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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아사드’의 적임자?

‘포스트-아사드’의 적임자?

프랑스로 망명한 마나프 틀라스 장군, 시리아의 잔인한 독재를 끝낼 수 있는 평화의 인물로 기대를 모은다



마나프 틀라스(48)는 몇 주 전까지 시리아 정부군의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나이 들어가는 돈 많은 귀공자(jeunesse dorée)로 더 잘 알려졌다.그는 괴짜 전 국방장관의 바람둥이 아들이며,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친구였고, 그리고 프랑스 파리의 영향력 있는 사교계 명사이자 논란 많은 남성 편력(controversial histories of reputed amours)으로 유명한 나헤드 오제의 동생이다.

마나프 틀라스가 매력 넘치는 사나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Manaf himself is, no doubt about it, a handsome devil).수년 전 그의 부친 집에 초청돼 그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차를 마신 우리 몇몇은 지금도 그의 나른한 눈(languorous eyes)과 숱 많은 검은 머리(thick black hair)를 기억한다. 지금은 그 머리가 나이보다 빨리 회색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당시나 그 이후로 어떤 시리아인도 그를 미래의 지도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나라를 전쟁의 구렁에서 끌어내 새로운 민주적인 미래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그일을 떠맡고 싶다고 말한다.

대부분 민간인 망명자로 구성된 시리아 반정부 세력 기구인 시리아국가위원회(SNC)의 한 유력 인사는 “틀라스는 머리가 썩 좋은 편이 아니다(He’s not a big brain)”라고 말했다. 아사드 정권에 반대해 무기를 들고 맞선 고위 군 간부들은 그를 더 가혹하게 평가한다. “그는 바샤르알-아사드의 숨은 그림자(he is the hidden shadow of Bashar al-Assad)”라고 한 인사가 말했다. “어쩌면 그는 동성애자일지 모른다!”고 다른 인사가 거들었다.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단지 그를 모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틀라스는 최근 여러 언론매체의 머리기사에 등장했다. 사우디 위성 TV부터 월스트리트 저널까지 그를 시리아 혁명의 희망,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혁명에서 벗어나도록 이끌 수 있는 희망으로 소개됐다. 사실 그의 이야기는 아사드 정권 타도를 은밀하게 지원하면서도 내전을 억제하려는 이웃나라들과 서방 강대국들의 절박함을 잘 드러낸다(his story reveals a lot about the desperation of the regional and Western powers). 시리아 사태의 해결사로 나섰던 코피 아난 유엔·아랍연맹 평화 특사의 갑작스러운 사임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내전종식을 목적으로 한 외교적 노력의 붕괴를의미한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 때문에 마나프 틀라스의 중요성이 더 커진 듯하다. 이제 그는 이웃나라들과 서방이 승산은 떨어지지만 전부를 걸 수밖에 없는 평화중재자로 인식된다.

“누가 시리아 국가의 중심을 움직이느냐가 중요한 문제(The big question is who’s going to move the center of the country)”라고 LA에 본부를 둔 비영리단체 민주주의위원회의 제임스 프린스가 말했다. 더구나 누가 시리아의 소수 집단에게 앞으로 박해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켜줄 수 있을까(who can reassure the minorities that they won’t be persecuted)? 아사드 독재통치의 핵심 지지자였던 알라위트파 만이 아니라 그 정권 아래서 번영을 구가했던 기독교 및 수니파 기업가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란은 아사드가 몰락할 때까지 그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른 잠재적 대표자가 이익을 보장해준다면 아사드 지원을 중단하지 않을까? 틀라스는 모호하면서도 시사점이 많은 표현으로 자신을 잠재적인 교섭자로 내세웠다. 그는 7월말 사우디가 소유한 신문 아샤르크 알 아우사트에 이렇게 말했다. “시리아는 여러 소수집단과 민족을 포용하는 나라다. 이번 위기로 받은 상처를 치료할 안전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국가 정체성을 수용하는 나라다.”

