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 떠안는 과감한 투자 빛났다
리스크 떠안는 과감한 투자 빛났다
‘Daimler under pressure to change gear’.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2월 7일자 기사 제목이다. 독일 자동차회사 다임러그룹이 일부 주주로부터 경영진 교체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게 기사의 요지다. 세계적 명차 벤츠를 만드는 이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FT가 전한 속사정은 이렇다.
‘다임러는 지난해 고급차 시장에서 독일 내 경쟁상대인 BMW·아우디에 밀려 저조한 성적을 냈다. 지난해 다임러의 세전 영업이익은 80억 유로(약 11조8000억원)로 2011년(90억 유로)보다 줄었다. 자동차 수요 둔화를 감안하면 나름 선방한 실적이지만 일부 주주들은 다임러 경영진에 책임을 물으려 한다. 주주들의 이런 움직임은 오너 가문이 없는 다임러그룹의 지배구조에서 비롯한다.
다임러는 중동 자본 등이 주요 주주로 참여한 가운데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디터 제체 회장이 최고경영자(CEO)다. CEO를 도와 ‘감독이사회’란 기구가 주요 경영 현안을 결정한다. 경쟁상대인 BMW나 아우디 소유사인 폴크스바겐과는 달리 다임러-메르세데스가 대주주 가문이 없다는 점이 주주에게 취약한 이유 중 하나다.’
주주 요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문경영인 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기업 지배구조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 창업주 일가가 경영을 맡는 오너 경영 체제, 오너 대신 전문경영인을 내세우는 체제, 오너 자체가 없는 경영시스템, 협동조합형 지배구조…. 크게 나눠보더라도 네 가지가 넘는다. 어떤 형태가 가장 좋은 지는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효율과 수익성을 따지는 기업의 특성상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게 학계·경제계의 중론이다.
한국에선 사정이 좀 다르다. 한국에 기업이 들어선 지 100여년 동안 바람직한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재벌로 대표되는 한국형 가족지배 경영에 대한 비판은 경제민주화 바람 속에서 더욱 거세다. ‘가족지배 경영=전근대적 경영시스템’이란게 고정 관념이 작용한 탓이다.
가족지배 경영, 즉 오너 경영은 과연 후진적인 시스템일까. 한국에서는 오너 경영의 부정적인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지만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선 오너 경영은 전문 경영인 체제와 함께 기업 지배구조의 양대 축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무엇보다 2008년 이후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오너 경영의 강점이 전 세계적으로 재조명받는 추세다.
지난해 글로벌 자동차업계의 최대 이슈는 단연 ‘도요타의 부활’이었다. 도요타는 2010년까지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의 맹주였다. 렉서스 등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차로 세계 주요 시장을 휩쓸었다. 그러나 2011년 상황이 급변했다. 온갖 악재가 쏟아졌다.
우선 2000년대 중반 이후 잇단 리콜로 흔들리기 시작한 ‘도요타 신화’가 2009~2010년 미국과 유럽에서 1000만대에 육박하는 차를 리콜하면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동안 쌓은 품질과 신뢰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11년 동일본 지진과 태국 홍수로 자국과 해외 생산기지가 타격을 입었다. 이 여파로 2011년 도요타의 자동차 판매량 순위는 미국 GM, 독일 폴크스바겐에 밀려 3위로 추락했다.
오너 경영은 위기 때 더욱 빛난다회생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관측을 비웃듯 도요타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도요타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975만대의 차량을 팔았다. 929만대를 판매한 미국 GM과 910만대를 판 독일 폴크스바겐을 다시 앞서는 성적이다. 도요타 부활의 비결은 뭘까.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엔저(低) 효과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끊임 없이 문제점을 개선해나가는 도요타 특유의 조직문화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이런 조직문화를 만들어낸 원동력의 하나가 오너 경영이다. 도요타는 일본 주요 기업들이 그래왔듯이 1995년부터 전문경영 시스템을 도입했다. 오너 가문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전문경영 시스템은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창사 이후 첫 영업적자를 낸 2008년까지 계속됐다. 2009년 9월 도요타는 위기 극복을 위해 오너 경영 복귀를 결정했다.
창업주 도요타 기이치로의 손자인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도요타의 오너 경영 복귀에 대해 “도요타의 대정봉환(大政奉還)은 최선의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대정봉환은 1868년 메이지유신 당시 도쿠가와 막부가 일왕에게 권력을 넘긴 것을 말한다. 불황과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전문경영인 체제가 아닌 오너 경영으로 회귀한 도요타의 결정이 옳다는게 당시 일본 경제계의 중론이었다.
실제로 이런 평가는 들어맞았다. 아키오 사장은 부임 첫해부터 최악의 리콜 사태를 겪었지만 동일본 지진 등의 위기를 도요타 특유의 모노쓰쿠리(물건 잘 만들기)와 원가절감 정신으로 극복했다. 그는 이전까지 양적 팽창 위주 전략을 폈던 60대 경영진을 물갈이하고 품질과 디자인 분야 전문 인력을 대거 기용했다. 전문 경영인 시스템에선 추진하기 힘든 조직 혁신을 밀어 붙이고 오너 경영 특유의 결단력으로 도요타를 부활시켰다는 게 아키오 사장에 대한 시장의 평가다.
