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싸이코 천재
할리우드의 싸이코 천재
그가 컴백한다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애초에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명감독의 전당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자리는 오래 전부터 확고했다. 1930년대부터 불후의 고전들을 줄줄이 탄생시킨 덕분이다. 30년대에는 ‘39계단(The 39 Steps)’ ‘반드리카 초특급(The Lady Vanishes)’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 뒤로도 ‘오명(Notorious, 1946)’ ‘이창(Rear Window, 1954)’ ‘새(The Birds, 1963)’ 등으로 할리우드를 점령했다.
그의 작품들은 세련되고, 교양 있고, 아름답게 구성됐으며 시각적으로 화려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전면에 내세웠다(잉그리드 버그만, 그레이스 켈리, 케리 그란트, 제임스 스튜어트 등). 일평생 평론가들에게 그보다 더 존경 받는 인기 영화제작자는 없었다.
요즘 히치콕이 새삼스럽게 주목 받는다. 사후 32년이 지난 지금 어느 때보다 현실적으로 더 큰 관심을 끌며(has become more relevant than ever) 새롭고 논란 많은 추측의 대상이 됐다. 한편에서 그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폭로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는 듯한 동안에도(even as a campaign seems underway to expose him as a bully and beast) 감독으로서 그의 명성은 어느 때보다 더 높이 치솟는다.
영국영화협회는 히치콕이 20대 때인 무성영화 시절에 만들었던 영화 9편 중 8편의 복원작업을 꾸준히 벌여 왔다. 협회의 사상 최대 프로젝트다. 지난 8월 영화계 평론가와 전문가 846명이 투표로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을 사상 최고의 걸작영화로 선정했다. 50년 동안 장기 집권하던 ‘시민 케인(Citizen Kane)’이 왕좌에서 밀려났다.
영화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Sight and Sound)가 10년에 한번씩 실시하는 권위 있는 설문조사 결과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good news was followed by bad). 영화전문 케이블 채널 HBO의 90분짜리 전기영화(biopic) ‘더 걸(The Girl)’이 10월에 개봉됐다. 영화에서 히치콕(토비 영)은 ‘새’를 촬영할 동안 청순한 외모의 티피 헤드런(시에나 밀러)에게 “성상납(make herself sexually available to him)”을 요구하는 성희롱자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녀의 앞날을 망쳐 놓는다.
일에서의 완벽주의 대(對) 삶에서의 완벽주의. 해묵은 갈등구도다. 하지만 히치콕의 경우 그 이분법을 편의주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the dichotomy resists convenient parsing). 그의 삶 속에의 사실들이 그의 일에서의 큰 테마들과 아주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because the facts of his life are so tightly raveled with the big themes in his work).
편집광으로 비틀려 표출되는 좌절된 욕망(the thwarted desire that darkens into monomania), 억제와 폭력의 팽팽한 이중성, 사디즘에 가까운 완벽한 지배욕구와 짝을 이루는 고상한 비전(the exalted vision twinned with the near-sadistic drive for total control). 특히 배우들을 가리켜 그는 “소떼처럼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적대적인 욕구들이 “관객의 감수성을 극한까지 조종하려는” 히치콕의 한없는 추구의 바탕을 이뤘다. 그의 전기 ‘천재의 어두운 이면(The Dark Side of Genius)’에서 도널드 스포토의 평이다.
“그의 작품에 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중의 하나였다.” 시대적 배경을 잘 묘사한 야심적인 새 영화 ‘히치콕(Hitchcock)’의 메가폰을 잡은 사샤 저바시 감독의 말이다. 오늘날 히치콕 작품의 대명사 격인 걸작 영화 ‘싸이코(Psycho)’의 제작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싸이코’는 사실상 그 이전의 모든 작품들과 크게 달랐다. 그렇다면 남는 의문은 히치콕의 진짜 성격을 둘러싼 미스터리다. 저바시의 말마따나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영화 ‘히치콕’은 그의 이미지를 다층적으로 재구성해 이 의문에 답하려 한다. 쇠퇴기에 접어든 영화사의 제왕들에게 반항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shows him rebelling against the lords of the studios in their waning days). 처녀작인 록앤롤 다큐멘터리 ‘앤빌(Anvil)!’로 상을 받았던 저바시는 1950년대 말의 ‘꿈의 공장’ 파라마운트를 화려하게 재현한다.