프린스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I think you need to take him seriously)”고 말했다. “그에게 내부의 지지자들이 있느냐고? 있다. 그렇다면 반정부세력이 틀라스가 이끄는 정부를 수용할까?그건 매우 어려운 문제다.”마나프 틀라스와 그의 가족, 그리고 최근까지 그의 가문이 번창했던 마피아식 음모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동기와 연관성의 아주 복잡한 혼합이 윤곽을 드러낸다.

마나프 틀라스는 성장할 때 친구가 몇 명없었지만 서로 각별한 사이였다. 그들의 부친들은 당시 국방장관이던 하페즈 알-아사드와 공모해 바트당의 이름으로 무혈 쿠데타에 성공했다. 아사드는 시리아의 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수니파에 의해 자주 이단으로 박해 받았던(persecuted as heretical) 알라위트파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아사드는 신중하게도 핵심 측근 중에 수니파도 발탁했다. 마나프의 아버지로 아사드 아래서 수십 년 동안 국방장관을 맡은 무스타파 틀라스, 부통령이 된 압델 할림하담 같은 인물이 친정권 수니파의 대표격이었다.

무스타파 틀라스는 국방장관으로 시리아의 무기 구입을 관장하면서 돈방석에 올라앉았고, 무기를 공급한 러시아인들과 아주 가까워졌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권력엘리트들은 틀라스 가족을 존경하지 않았다. 무스타파 틀라스는 젊은 시절 바람둥이(skirt chaser)로 유명했고 나이가 들면서는 어릿광대(buffoon)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주목 받고 싶은 여성들에게 정교한 의장검을 선물로 주곤 했다(One of his favorite gifts to women he wanted to impress was an elaborately wrought ceremonial sword). 이탈리아 출신 배우로 섹스 심벌이었던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워싱턴포스트지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도 그 칼을 받았다(그레이엄은 너무도 당황스러워 그 선물을 호텔방에 그냥 두고 황급히 다마스쿠스를 떠났다).하페즈 알-아사드가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마나프 틀라스는 여섯 살이었다. 영광스러운 과거를 가진 다마스쿠스는 당시 아주 편협하고 고리타분한(parochial) 도시로 전락했다.

“다마스쿠스에는 수영장이 하나 뿐이었다”고 마나프의 어린 시절 친구가 돌이켰다. “그 수영장은 시당국이 소유했다. 우리는 그곳에 가서 수영하며 놀았다.”하페즈 알-아사드는 1970년대와 80년대 테러와 협박으로 독재 통치를 강화했다.그는 1973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했다. 1982년에는 그의 공군이 레바논 상공에서 이스라엘 전투기에 맞섰다가 거의 와해됐다. 그런데도 그는 권좌를 유지했고, 무스타파 틀라스도 국방장관직을 계속 지켰다.

1981년 수니파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저항세력이 아사드 정권에 대항했다. 무슬림형제단의 다마스쿠스 국방부 건물 폭파로 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100명 이상은 고위 군간부들이었다. 당시 마나프는 10대였고, 그의 아버지와 친한 인사들 여럿이 그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다음해 무슬림형제단이 하마에서 항거하자 아사드 군대는 그 도시 전체를 파괴했다.최소한 1만 명이 숨졌다. 그때부터 요즘 저항세력과 싸우는 시리아 정부의 전술이 생겨났다. 아사드를 둘러싼 엘리트들은 그 잔인한 학살에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아사드는 흉포함과 인내심을 교묘하게 섞어 계속 철권통치를 강화했다.

그는 이란, 헤즈불라와 손잡고 레바논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레바논 내전 종식의 공로를 인정 받았다.아사드의 세 아들 중 장남인 바셀은 1980년대 말 대통령직 후계자(heir apparent)로 부상했다. 바셀은 잘 생기고 똑똑했으며, 무자비하고 무모했다(handsome and smart,ruthless and reckless). 비행기 조종사 선글라스와 멋진 군복 차림을 한 그의 포스터가 시리아 전역과 레바논의 시리아 점령지에 나붙었다. 영화 스타처럼 그는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녔다.

