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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ANTHROPY - 돕는 사람을 도우면 수백만이 행복해진다

PHILANTHROPY - 돕는 사람을 도우면 수백만이 행복해진다

사회적 기업가들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국내 소셜 섹터의 인프라는 아직 미비하다. 이를 돕겠다는 정경선 루트 임팩트 대표와 그를 도우러 미국서 온 멜리사 버만 록펠러 자선 자문단 회장을 만났다.

서울 광화문 현대해상 본사 접견실에서 만난 정경선 대표와 멜리사 버만 회장. 두 사람은 국내외 소셜 섹터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비영리 사업도 영리 사업만큼이나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전세계적으로 사회공헌 프로그램 개발에 관심이 커지면서 자선 자문을 받으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수익 창출’이 아닌 ‘혜택 극대화’가 목표인 사업이라 전문가의 자문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미국 록펠러 자선 자문단(Rockefeller Philanthropy Advisors)은 10년 전 록펠러 패밀리 오피스(Rockefeller Family Office)에서 독립한 비영리 기관이다. 100년에 걸친 자선 사업 노하우를 다른 기관들과 나누는 일을 주로한다. 창립 이래 자문한 누적 기부금은 무려 30억 달러. 존 록펠러 1세는 생전에 자선 사업도 기업 경영처럼 치밀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도 ‘사회적 기업가 후원’과 ‘자선 자문 서비스’를 표방한 젊은 청년이 있다. 작년 7월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 임팩트(Root Impact)를 설립한 정경선(27) 대표다. 그는 현대해상화재 정몽윤 회장의 장남이다. 2월 4일 아침 서울 광화문 현대해상 본사 접견실에서 정경선 대표가 그의 초청으로 방한한 록펠러 자선 자문단 멜리사 버만(Melissa Berman) 회장을 만났다.

이날 오후에는 루트 임팩트가 주최한 컨퍼런스 ‘Idea to Impact: 록펠러, 행동하는 아이디어를 만들다’에 다녀왔다. 컨퍼런스에서 한국의 젊은 사회적 기업가들의 프레젠테이션을 지켜본 멜리사 버만 회장은 “창의적이고 수준 높은 아이디어들이 인상적”이라며 한국 소셜 섹터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루트 임팩트는 사회적 기업가를 키우는 아쇼카(Ashoka), 그리고 자선 자문으로 명망 높은 록펠러 자선 자문단과 파트너십 협약을 맺었다. 이들과 교류를 통해 국내 소셜 섹터 전문가를 키우자는 취지다. 다시 그 전문가들로 사회적 기업, 비영리 기관, CSR, 개인 자산가 등을 자문하기 위함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인 자선 자문을 정경선 대표가 전업으로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든 사람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소셜 섹터의 생태계를 튼튼하게 만들어 구성원 각자가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소셜 섹터 생태계 튼튼해야

정경선 대표는 일찌감치 사회공헌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 시절 문화기획 동아리 쿠스파(KUSPA)를 결성해 자선 모금을 했다. 재능 기부 단체인 크리에이티브 셰어(Creative Share)를 만들어 사회적 기업을 위한 광고 공모전, 기부 캠페인, 명사 초청 이벤트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2011년 말부터 아산나눔재단에서 일하다 제대로 해보고 싶어 루트 임팩트를 세웠다. 버만 회장은 “정 대표처럼 이른 나이에 자선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보통 개인적인 깨달음이나 계기로 사회공헌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 정 대표는 어떨까.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자연스레 이 길로 올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남을 배려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어요. 할아버지께서도 아산사회복지재단을 만들어 나눔을 강조하셨고요. 남들이 행복해야 저도 함께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버만 회장도 가족환경과 종교적인 이유로 사회 공헌에 몸담게 됐다고 했다. “소셜 섹터에 종사하는 사람은 삶의 만족도가 높다”고 덧붙였다. 물질적인 만족보다 정신적인 보람으로 동기부여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어 행복하다는 것이다. 버만 회장은 “사업이 어려워 불행한 사회적 기업가가 있다면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자문단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사회 문제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결과는 상처에 반창고 붙이듯 단기적으로 해결 가능하지만 문제를 멈출순 없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은 원인을 바로 잡는 일이다. 정경선 대표는 “진정 사회적 변화를 위해서는 원인 해결이 중요하다”며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멜리사 버만 회장은 장기적 문제 해결이 자선 사업의 트렌드라고 들려줬다.

