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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대규모 M&A로 역전 드라마 노려

잇단 대규모 M&A로 역전 드라마 노려



10조원이 넘는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2001년 10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하이닉스반도체는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채권단 주도의 매각으로 경쟁사인 미국 마이크론과 독일 키몬다에 핵심 라인을 공개하고 실사를 허용해야 했다. 2001년 말에는 마이크론이 새 주인으로 확정됐다. 이듬해 4월 열린 이사회가 극적으로 매각 건을 부결시키는 바람에 한국 기업으로서의 운명을 가까스로 이어갔다.

‘하이닉스’라는 이름은 이처럼 오랜 기간 부실 기업의 대명사였다. 4년간의 워크아웃과 10년 매각 작업 무산이 남긴 멍에였다.2월 SK그룹에 인수돼 ‘행복날개’를 단 SK하이닉스가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6월 미국 IBM과 차세대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고, 이탈리아 반도체 회사인 아이디어플래시를 사들였다. 6월 20일엔 2억4700만 달러(약 2840억 원)를 투입해 미국의 반도체 설계회사인 LAMD(Link A Media Devices)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 반도체업계는 2001년 마이크론에 넘어갈 뻔했던 SK하이닉스가 쓰고 있는 ‘대역전 드라마’를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다.◇출범 때부터 삐걱= 1997년 12월 외환위기 이후 국내 반도체 산업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하이닉스는 이같은 상황에서 1999년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병돼 만들어진 회사다. 합병 직후 두 회사의 점유율이 더해져 한 때 메모리 반도체 부문 세계 1위로 올라섰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합병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나고 메모리 반도체의 값이 폭락하자 하이닉스는 생사의 기로에 섰다. 2000년 5달러였던 메모리(128M) 값이 2002년 1달러까지 떨어지면서 2000∼2003년 3년간 누적 적자가 11조7450억원이나 됐다.

1999년 6월 5만3100원이었던 하이닉스의 주가는 2003년 3월 125원까지 폭락했다. 21분의 1로 감자까지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실제 주가는 5.95원에 불과했다. 단타 투자가 몰리며 한 때 하루 거래량이 증권거래소 거래량의 70%에 달하며 ‘강원랜드 파라다이스와 함께 도박업종으로 분류해야 한다’란 비아냥까지 받았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워크아웃에 들어간 하이닉스가 채권단의 부당한 지원을 받고 있다며 상계관세를 때려댔다.

정부와 채권단은 2001년 말 하이닉스의 매각을 결정지었다. 매각대금은 34억 달러,여기에 마이크론은 15억 달러의 채권단 지원을 요구했다. 34억 달러도 현금이 아닌 마이크론 주식으로 주는 조건이었다. 당시 채권단을 이끌던 이강원 외환은행장이 “(하이닉스의) 가격을 따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할 정도로 ‘시한부환자(하이닉스)의 빠른 처리’가 목표였다. 2002년 4월 하이닉스 이사회가 막판에 매각 협상안을 뒤집지 않았으면 자칫 하이닉스는 마이크론코리아가 될 뻔했다.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매각 협상안을 부결시킨 뒤 박종섭 당시 사장은 물러난다.◇하이닉스의 위기는 ‘오너 리스크’= 하이닉스는 2003년 메모리 D램 값이 회복되자 예상보다 1년 8개월 빠른 2005년 7월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대가였다.

채권단은 비주력 사업 부문이었던 현대큐리텔과 현대LCD(액정표시장치), 현대시스콤,하이디스, 현대네트웍스, 매그나칩, 현대 이미지퀘스트 등을 모두 떼어 내어 팔았다. 그렇게 갚은 빚이 2조4000억 원이었다. 직원수도 2000년 말 2만4000명에서 2003년 1만 명으로 절반 이상을 줄였다. 이후 하이닉스는 한 해 1조 원가량의 안정적인 수익을 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다시 위기를 맞았다. 7분기 연속 영업적자가 이어졌고 한 분기에 1조원이 넘는 영업적자가 발생했다. 2009년 초에는 전기요금을 못 낼 정도였다. 한국전력에 요금 납부를 연기해 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운영자금이 떨어져 채권단에 손을 벌리기도 했다. 사장을 비롯한 임원은 20~40%, 부장 차장은 5~10%의 임금을 삭감했다.