역시 파티광인 마나프 틀라스도 그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마나프는 바셀의 비서인 셈이었다”고 그의 어린 시절 친구가 말했다. “그는 늘 바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He was always like his shadow).”그러나 1994년 1월 아사드 가문의 전성기에 바셀은 밤중에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공항으로 질주하다가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러자 당시 런던에서 안과의사가 되려고 공부하던 동생바샤르 알-아사드가 귀국을 지시 받고 독재 통치의 후계자 임무를 떠맡았다(took up duties as crown prince of the dictatorship).바샤르는 볼품 없고, 군인답지도 섹시하지도 않았다. 바셀 같은 카리스마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바셀의 측근 몇몇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마나프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바셀과 바샤르는 마나프 틀라스를 대하기 편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마나프는 속으로 그들을 혐오했다고 그의 한 친구가 말했다. “그들에겐 진정한 친구가 없었다. 부려먹으려고 몇몇을 데리고 다녔을 뿐이다(They have people around to serve them). 마나프는 그들이 자신을 친구가 아니라 하인으로 취급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속으로 혐오했다(this created hatred inside Manaf, because he felt they didn’t take him for a friend, they took him for a servant).

”마나프의 형 피라스는 중동 전역에서 능숙한 처세술로 아사드 정권과 사업을 했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한편 그의 누나나헤드는 파리의 사교계에서 독자적인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마나프는 계속 다마스 쿠스에 머물며 신나게 놀았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는 마나프를 두고 “으스대기를 좋아했다(He liked to show off)”고 말했다. 그는 고급 쿠바산 시가를 무척 좋아했다.

200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사망하고 바샤르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그 당시 마나프는 어린 시절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며 자신의 답답하고 불행한 마음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신임 대통령을 두고 공개적인 험담을 하다가는 큰코다친다고 그 친구에게 경고했다. 옛 수행원들 사이에서 혐오가 공포로 바뀌고 있었다(loathing was turning to fear).

아사드 가족의 음모는 갈수록 위험 수위로 치달았다. 바샤르는 권력 장악을 공고히 다지려고 성마른(hot-tempered) 동생 마헤르와 권모술수에 능한(Machiavellian) 매제아세프 샤우카트 등 자신보다도 더 무자비한 가족과 친척에 기댔다. 압력이 커지면서 정권 내부에서 불화가 불거졌다. 1999년 마헤르는 말다툼 도중 샤우카트를 총으로 쏴 복부에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2005년 라피크 하리리 레바논 전 총리가 베이루트에서 차량폭탄으로 사망하자 레바논 사람들과 국제사회 대부분은 아사드 일가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정권이갈수록 가족 사업이 됐다(The regime became increasingly a family business)”고 바스마 코드마니가 말했다. 그는 아랍개혁이니셔티브의 사무총장이며 최근까지 SNC 대변인을 지냈다. “군부보다 알라위트파에, 정규군보다 샤히바(알라위트파 민병대)에 더 의존한다”고 코드마니가 설명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충격파가 시리아를 덮쳤을 때는 아사드 진영이 이미 위태롭고 피해망상적이고 의심에 가득 찬 상황이었다. 측근들의 충성심이 늘 시험당했다(Loyalty was constantly beingtested). 마나프 틀라스의 충성심도 의심 받았다. 지난 6월 말 마나프는 다마스쿠스 외곽 도시 두마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대화로 시위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그가 면직당했고 그의 보좌관이 그 자리로 승진했다”고 몇 주 전 반정부 세력으로 합류한 안와르 사데디네 장군이 말했다. “그의 후임은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200명이 사망했고 여성 20~25명이 가족앞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던 현지 병원 다섯 곳이 완파됐다.”아사드에 가장 먼저 대항한 도시 중 하나는 알-라스탄이었다. 틀라스 가족의 고향이다.