조립된 무대 세트, 가공의 시가지, 마호가니 테이블이 놓인 특실에서의 중역 회의, 크고 무거운 편집 장비들, 일단의 인부들과 보조 요원들.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한 히치콕은 괴물도 팔푼이도 아니다(is neither monster nor caricature). 기이하게 따분하고 억압된 세상에서 자신의 반체제적인 비전을 유지하려 애쓰는, 개밥에 도토리 같은 예술가일 뿐이다(a fish-outof-water artist struggling to maintain his subversive vision in this strangely stodgy and repressed world).
홉킨스는 해학적인 지능으로 히치콕의 유명한 만화 같은 이미지를 익살스럽게 한 꺼풀씩 벗겨나간다(with his antic intelligence, slyly peels away the layers of Hitchcock’s familiar cartoon image). 장의사의 검정색 정장으로 감싼 비대한 몸통, 런던 토박이 억양이 약간 섞인 코믹한 영국 상류층 말투 등(the comically plummy accent with its Cockney traces). 그는 마티니를 요란스럽게 한 입에 털어 넣는 게걸스러운 식탐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지가위를 들고 자기 저택의 웃자란 생 울타리를 마치 전기톱 휘두르듯 난폭하게 처낸다. 홉킨스의 가장 유명한 한니발 렉터(‘양들의 침묵’) 연기를 재치 있게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렉터는 ‘싸이코’ 주인공 노먼 베이츠의 수많은 괴물 의붓자식 중 하나다.
무엇보다 히치콕과 부인 알마 레빌(헬렌 미렌)의 관계를 묘사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다. 레빌은 히치콕의 최대 협력자 역할을 한다. 저바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독특한 “알프레드-알마 역학관계”는 영화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is well known to cineastes). 1899년 같은 해 하루 간격으로 태어난 두 사람은 영국의 영화 스튜디오 이슬링턴에서 만난 뒤 서로 죽이 맞아 공동작업에 돌입했다(fell into giddy collaboration).
하지만 알마는 히치콕의 천재성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경시를(the low ceiling for women) 인정해 자신보다 그의 일을 더 중시했다. 알마는 그의 전적인 파트너로서 영화 출연진의 캐스팅을 도왔으며 시나리오를 선정하고 종종 각색까지 했다. 고전 영화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에선 각본 담당으로 스크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received a writing credit).
하지만 그녀의 전공은 “콘티(continuity, 영화의 의상·소품·음악·조명 등이 연속성을 갖도록 연출자의 지시사항을 기록한 대본)”였다. 영화가 생생하게 보여주듯 그녀는 영화의 전체성과 일관성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스토리의 논리로부터 등장인물의 의상·표현·제스처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남편도 그런 점에서는 그녀를 따르지 못했다.
저바시는 평론가 찰스 챔플린의 말을 인용한다. “히치콕의 작품에는 네 개의 손이 작용했는데 그중 둘이 알마의 것”이었다며 저바시는 덧붙인다. “그녀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스타일의 최종 조정자 역할을 했다. 그녀가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쁜 것이었다. 히치콕은 상당부분 그녀의 말을 따랐다(very much deferred to her).”