오너 경영과 비 오너 경영의 대비되는 사례는 정보기술(IT)·전자산업 분야에도 있다. 소니와 삼성이다. 한 회사는 최고의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고 다른 회사는 보잘것 없던 기업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소니는 모리타 아키오와 이부카 마사루라는 두 명의 명콤비가 1946년 설립한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로 출발했다.
1970년대 휴대용 라디오, 1979년 워크맨 신화로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TV 시장의 1인자로 전 세계에 ‘소니 신화’를 쓴 기업이다. 1997년 창업주 이부카 마사루가 세상을 뜨고, 2년 뒤인 1999년 또 다른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가 폐렴으로 별세하면서 소니 신화는 서서히 무너진다.
두 창업주가 뜬 다음 소니를 이끈 이는 이부카 마사루의 사위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이었다. 노부유키 회장은 1995년 취임 당시 3000억엔의 적자를 냈던 소니를 3년 만에 2200억엔의 흑자를 내는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이게 전부였다. 이후 3년 간 소니는 디지털 시대의 낙오자로 전락했다. 워크맨과 브라운관 TV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이 애플·삼성전자 등 경쟁사들은 아이팟과 디지털TV로 승승장구했다.
결국 노부유키 회장은 2005년 소니미국법인 사장이던 하워드 스트링어에게 자리를 넘겨준다. 그러나 스트링어 회장의 소니 역시 매년 막대한 적자를 안기면서 부활에 실패했다. TV시장에선 3~5위권으로 뒤쳐졌고 휴대폰 시장에선 애플·삼성전자에 밀려 명함도 못 꺼낼 정도로 추락했다. 결국 지난해 4월 소니 CEO 바통은 히라이 가즈오에게 넘겨졌다.
‘오너 경영=전근대적 경영방식’은 고정관념소니의 추락은 경영진의 빠른 의사결정과 선견력이 부족했다는 게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오너 경영 이후 2005년부터 전문 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영 판단의 속도가 더뎠다는 얘기다. 기술의 변화와 그에 필요한 과감한 투자 결정을 소니는 하지 못했다. 소니와 정반대 모습을 보인 곳은 삼성이다.
삼성은 1987년 이병철 창업주가 세상을 뜬 직후 3남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이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을 당시 삼성은 국내 1등 기업도 아니었다. 국내에선 굴지의 그룹 정도로 인정받았지만 해외에서 삼성의 인지도는 형편없었다. 삼성은 그러나 불과 20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세계 최대 전자회사로 거듭났다.
강력한 오너십을 토대로 과감한 투자 결정을 내린 게 주효했다는게 국내외의 평가다. 1983년 이건희 회장 주도로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 이후 삼성은 매년 수조원의 투자 자금을 반도체 공장 신·증설 쏟아 부었다. 그 결과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의 점유율은 압도적이다. TV와 액정표시장치(LCD) 산업도 일본 업체보다 늦게 뛰어들었지만 대규모 자금과 인력을 투입한 끝에 세계 1위에 올랐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비롯한 새로운 영역에서도 똑같은 전략·전술로 경쟁사를 압도했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 경영인 체제의 최대 약점은 투자 리스크를 떠안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도 과감한 투자로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오너 경영이 삼성과 소니의 역전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오너 경영을 도입해 성공한 기업 사례는 많다. 일본 최대 전자부품회사인 니덱(日本電産)도 오너 경영으로 성공한 사례다. 1973년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창업주)이 10㎡짜리 창고에서 시작한 이 회사는 30년 만에 140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이 됐다.
니덱의 성장 비결은 과감한 인수·합병(M&A). 오너가 직접 리스크를 감수하고서 기술력은 있지만 실적이 부진한 기업을 골라 사들이는 방식으로 회사를 키웠다. 1990년대 이후 장기 불황 여파로 상당수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어가는 와중에 니덱이 가장 잘나가는 기업으로 꼽힌 비결이 여기에 있다.
독일 명품 가전업체 밀레 역시 창업 이후 오너 경영을 고집하고 있는 회사다. 독일인들이 ‘세탁기 업계의 메르세데스 벤츠’라고 부르는 밀레는 1094년 창업 이후 지금까지 4대째 가족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공동 창업한 밀레와 진칸 가문에서 번갈아 CEO를 배출했다.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전문 경영인 체제보다 가족 경영을 통해 품질 중시 전략을 지켜가겠다는 게 밀레 경영진의 철학이다. 실적도 더디지만 꾸준히 늘고 있다. 총 매출은 2003년 21억9000만 유로에서 2010년 28억3000만 유로로 늘었다.
오너 경영의 강점을 한마디로 정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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