이 같은 위기가 다시 초래된 건 주인이 없는 ‘오너 리스크’ 탓이 컸다는 평가다. 반도체산업의 특성상 매년 수조원에 달하는 투자가 지속적으로 필요하지만 채권단 관리하에선 벽이 높았다. 지난해 4월 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 반도체에 대한 추가 투자를 결정했다. 급팽창하는 시장을 잡기 위한 선제적 결정이었다. 시일을 다투는 문제였지만, 수조원에 달하는 투자액을 놓고 채권단은 차일피일 승인을 미뤘다. 그러다 지난해 하반메모리 D램 값이 급락하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3분기부터 적자가 발생하자 투자를 유보시킨 탓이다. SK하이닉스는 올 들어 낸드 시장에서 소외돼 분루를 삼키고 있다. 2008~2009년 낸드 시장 점유율 3위였던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마이크론에 밀려 4위로 처졌다. 채권단 관리체제에서 사장이바뀔 때마다 낙하산 논란이 불거지며 조직이 흔들렸다. 외환은행 출신의 우의제 사장과 산자부 차관을 지낸 김종갑 사장 등 외부인사가 선임될 때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채권단이 2009년 다시 매각 작업을 시작했지만 단독 인수의향서를 냈던 효성이 스스로 포기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하이닉스 사장을 역임했던 김종갑 한국지멘스회장은 “하이닉스는 주인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었다”고 말했다.



◇SK그룹을 만나다= 지난해 11월 마침내 하이닉스는 주인을 찾았다. 2009년 9월 매각작업이 시작된 뒤 효성의 인수 포기, STX 입찰참여 포기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 SK그룹에 인수된 것이다. 채권단 공동관리 체제에 들어간 지 10년 만이었다. 주인을 찾은 하이닉스는 다른 회사처럼 보인다. 올 3월 새 출발한 SK하이닉스는 6월 초 IBM과 차세대 메모리 P램 공동개발 및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12일엔 이탈리아 낸드플래시 개발업체 아이디어플래시(Ideaflash S.r.l.)를 인수해 유럽 기술센터로 전환시켰다.

또 20일 미국 LAMD사를 2억4700만 달러에 인수했다.아이디어플래시는 과거 ST마이크로에서 근무했던 연구인력 50여명이 주축이 된 업체로 다양한 플래시 메모리 기술을 갖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미국과 일본, 대만에 이어 유럽에도 R&D 거점을 확보하게 됐다. 미국 LAMD사는 미국 산타클라라에 있는 반도체 연구개발(R&D) 회사로,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 낸드플래시를 활용한 저장장치 등을 만들 때 필수적인 컨트롤러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컨트롤러는 중앙처리장치(CPU)와 저장장치를 연계·제어하는 두뇌 역할을 하는 시스템반도체로 낸드플래시의 속도와 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SK하이닉스 고위관계자는 “컨트롤러 설계사 인수는 낸드플래시 반도체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수년 전부터 검토해온 사안이지만 채권단 관리하에서 수천억 원이란 돈을 쓰는 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또 올해 작년보다 20% 늘어난 4조2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이중 55%를 낸드에 투입하고 있다. 연간 13만장(300㎜ 웨이퍼 기준) 수준인 낸드 생산량이 내년 초부터 연 17만장으로 늘어난다.SK텔레콤이 인수와 함께 2조3000억 원을 증자, 투자여력이 생긴 덕분이다. 세계 3위D램업체인 일본 엘피다 인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를 넘어 종합반도체 회사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스마트 기기 확산에 발맞춰 40% 수준인 모바일 D램과 낸드 등 ‘모바일 솔루션’ 비중을 2016년 7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시스템반도체 투자도 검토하고 있다. 그동안 꿈도 못 꿨던 수십조 원이 투입될 대형 프로젝트다. 3월 사내에 세운 ‘미래전략실’이 이같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신사업, 중·장기 비전 등을 연구하는 곳이다. 2001년 채권단 공동관리 이후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던 직원들은 지난 11년 동안 ‘미래’를 꿈꾼다는 게 사치였다.그런 그들이 이제 중장기 신사업을 기획하고 있다.