근래 들어 알마의 반쯤 가려진 업적이 꾸준히 드러났다. 두 사람의 딸 팻 히치콕 오코넬이 그것을 주제로 회고록을 썼다(딸도 ‘싸이코’ 등 여러 편의 히치콕 영화에 출연했다). 스티븐 레벨로의 저서 ‘알프레드 히치콕과 영화 싸이코의 제작(Alfred Hitchcock and the Making of Psycho)’에서도 알마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존 맥러플린은 영화 ‘히치콕’의 각본을 쓸 때 이 책을 주요 정보원으로 삼았다. 미렌은 알마의 섬세한 깊이와 조용한 갈망을 탁월하게 포착한다. 알마는 할리우드의 순종적인 아내이며 능숙한 안주인이자 요리사다. 자신만의 야망을 가슴에 간직하며 ‘싸이코’를 “저예산의 유치한 촌극(low-budget claptrap)”이라고 싫어한다. 영화가 시작된 지 30분 만에 여주인공이 죽임을 당한다(할리우드의 관행에서 벗어난 파격이다). 알마의 즉석 제안에 따른 결정이다.
그녀는 비밀리에 동성애자 생활을 한다는 루머가 떠도는 앤서니 퍼킨스를 베이츠역에 추천하기도 한다. 남편이 몸져누웠을때도(when her husband is bedridden) 자신만만하게 제작을 지휘한다. 그 뒤 편집실에서 최종 컷을 살려내고 명백한 실수들을 찾아낸다. 또한 중요한 샤워 장면 중 버나드 허만의 음악에서 고통스러운 바이올린의 비명소리를 살리도록(the pained violin shrieks in Bernard Herrmann’s score be restored) 한다.
영화 팬들은 저바시가 내용을 제멋대로 바꿨다고 문제 삼을 듯하다(Film buffs will debate the liberties Gervasi has taken). 에드 게인이 저지른 범죄 중 하나를 재현하는 오프닝 장면부터 그렇다. 에드 게인은 ‘싸이코’각본의 소재가 된 연쇄살인범이다. 말하나마나 아무리 소름 끼치는 각본도 종종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는(even the grisliest pulp often originates in actual events)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목적이다.
저바시는 영리하게 1959년 미국의 구체적인 현실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전개한다. 그해 60세가 된 히치콕이 왜 자신이 진부해졌다고 우려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전작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는 대성공이었다. 히치콕을 비롯해 주연 배우 케리 그랜트와 에바 마리세인트는 흥행수입과 평단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그 영화는 사실상 고도의 화려한 영화제작 기술 측면에서 히치콕 최고의 작품이다(is in fact vintage Hitchcock in his slickest high studio mode).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배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오만하게 통속적 테크니컬러(천연색 영화 제작법) 장식으로 칠해진 미국 풍경이 대표적이다(its picture of an America lacquered in complacent Technicolor kitsch). 낭만적인 주인공 커플이 식사하는 식당차는 현실과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럽다.” 번쩍이는 인테리어와 완벽한 맞춤 의상이 그렇다.
그런 비현실성이 히치콕의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The falseness had begun to rankle Hitchcock). 영화사들의 오만한 속물근성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술성보다 예의를 앞세워야 하는 현실도 마찬가지였다(as did his vassalage to the imperious philistinism of the studios, the decorum that overrode the claims of art). 그는 감독으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성공에 마취되고 구속됐다(anesthetized and constrained by success)”고 저바시는 평했다. “그는 구태의연한 영화제작 방식에 얽매인 수구파로 남고 싶지 않았다. 잘 생긴 스타들로만 영화를 만들기 원치 않았다.”
영화사들은 최고의 프로젝트로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상은 마치 정해진 의식처럼 그를 외면했다(was ritually passed over at Oscar time). 무엇보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한번도 받지 못했다. 규범과 검열도 그에게 시련을 줬다. 대중의 기대에 대한 순응도 질식할 듯이 그의 목을 조였다(a suffocating docility to public expectation). 그럼에도 대중이 정말로 원하는 것, 정말로 고통스러운 체험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편 그는 유럽영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배우려 했다. 유럽에선 신세대 감독들이 기존 영화의 틀을 벗어 던지고 파격을 시도했다(a new wave of auteurs had torn off the straitjacket). 그는 디아볼릭(Les Diaboliques, 1955)을 보고 탄성을 올렸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잔인한 살인을 주제로 엮어낸 독창적인 스토리다(시몬느 시뇨레 주연). 마지막의 반전이 관객에게 충격을 던져줬다(with a twisty ending that had jolted audiences).
