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조의 젊은 피
겐조의 젊은 피
지난 1월 10일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 로렌조 중앙시장.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움베르토 레온과 캐롤 림(한국계 미국인)이 2013 가을 남성복 컬렉션을 소개하는 패션쇼를 열었다. 두 사람은 패션업계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오른 디자이너답게 피티 우오모(매년 1월과 6월 피렌체에서 열리는 국제남성복 박람회)의 특별 게스트로 초청 받았다. 르네상스 도시인 피렌체에 어둠이 내리자 섬광등 불빛과 안개 속에 일단의 남성 모델이 등장했다.
이번 컬렉션에서 레온과 림은 맵시를 살리는 재단과 뚜렷한 실루엣을 강조했다. 겐조 특유의 대담한 무늬와 밝은 색상을 살리면서도 지난 시즌보다 더 단아한 느낌이다. 지난해 7월 선보인 2013 봄 컬렉션 주제는 정글이었고 이번 컬렉션 주제는 하늘이다. 하늘색 바탕에 만화 같은 이미지의 구름 무늬가 중심이다. 쇼가 끝난 후 림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시즌 이후 우리는 하늘 위의 정글이라는 개념을 탐구해 왔다. 거기에 신과 여신, 신화적 이미지 등 다른 요소들을 곁들였다.” 레온도 한마디 거들었다. “봄 시즌엔 아주 재미있고 신나고 활기찬 뭔가를 보여줬다. 그래서 이번엔 낭만적이고 재단과 세부사항에 초점을 맞춘, 겐조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겐조에서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 개념도 패션쇼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적용됐다. 관람석 위에 놓인 유명 브랜드의 비행기용 담요부터 토스카나 지방의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 선택까지. 레온은 이렇게 말했다. “산 로렌조 시장은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다. 우린 이 장소를 봤을 때 이번 컬렉션의 배경으로 모든 것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장소와 컬렉션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거기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새로운 겐조 고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리라 기대했다.”
겐조의 새 고객들은 레온과 림이 세심하게 설정하는 방향에 따라 패션 감각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겐조는 1990년대 말 창업주 다카다 겐조(일본 출신 디자이너)가 회사를 떠난 후 살짝 궤도를 이탈했었다. 하지만 레온과 림은 겐조에 영입된 지 18개월만에 회사를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멋진 컬렉션을 선보이면서 고객을 끌어모았다.
일상적인 측면과 환상적 이미지의 결합은 겐조의 변함없는 특성이다. 다카다는 1970년 파리 2구 중심가에 정글 잽이라는 부티크를 열었는데 여기서 겐조 브랜드가 탄생했다. 그는 끝없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 요소를 혼합하기로 유명했다. 고급 패션과 길거리 스타일을 혼합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을 듯한 무늬와 밝은 색상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다카다는 이브생 로랑, 아제딘 알라이아 등 1970년대 파리 패션계를 개혁한 신세대 디자이너들 중 한 명이었다. 소수 고객을 상대로 비공개적으로 열리던 1960년대 패션쇼는 인기를 잃었다. 다카다는 동양과 서양의 미학을 결합한 활기 넘치는 디자인으로 열성 팬들을 확보했다. 보그 미국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레이스 코딩턴은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1970년대(당시 그녀는 보그 영국판의 패션 에디터였다)엔 겐조와 이브생로랑의 옷만 입다시피했다고 회상했다.
겐조는 1993년 루이뷔통 모에 에네시(LVMH)에 팔렸지만 다카다는 1999년까지 회사 운영을 맡았다. 다카다가 떠난 뒤 겐조는 명확히 정리가 안 된 특허 계약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0년대 초에는 특유의 대담한 무늬와 플라워 향수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다. 2003년 사르디니아(이탈리아의 섬) 출신의 디자이너 안토니오 마라스가 여성복 디자이너로 영입됐고, 2008년에는 브랜드 전체의 크리에티브 디렉터 자리에 올랐다.
