설원예에 도전했다. 비닐하우스에 머스크 멜론과 딸기를 심어 재미를 본 정씨는 1991년 방울토마토와 완숙토마토 재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임차농지에 계속 시설투자를 하는데 부담을 느낀 정씨는 1997년 대출을 받아 농지를 구매했으나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연간 수천 만원에 달하는 이자에 토마토 가격마저 폭락하면서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한우 사육과 인삼 재배를 병행하던 이모 씨는 소득이 일정치 않자 인근 여주지역에 한우 전문점을 개업했다. 자신이 사육하는 1등급 한우를 최저가로 팔겠다며 야심 차게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손님이 많았다. 하지만 1997년 광우병 파동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손님이 급격히 줄었지만 곧 나아지리라 판단한 이씨는 종업원도 그대로 유지한 채 버텼다. 그러나 결국은 누적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논과 밭까지 다 처분해야 했다.
▶ 모르면 당한다서울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여모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2007년 충남 부여로 이주해 산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친환경 산딸기를 생산해 지인들을 중심으로 판매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마케팅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여씨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농사기술이었다. 산딸기 농사는 잡초, 병충해와의 전쟁이었다. 흰가루병, 진딧물 등 알 수 없는 병충해가 번졌지만 대처가 늦었다. 토양관리도 미흡해 산딸기 수확량은 인근 농가의 40%에 그쳤다. 총 생산량은 약 1500만원. 그가 빌린 토지의 임대료인 2000만원보다 적었다. 결국 그는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산딸기 농사를 접어야 했다.
경북 영천에 사는 서모 씨는 재배기간이 짧은 살구 재배에 도전했다. 20년 넘게 도시 생활을 하다 귀향한 그에게 농사 기술은 없었다. 토양관리나 나무의 생리에 관해 기초적인 지식을 가진 정도였다. 전문가들도 하우스에서 살구를 재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며 말렸다.
당연히 사업은 실패했다. 나무를 옮겨 심은 뒤 3년 정도면 소득이 생겨야 하지만 6년이 되도록 살구는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이후 실패요인을 지속적으로 보완해 지금은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고 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끔찍하다. 도시에서 사업을 하며 모아둔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버티지 못하고 포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원석 이코노미스트 기자 ubiquitous8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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