“본능적이고 사실적인(visceral and real), 새로운 유형의 영화”라고 저바시가 말했다. 히치콕은 영화계의 선두자리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들의 방식을 배운 뒤 그들의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he could take a leaf out of their book and beat them at their own game)”고 판단했다.
그에 따르는 리스크는 컸다. 파라마운트는 ‘싸이코’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빛나는 스릴러의 제왕인 히치콕의 수준에 못 미쳐 관객들에게 외면당한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자기 집을 저당 잡혀 80만 달러의 예산을 조달했다. 자신의 인기 TV 프로그램 ‘알프레드 히치콕 프리젠츠(Alfred Hitchcock Presents)’의 스태프들을 동원해 비용을 절감했다. 그래도 걱정은 남았다. 그가 “제2의 ‘현기증’이 되면 어쩌지?”라고 알마에게 불안감을 드러낸 대목은 영화 최고의 조크 중 하나다.
영화평론가들은 이 사상 최고의 걸작을 이해하지 못했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1958년 10대 우수작에도 들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지지(Gigi)’와 ‘댐 양키스(Damn Yankees)’에게 밀렸다. 아카데미상은 ‘흑과 백(The Defiant Ones)’에게 돌아갔다.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이 인종간 이해를 진지하게 노래한 송가다. 하지만 히치콕은 관객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그들을 쥐고 흔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was primed to shake audiences up instead of flattering them).
이 대목에서 히치콕과 여성의 관계라는 거북한 문제가 떠오른다. 그의 인생과 일에서 갈수록 커지는 여성혐오(misogyny) 문제를 회피하기는 불가능하다. 헤드런의 경험이 극단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히치콕이 세트장에서 그녀를 비롯해 베라마일즈 등 다른 여배우들을 함부로 대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배우들의 캐릭터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쓸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스크린 밖에서 입는 의상까지 정해줬다.
“히치콕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자신이 끔찍한 인간이라는 점”이라고 저바시가 말했다. “자신도 이런 소름 끼치는 범죄를 저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노먼 베이츠처럼 말이다. 그런 유사성은 피하기 어렵다. 히치콕도 마마 보이였다. 27세까지 엄마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케리 그란트와 제임스 스튜어트 같은 미남 주연배우들에 대한 질투로 불타올랐다. 그는 자신이 만든 수단을 통해서만 아름다운 여성들을 소유했지만 그들은 현실 속에서 그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를 악마시하는 진영에서 잘못 짚은 점이 한가지 있다(Where the demonizing accounts go awry). 히치콕이 자기 성격의 더 어두운 측면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추측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자신의 욕구를 억눌렀거나 그것을 자신이 선호하는 냉담한 금발의 스타들에게 투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정반대로 “그가 뭔가 다른 출구를 찾아내 여성을 향한 분노·섹스·죽음·살인에 대한 집착을 승화시킨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저바시가 말했다.
예산을 적게 들이면서도 ‘싸이코’를 깊이 있고 적나라한 영화로 만든 건(led him to the low-budget depths of Psycho and its explicitness) 자기부정이 아닌 그의 자아인식의 힘이었다. 나아가 그 적나라함 때문에 할리우드 검열관들과 까다로운 협상을 벌여야 했다. ‘싸이코’에서 재닛 리가 맡은 캐릭터가 칼에 찔리는 선정적인 장면은(the lascivious stabbing of the character)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이 영화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이 그 역을 맡아 건전한 연기를 보여줬다). 오히려 그 장면에 수세식 변기를 포함시키는 데 대한 지적이 있었다. ‘히치콕’ 최고의 장면 중 하나다.