“최근 기부자들은 돕는 사람을 돕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전에는 노숙자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줬다면 지금은 노숙자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기관에 기부를 하는 거죠. 최근 몇 년간 기부자들이 관심을 갖는 사회적 이슈는 가난, 지구 온난화, 후진국의 물 부족, 위생 문제 등입니다.”

버만 회장은 또 다른 트렌드로 자산가들의 적극적인 관여를 꼽았다. 단순히 기부에 그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홍보에 앞장선다는 거다. “결국 자선은 자발적으로 우러나야 하는 것이고 강요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자선을 통해 죄를 씻으라는 식의 강요적인 분위기가 없지 않다. 이에 대해 버만 회장은 “죄책감은 절대 동기 부여 방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자선을 하던 사람도 어려운 시기에는 인색해 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자산가, 일반 기부자들에게 어려울수록 더 나누라고 권유합니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에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대부분 정신적인 여유가 부족해서죠. 관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자산가와 자선을 연결시키는 루트 중 하나가 금융회사다. 정경선 대표는 “미국에서는 금융사들이 고액 자산가들을 위한 서비스에 사회공헌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며 “삼성 패밀리 오피스도 이 같은 서비스를 한다”고 밝혔다.

버만 회장은 자산관리사와 PB들을 위한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고객에게 자선을 권할 수 있어요. 일단 고객이 관심을 보이면 우리 같은 자문단에 연락이 와요. 일부 금융회사는 아예 안에 자선 관련 업무팀을 두고 있죠.”

자선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록펠러 자선 자문단은 게이츠 재단 후원으로 『자선 로드맵』(Philanthropy Roadmap)’이란 책자를 제작했다. 루트 임팩트는 이 로드맵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버만 회장이 설명을 이었다.

“자선은 하나의 여정이고, 로드맵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기까지 돕는 가이드북이에요. 크게 다섯개의 이정표가 있죠. 먼저 ‘자선 활동 동기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로 시작해요. 다음은 ‘궁극적인 목표 찾기’ ‘전략 세우기’ ‘성과 평가 방법 알기’ ‘누구와 여정을 함께할 것인가’로 구성돼 있어요. 각 이정표마다 친절한 설명이 나와있죠.”



기업들은 가시적 성과에 집착

정경선 대표를 포함한 루트 임팩트 직원 4명은 앞으로 3개월간 뉴욕에 머물 예정이다. 이들은 록펠러 자선 자문단에서 펠로우로서 노하우를 전수받는다. 비영리 사업도 영리 사업만큼 전략·홍보·운영이 중요해서다. 정 대표는 최근 느끼는 게 많다고 했다. 일거리를 찾기가 만만치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길인 줄은 알았지만 국내 소셜 섹터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정경선 기업과 정부는 의사 결정 구조가 복잡하고 진행상황(status quo)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결과를 낼 수 없는 일에 투자나 지원을 못하는 겁니다.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사회적 책임 경영)도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고요. 또한 가시적 성과의 홍보 효과에 익숙해져 장기적 문제 해결에 별 관심이 없어요.



멜리사 버만 미국도 마찬가지에요. 큰 기업은 재난구호(disaster relief)와 같은 봉사를 선호해요. 조난자를 돕는 일은 효과가 눈에 보이니까요. 물론 이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해요. 록펠러 자선 자문단이 트리니다드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를 예로 들죠. 캐러비안 해안에 위치한 트리니다드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국가에요.

록펠러 재단은 이 곳 고아들에게 15년간 기부를 했죠. 하지만 고아들의 삶이 진정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록펠러 자선 자문단은 캐러비안 지역에서 비영리 사업을 돕는 회사를 찾았어요. 그리고 그 회사가 트리니다드 비영리 기관 10곳에 경영·전략·재정교육을 하도록 지원했어요. 현지에서 실질적인 관리가 가능하도록 한 거죠.