마라스는 다양한 요소를 혼합한 다카다의 미학적 전통을 따랐다. 그의 기성복 패션쇼는 화려했다. 창립 40주년을 맞은 2010년에는 이국적인 의상을 입은 모델 40명이 19세기 서커스 천막 아래서 행진했다. 마라스가 겐조에 몸담았던 동안 매출 실적이 좋은편이었지만 그의 계약은 예상보다 일찍 종료됐다. LVMH 측은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때 레온과 림이 등장했다. 당시 그들은 뉴욕 소호에서 오프닝 세러머니라는 편집매장(여러 브랜드의 제품을 한 자리에 모아 판매하는 곳)을 경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로다르테의 케이트 멀리비와 프로엔자 슐러의 잭 매컬러, 라자로 헤르난데즈 같은 디자이너들이 주류 패션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훨씬 전부터 이들의 제품을 취급하는 등 뛰어난 안목을 자랑했다. 레온과 림은 패션업계 고위층 사이에서 꽤 명성을 얻었지만 겐조 같은 대형 패션 하우스에서 이들을 영입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었다.
레온과 림은 LVMH의 간부 피에르-이브 루셀과 인터뷰를 가졌다(당시 루셀과 인터뷰를 한 사람은 이들 외에도 30명이나 됐다). 2011년 이들은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럭터로 영입됐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2011년 10월 레온과 림이 첫 번째 패션쇼를 연 뒤 파리 패션 주간 행사에서 겐조의 패션쇼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뉴욕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곧 유럽 패션계 내에서 팬층을 확보했다. 패션계 인사들이 패션쇼장 밖에서 겐조의 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길거리 패션 사진가들의 카메라에 잡혀 큰 인기를 끌었다.
두 시즌 후 레온과 림은 겐조를 정상 궤도로 되돌려놨다. 18개월 동안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성공적인 브랜드를 구축하는(혹은 기존 브랜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방법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디자인을 채택할 때 늘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고 레온은 말했다.
“우리는 디자인을 하지만 결국 최종 소비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할 때는 우리가 봤을 때 ‘저 옷입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 만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 패션쇼 무대는 일종의 환상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실제로 손에 잡을 수 있는 환상이어야 한다.”
최고의 유행 선구자 레온과 림은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적절한 유명인사를 참여시켜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오프닝 세러머니를 운영하면서 얻은 교훈이다. 그래서 그들은 클로에 세비니, 스파이크 존스, 제이슨 슈워츠먼 등 영화계 인사들과 협업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겐조에 적용해 프랑스의 전설적인 사진가 겸 아트 디렉터 장-폴 구드에게 최근 광고 작업을 두 번 맡겼다. 또 보석 디자이너 델피나 델레트레즈와는 지속적으로 협업한다. 그들은 또 지난해 운동화 브랜드 밴스와 공동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영리한 마케팅이다. 하지만 거기에만 치중해서는 안 된다. 레온과 림의 전략은 겐조의 정신을 지키되 소비자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쉽게, 좀 더 젊은 층 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격대를 낮췄고 브랜드의 위상을 APC, 이사벨 마란트 등 프랑스 브랜드들과 나란히 컨템포러리 디자이너 그룹에 포함되도록 재조정했다.
하지만 겐조는 다른 컨템포러리 브랜드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다카다가 일본 출신이라는 점이 그의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듯이 림과 레온 역시 미국 문화의 영향을 겐조에 성공적으로 접목시켰기 때문인 듯하다(일례로 그들은 2012 가을 여성복 패션쇼 행사를 위해 뉴욕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컵케이크를 공수해 왔다). 지금까지는 성과가 꽤 좋다.
팬 문화와 대중적인 브랜드 이미지 구축 등이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파리 패션 하우스 겐조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레온과 림은 다음달 파리에서 2013 가을 여성 기성복 컬렉션을 발표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추진력은 앞으로 더욱 커질게 분명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레온은 말했다. “다카다 겐조가 패션업계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고 그 유산을 이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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