히치콕은 이 같은 대결을 즐기는 듯하다. 그에게는 가족 가치의 수호자들을 머리싸움에서 눌러 이길 기회다(a chance to outfox the guardians of family values). 그는 그런 맥락에서 아이젠하워 정권 말기에 맞춰 영화를 제작한다고 출연진과 스태프에게 통보한다. 실제로 1959년 11월 말~1960년 1월 초 마법처럼 신속하게(with wizardly dispatch) 영화촬영이 이뤄졌다. 히치콕의 메시지는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명백했다(unemphasized but unmistakable).
1950년대는 끝났으며 새로운 10년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또한 새 시대에는 섹스와 폭력, 그리고 두 테마간 관련성의 탐구에 대한 억압과 침묵이 줄어든다. 규범과 검열도 곧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히치콕이 그 방향을 제시했다. ‘싸이코’의 자손들이 곧 미국 영화에 등장해 다시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와일드 번치(The Wild Bunch)’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조는 ‘싸이코’”라고 저바이스가 지적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조스’ ‘스타워즈’ 시리즈, 코엔 형제의 니힐리즘 실험도 마찬가지다. 시대의 질식할 듯한 표준을 혁파하려는 히치콕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다면 그중 무엇 하나 가능하지 않았다. 평론가들을 만족시키기보다 관객을 자극하려는 시도 말이다. 원작 ‘싸이코’에서 칼로 찌르는 장면은 히치콕의 머리 속에 “스크린을 찢고, 영화를 난도질하는(tearing at the very screen, ripping the film)” 이미지를 전달했다.
지금와서 보니 우리에게 진한 여운을 남기는 건 그뿐이 아니다. 그 앞과 뒤의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잔인한 이미지의 연출, 재닛 리가 샤워꼭지에서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물줄기를 느낄 때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오르가슴에 가까운 희열, 그리고 그녀가 공격을 당한 뒤 초점을 잃은 커다란 눈동자의 초현실적인 이미지(the surrealistic image of one enormous lifeless eye). 이때쯤 그녀의 얼굴은 물방울로 반짝이는 마스크로 변한다.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은 ‘싸이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영화는 내게 충격을 줬다. 비도덕성의 극한을 넘나드는 케이스라고 느낄 정도였다(made me feel that it was a borderline case of immorality). 감독이 살인자와 함께 유쾌하게 음모를 꾸미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모텔 욕실에 샤워하러 들어갈 때마다 기억날 정도로 깊게 뇌리에 박혔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것이 연극적 체험의 핵심이다(what a theatrical experience is about). 이같은 공포를 함께 느끼고, 주변 사람들의 안전을 인식하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극장을 나서면서 함께 웃으며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말이다.”
‘싸이코’는 단순한 공포를 뛰어넘는, 미학적으로 표현된 공포 이상의 뭔가를 보여준다(offers more than horror aestheticized). 가장 치밀하게 계산된 기법을 동원해 우리의 가장 원시적인 욕구를 되살린다. 그 음모에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그런 거장의 작품 앞에서 그것을 만든 사람이 “좋은지” 또는 “나쁜지” 묻는 건 부질 없는 짓이다. 히치콕은 사람들이 거의 감히 혼자 가려 하지 않거나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덫에 갇혀있다(We’re all in our private traps)”고 노먼 베이츠가 자신의 표적을 공격하기 직전의 고요 속에서 희생자에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내 덫에 신경 쓰지 않는다.” 히치콕은 이 걸작을 만들면서 무엇보다 자신의 금박 우리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다(wanted above all to spring free of his own gilded cage). 그리고 우리를 함께 데려가고자 했다. 우리는 달리 선택권이 없어 그를 따른다.
히치콕은 이것을 알았다. 저바시도 마찬가지다. ‘싸이코’의 개봉일, 히치콕은 극장 로비에 홀로 서서 지휘자처럼 양팔을 들어 올린다. 보이지 않는 관객의 비명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을 때 애정이 담긴 손짓으로 그 템포를 이끈다(lovingly setting the tempo for an audience he can’t see as its screams crescendo toward their cli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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