◇달라진 모습 뒤엔 ‘오너십의 힘’= SK하이닉스의 변신은 ‘오너십의 힘’에 기반을 둔다. 최태원 SK 회장의 전폭적 지원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얘기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가 그룹내 신성장동력으로 빨리 자리잡을 수 있게 M&A를 포함한 과감한 투자를 주문해왔다.

LAMD사 인수를 결정짓던 6월 13일 SK하이닉스 이사회에도 최 회장이 직접 참석해 찬성표를 던지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인수를 주도했다는 게 회사 측 전언이다. 최 회장은 3월 26일 SK하이닉스 직원들과의 ‘해피토크‘에서 “SK하이닉스를 인수한 뒤로는 꿈도 반도체 꿈을 꿉니다”라고 밝혔다. 최 회장은 30년 전 야심차게 선경반도체를 세웠지만 오일쇼크로 접었던 선친(고 최종현 SK회장)의 오랜 ‘꿈’을 이뤄냈다는 얘기도 풀어냈다.

최 회장의 반도체를 향한 집념은 하이닉스 인수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입증됐다. 지난 해 11월 하이닉스 본입찰을 사흘 앞두고 검찰의 압수 수색과 같은 악재가 터졌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였다.

자임해 대표이사를 맡은 최 회장은 3월 SK하이닉스 출범식에서 “앞으로 SK는 책임감을 갖고 반도체사업에 투자하면서 더 크게 하이닉스를 키울 것”이라며 “이를 위해 나부터 어떤 역할이든 마다하지 않고 직접 뛰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이상으로 도약하는 SK하이닉스를 꿈꿀 것”이라며 “세계 1류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나 국가 경제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행복을 나누는 회사를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출범식을 치르고는 경기 이천공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임직원들과 호흡을 함께 했다. SK 관계자는 “최 회장이 지난 2년 동안 반도체산업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단순히 하이닉스 인수로 끝나지 않는 더 큰 그림을 그려왔다”고 전했다.

◇화려한 부활, 과연 성공할까= 하이닉스가 SK품에 안긴 뒤 사업 환경은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인수가 마무리된 2월 치킨게임을 벌이던 엘피다가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지난 해 12월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던 D램 값은 2~5월 넉 달 동안 32.9% 올랐다.

엘피다 파산으로 공급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이 엘파다를 인수해도 섣불리 공급량을 늘리진 않을 전망이다(마이크론은 7월 2일 엘피다를 2000억 엔에 인수키로 했다고 밝혔다). 부채가 늘어난 마이크론이 또 다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상대로 치킨게임에 나서기 어려워서다.

대주주인 SK텔레콤과의 시너지 효과도 점차 나타날 것으로 관측된다. 최 회장은 3월 SK하이닉스 출범식에서 “하이닉스에는 애플 델 HP 등이 고객사지만 SK텔레콤은 그들의 바이어인 만큼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2월 스페인에서 열렸던 월드모바일콩그레스(WMC)에서 하이닉스는 스마트폰 통신칩을 만드는 미국 퀄컴과 협력관계를 논의했다. SK텔레콤이 이를 주선했다.

매년 수조원이 소요되는 투자자금 마련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SK텔레콤과 SK이노베이션 등 매년 수조원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창출해온 SK그룹 계열사들이 뒤를 받치고 있어서다. 통합 작업은 별 다른 잡음없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SK의 문화가 M&A에 익숙해져 있어서다. SK는 1980년 대한석유 공사(현 SK이노베이션),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각각 인수하면서 이두 분야를 성장축으로 삼아왔다.

SK하이닉스의 부활에 위협 요인이 있다면 ‘오너 리스크’를 지적할 수 있다. 대표이사를 맡은 최 회장은 작년 말 횡령·배임 혐의로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있다. 최 회장이 실형을 받으면 SK하이닉스에 ‘오너 리스크’가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이다.사내이사가 범죄행위로 물러나게 된다면 회사의 브랜드나 이미지에 치명타가 아닐 수없다. 유럽발 세계 경제 침체의 공포도 위협 요인이다.

대규모 장치산업인 반도체 산업에서 수요 감소는 곧바로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불경기는 SK하이닉스뿐이 아닌 모든 반도체 업체가 공통적으로 겪게되는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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