수년 동안 그곳의 젊은이들이 시리아군에 대거 입대했다. 지난해 여름 그들 군인 중 수백 명이 반정부 혁명에 가담했다.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마나프 틀라스는 라스탄 공격의 선봉에 서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는 거부했다. 결국 라스탄은 지금까지 잘 훈련된 군사 저항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아사드의 전략은 자신의 범죄에 모두를 연루시키는 것”이라고 코드마니가 말했다.그러나 틀라스 자신과 여러 다른 사람들에따르면 그는 가담하지 않았다. “내 손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My hands are not stained with blood)”고 틀라스가 사우디의 한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사실상 시리아 위기 초기에 반정부 세력 쪽으로 돌아섰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등당하고 축출됐다(He was demoted, he was frozen out)”고 사데디네가 말했다. 틀라스는 국외탈출 궁리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누나 나헤드가 오랫동안 망명의 기초작업을 해둔 상태였다. 나헤드는 1978년 18세의 나이에 중동에서 가장 부자인 무기거래상 중 한 명과 결혼했다. 시리아 태생의 사우디인으로 당시 60세이던 아크람 오제였다. 13년 뒤 그가 사망하면서 나헤드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파리의 사유궁전 중 하나에서 살게 됐다.

“나헤드는 재산을 사용해 파리 사교계의 대표적인 살롱을 만들었다”고 그녀를 수년 동안 알아온 코드마니가 말했다. “그녀는 그 살롱을 열광시키는 매력적인 여인으로 부상했다.” 고루한 르몽드지도 ‘마담 O’의 호화저택에서 열린 환상적인 만찬을 기사로 썼다. 1990년대에 그녀의 논문을 지도한 어느 저명한 학자는 그녀가 교수실에 찾아와 밍크 코트를 벗고는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의 섀런 스톤처럼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crossing and uncrossing her legs) 했다고 돌이켰다. 영향력이 막강한 외국 장관, 주요 기업가 한 명,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언론인 한명 등이 수 년 동안 그녀의 이름과 연관됐다.

그래서 마나프가 시리아를 탈출할 때가 되자 누나의 연줄이 구세주 역할을 했다. “그녀가 마나프의 탈출을 하나부터 끝까지 챙겼다”고 코드마니가 말했다.어쩌면 그런 연줄이 마나프에게 다시 유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마나프 틀라스가 시리아나 해외의 지지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는 사우디 소유 위성 뉴스네트워크알-아라비야에 한 건의 성명을 발표했고,사우디 소유의 신문 아샤르크 알 아우사트와 한 차례 인터뷰를 했다.

따라서 사우디아 라비아 정부가 시리아 반정부 세력에서 찾는 X팩터(특별한 도움이 되는 미지의 인자)를 그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각본을 따를까 아니면 사우디의 꼭두각시일까(is he reading from his own script, or theirs)? 그가 진정코 아사드의 대안을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흉내만 낼까(does he offer an alternative to Assad, or only an imitation)?시리아 반정부 시위 초기에 미국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일부 친척과 측근들을 몰아내고 오랫동안 등한시했던 민주화약속을 이행함으로써 국가적인 전환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바샤르는 개혁을 이끌 수있는 모든 기회를 국제사회로부터, 더 중요하게는 시리아 국민으로부터 제공받았다”고 전 주시리아 미국 대사이자 라이스대 베이커 연구소 설립자인 에드워드 제레지안이 말했다. “미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 모두가 그에게 올바른 일을 할 수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바샤르 알-아사드는 너무도 허약한 지도자다.

” 바샤르는 진정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자신을 에워싼 흉포한 보안군을 정화하기보다는 정권의 폭력배에게 설득당해 생존의 유일한 길이 무자비한 억압(the only way to survive was through ruthless repression)이라고 믿었다.“시리아 위기의 초기에 쿠데타가 일어났어야 했다(There should have been a coup at the beginning of the crisis)”고 틀라스가 사우디 신문에 말했다. “나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그 쿠데타를 일으키기를 기대했다(I had hoped that the president Bashar al-Assad himself would have carried it out).

정치적 해결, 시민, 개혁을 추진하는 쿠데타를 말한다(a coup in favor of a political solution, citizens, and reform).” 전투가 확산되면 협상과 화해가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안다. “위기를 오래 끌수록 시리아 회복은 더 오래 걸린다(The longer the crisis lasts, the longer it will take Syria to recover)”고 틀라스가 사우디 신문 인터뷰에서 말했다.

국제사회가 바샤르 알-아사드를 포기했기 때문에 이제 그 대안으로 마나프 틀라스에게 기대를 걸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절망이 될 가능성이 큰 마지막 희망인지 모른다. 그가 아사드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whether he can step out of Assad’s shadow now remains to be s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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