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력 겸비한 국제 금융계 거물
정치력 겸비한 국제 금융계 거물
이스라엘 중앙은행(BOI) 총재인 스탠리 피셔(70)는 오는 6월 말로 물러난다고 1월 29일 발표했다. 당시 이 소식은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전 세계의 유대계 자본력과 금융 인맥은 대단하지만 이스라엘은 세계 경제와 금융산업의 변방이기 때문이다.
2월 18일 워싱턴포스트(WP)의 보도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내년 1월 임기가 만료되는 벤 버냉키(60)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후임으로 피셔 총재가 떠올랐다고 전한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MIT대학 교수 출신인 피셔는 경제학자로서의 능력은 물론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갈수록 필요성이 커지는 외교 감각과 정치력까지 겸비했다”고 칭찬했다. 이 때문에 미 경제를 일으켜 세울 구원투수로 주목 받은 것이다.
수년간 이스라엘 경제 르네상스 이끌어2005년 5월 BOI 총재에 오른 피셔는 유럽 재정위기로 상황이 어려웠던 2009∼2012년 이스라엘 경제를 4년 평균 14.7%의 성장으로 이끌었다. 아울러 스위스 로잔의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매년 발행하는 세계경쟁력연감 효율성 부문에서 BOI를 2010년 전 세계 중앙은행 중 수위로 끌어올렸다. 한 마디로 능력 있는 중앙은행장이다. 최근엔 일본의 통화 팽창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등 국제 경제 현안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지난해 11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이 캐나다 국적의 마크 가니 캐나다 중앙은행(BOC) 총재를 신임 총재로 영입하면서 미연방준비제도의 차기 의장으로 피셔 교수가 거론된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보도했다. 피셔는 외국 국적자로서 중앙은행장으로 영입된 선구자다. 거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피셔는 1943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북로디지아(지금의 잠비아) 남부 1200명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났다. 이 공동체의 유대인들은 독립과 혼란 등으로 대부분 남아공·미국·캐나다·영국·이스라엘 등지로 떠나고 지금은 수십 명만 남아있다. 피셔는 13살인 1956년 가족을 따라 남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로 이주했고 1960년엔 미국으로 이민했다. 남로디지아에선 영국계 학교에 다녔으며 유대인 청년운동에 가담했다.
1960년 처음 이스라엘을 방문해 키부츠에서 열린 여름캠프에 참가했다. 현지 헤브루대에 진학하길 원했으나 영국의 명문 런던정경대(LSE)에서 장학생 제안이 오자 영국으로 떠났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던 아프리카에선 영국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고 미국이 아닌 영국에 유학 간 이유를 밝혔다.
LSE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미국 MIT대로 옮겨 1969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카고대 조교수를 거쳐 1973년 MIT 교수가 됐다. 1976년에는 미국 국적도 얻었다. 그는 MIT에서 훌륭한 제자를 길러냈다. 특히 버냉키와 2003~2005년 조지 W 부시 아래에서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낸 그레고리 맨큐(55) 하버드대 교수의 논문 지도교수를 맡았다. 두 사람 다 미국 경제를 이끄는 거물이다. 이탈리아 국적의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그의 제자다.
피셔는 1988년 세계은행(WB) 부총재로 자리를 이동했다. 2년 임기를 마치고 1990년 MIT로 돌아온 그는 1994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부총재를 맡아 2001년까지 일했다. IMF 재임동안 그는 1997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경제위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을 처리하면서 능력을 인정 받았다. 당시 공채 발행을 외환위기 탈출의 해법으로 제시해 효과를 봤다.