정경선 저도 그런 역량강화(capacity building) 프로젝트를 하고 싶습니다.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을 지원하는 거죠. 한국의 비영리 소셜 섹터는 취약해서 정부나 CSR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요. 국내는 이런 일을 하는 분들의 환경이 열악합니다. 너무 희생정신만 요구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일이 잘 안 풀리게 마련이고 그게 악순환이 되는 거죠. 역량강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꼭 필요합니다.



멜리사 버만 파트너와의 협력도 중요해요. 게이츠 재단처럼 큰 기관도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또한 장기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인내력이 필요하죠.



정경선 기업은 연간 평가 때문에 단기간에 결과물을 내야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그런 압박감을 해소하면서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까요?



멜리사 버만 우리는 CSR에게 기업 차원에서 장기(3~5년) 플랜을 개발하라고 주문해요. 그 안에서 CSR이 달성할 이정표를 만들어 성과를 내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장단기 목표의 연결고리가 생기고 CSR과 기업 모두 충족시키는 모델이 되죠.



롤 모델은 아쇼카 설립자 빌 드레이튼

사회공헌은 인맥이 중요하다. 정경선 대표는 네트워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지난 1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허브 서울(HUB Seoul)’을 열었다. 네트워킹 업무공간겸 카페인 이곳은 2005년 영국 런던에서 설립돼 전세계 30여 개 도시로 확산된 ‘더 허브(The HUB)’ 서울 지점이다. 사회적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허브 서울은 20대 청년 사회적 기업가들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정경선 공동 대표, 저가형 보청기 사업으로 성공한 딜라이트(Delight)의 김정현·김정헌 공동 창업자, 사회적 기업 인큐베이팅을 하는 임팩트 스퀘어(Impact Square)의 박동천 공동 대표, 소셜 디자인 그룹 엔스파이어(Enspire)의 김성민 대표 등이다. 현재 국내서 가장 주목 받는 사회적 기업은 딜라이트다. 정경선 대표는 딜라이트를 국내의 성공 사례로 꼽았다.

“딜라이트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드는 대한민국의 노인 난청 문제에 주목했어요. 보청기 가격이 적어도 대당 100만~200만원인 상황에서 기초수급생활 청각장애인의 보청기 구입 지원금이 34만원에 불과하다는 문제점을 짚었죠. 소외계층 노인이 보청기가 없으면 의사소통이 어려워져 다시 소득 수준이 하락하는 악순환이 생겨요. 이를 막기 위해 딜라이트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34만 원짜리 보청기를 만들었어요. 저소득층에는 사실상 무상 공급을 한 거죠. 딜라이트는 올해 매출 80억원을 기대하는 성공적인 소셜 벤처가 됐어요.”

딜라이트는 인도의 ‘오로랩’을 참고했다고 한다. 오로랩은 수술비가 없어 간단한 백내장 수술조차 받지 못해 실명에 이르는 인도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적 기업이다. 혁신을 통해 인공수정체 가격을 대폭 낮춘 모델을 만들었고, 현재 전세계 인공수정체 시장 점유율 8%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이익을 다 이룬 것이다.

사회적 기업가들은 서로에게 영감과 본보기로 작용한다. 긍정적인 모방을 통해 좋은 일을 배로 확산해 나간다. 정경선 대표는 “『보노보 혁명』이라는 책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전세계 사회적 기업가들의 성공 사례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정 대표가 롤 모델로 꼽은 아쇼카 설립자 빌 드레이튼(Bill Drayton)의 사례도 이 책에 있다. 정 대표는 작년 8월 미국 아쇼카 본사에서 그를 직접만나기도 했다.

“빌 드레이튼은 변화를 위해 아이디어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사업가적 기질을 중시한 그는 30년 전 사회적 기업가(social entrepreneur)라는 개념을 대중화했어요. 진정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마음에 닿습니다.”

멜리사 버만 회장은 자선 자문의 최종적인 목표를 이렇게 설명했다. “돕는 자를 돕는 것이 가장 고차원적인 자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자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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