2001년 말 IMF 근무를 마친 그는 시티그룹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다 2005년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로 발탁됐다. 피셔를 이스라엘로 부른 건 당시 이스라엘 집권당이던 중도우파 리쿠드당의 정치적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당시 아리엘 샤론 총리가 리쿠드당 내의 정치적 경쟁자인 베냐민 네타냐후 당시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을 놓고 밀고 당기다 피셔를 초청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네타냐후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이스라엘을 경제적 경쟁력이 강한 나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주요 노동조합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몇몇 장관과 맞섰다. 세금 제도도 손보려 했다. 그런 네타냐후에게 시장개방과 경쟁력 촉진을 강조하던 유대계 미국인 경제학자 피셔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스라엘 헤브루대의 오메르 모아브 교수는 “피셔는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반사회 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시장의 힘을 믿으며 작은 정부와 복지가 아닌 일을 통한 주민 자립을 지향한다. 이것이 그를 네타냐후가 피셔를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로 모셔온 이유”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피셔는 IMF에서 아시아와 러시아의 외환위기를 수완 있게 처리해 능력을 인정 받았다. 1985년 이스라엘 경제 안정화를 위한 미국 정부 자문단으로 활약해 이스라엘에 문외한도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어려서 가족과 함께 7년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살았던 네타냐후는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1977년 석사를 받았다. 피셔가 바로 이 경영대학원에서 교수로 일하던 때다. 피셔는 네타냐후의 MIT 스승이다(네타냐후는 1996~1999년 총리를 지냈으며 2006년부터 다시 총리를 맡고 있다).
네타냐후의 제안을 받은 피셔는 거액 연봉을 포기하면서까지 시티은행 부회장직을 내던지고 ‘알리야(해외 유대인의 이스라엘로의 귀환 이민)’를 선택했다. 즉각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해 복수 국적자가 됐다. 미국에서 경제학자와 금융인으로서 존경 받던 피셔가 알리야를 선택한 것은 미국은 물론 이스라엘에서도 놀라운 소식이었다.
물론 그는 시온주의자이며 헤브루어를 능숙하게 한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의 빛이 되며 해외에 사는 최고의 유대인 인재와 가장 명석한 인물을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언론인 출신으로 시온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오드로 헤르츨의 꿈이다. 시온주의의 이상인 것이다. 피셔의 영입은 이스라엘의 글로벌 인재 발탁과 해외 거주 유대인의 본국에 대한 봉사와 헌신의 사례다. 하지만 현실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렇게 이상적으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상당수 이스라엘인이 중요한 중앙은행의 수장을 해외에서 구한데 불만을 나타냈다. 큰 물인 미국과 국제 금융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군복무와 전쟁 공포, 테러 위협 등 이스라엘인이 짊어져야 하는 여러 시련을 겪지 않았다는 게 불만의 이유였다.
이스라엘 유력 일간지 하레츠의 칼럼니스트이자 유대 역사 전문가인 아리 샤비트는 “피셔가 금융 전문가로서 얼마나 능력이 있고 앞으로 얼마나 일을 잘하든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며 그의 영입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피셔를 영입한 네타냐후의 정치적인 반대파들이 주로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MIT대학 스승이스라엘의 정치철학자인 숄로모 아비네리는 피셔에 대한 일부 이스라엘인의 반대는 해외에 거주하는 성공한 이스라엘인에 대한 자부심과 적개심을 동시에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인들은 해외 거주 유대인의 알리야를 원한다. 왜 미국에 있는 수만 명의 유대인 고급 두뇌는 이스라엘로 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수군댄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해외에서 인재들이 귀국해 기존 이스라엘 국민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묘한 심리가 있다.
뉴욕타임스는 여기에 덧붙여 이스라엘에선 아는 사람이 드문 피셔가 중앙은행 총재로 부임하면 그를 상대로 로비를 펼칠 수가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격렬한 반대 속에 네타냐후는 정치적 생명을 걸고 피셔를 중앙은행 총재에 앉혔다. 전임 데이비스 클라인의 임기가 끝난 지 석달 반이 지난 5월 1일에야 취임할 정도로 진통이 있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는 압력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국적을 추가로 얻어 복수 국적자로 중앙은행장에 취임했다. 피셔는 글로벌 재정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경제를 훌륭하게 키워내면서 갈채를 받았으며 2010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가 내년에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맡으면 또 다른 드라마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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