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 별세상 북한의 실체
COVER STORY - 별세상 북한의 실체
북한의 무력도발 위협이 최고 수위로 치닫던 4월 1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새 내각 총리를 임명했다.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주도했던 박봉주(74) 노동당 정치국 위원이었다. 경제 개혁가로 알려진 그가 총리에 전격 기용된 것이 한반도 긴장의 소강상태에서 이뤄졌다면 언론은 낙관론으로 떠들썩했을 듯하다.
전문가들이 바람직한 ‘추세’라며 환영하고, 미국이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등 순진무구한 논평이 쏟아져 나왔을 게 틀림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긴장이 고조되던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라 우리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는 수고는 일단 면했다.
물론 북한 사정에 정통하다는 관측통들은 곧 한반도 상황을 낙관할 다른 이유를 찾을 것이다. 그들은 약 5년 전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부터 북한에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 예측했다. 그가 서방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북한을 서구화하고 싶어하리라는 전망이었다.
2010년 젊은 김정은의 사진이 공식적으로 처음 공개되면서 그들의 생각은 더 굳어졌다. 저 얼굴과 머리 모양이라면 그는 아버지 김정일보다는 할아버지 김일성처럼 통치하려 하지 않을까? 경제를 중시하면서 좀 더 부드럽게 나가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북한을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 숭배가 환상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북한의 사정에서는 먹혀 든다. 이 어린 4성 장군은 열광적인 군국주의 선전 속에서 권좌에 오르자마자 10억 달러에 육박하는 돈을 로켓 발사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발사는 실패했다. 그래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아내를 동반하고 나들이를 다니며, 놀이공원이 형편 없이 운영된다고 질타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나 덩샤오핑 전 중국 주석에 비교되기를 즐겼다.
지난 3월에는 김정은이 전 미국 농구 스타 데니스 로드먼을 초청해 잡담을 나눴다. 그 일을 두고 미 중앙정보국(CIA) 고참 요원들은 “미국과 교섭하려는 강력한 욕구의 표시(very powerful signal of a desire to engage with us)”라며 환영했다. 내 생각에 우리는 ‘교섭하다’는 말을 군사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군사적으로 ‘engage’는 교전한다는 뜻도 있다). 그러나 거의 곧바로 죽음의 핵전쟁 협박이 시작됐다.
언제까지 우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것인가? 북한은 선군국가를 자처하며, 선군정치에 따라 행동한다. 선군정치는 ‘군사선행, 군 중시’의 정치로 해석된다. 북한은 인종주의 옹호도 서슴지 않아 독일 신나치주의자들의 찬사를 샀을 정도다. 북한은 입에 발린 공산주의 찬양도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극우 정권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고집스럽게도 북한을 냉전에서 패한 공산주의 국가 둘 중 하나로 간주한다. 북한이 쿠바보다 무장이 훨씬 더 잘 돼 있지만 시대착오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는 쿠바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다. 이런 착각 때문에 미국의 네오콘(neo-con, 신보수주의자)들은 북한에 강경 대응하지 않아도 별로 꺼림칙하게 생각하지 않고, 진보주의자들은 북한과 합의한 모든 약속이 다 깨져도 여전히 대화를 촉구하면서도 터무니없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극우파적 행동을 두고 비판이 쏟아질 때면 누구보다도 비정부기구(NGO)가 북한을 가장 열렬히 옹호한다. 농업이나 다른 부문의 ‘손뻗기(reachout)’ 프로젝트로 북한과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고 기부자들을 설득하려면 해당 기구는 언제나 극좌파인 양 행세를 해야 한다. 2008년 평양에서 공연한 뉴욕필하모닉이 평화중재자의 후광을 두르고 귀국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엘튼 존이 소련 공연 후 미국에 돌아갔을 때도 그랬다.
기업이나 정부에서도 그렇지만 학계에서도 ‘쟁점 분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내놓으면 경력에 보탬이 된다. 비관론자는 얼마 못 가 할 말이 떨어지지만 낙관론자는 계속 논문이나 글을 발표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정치학자들이 희망사항에 불과한 그런 낙관론에 과감히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실제로 1970년대의 학자들이 지금처럼 북한에 관해 많이 알았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의 가장 느슨한 정의를 따른다고 해도 북한은 거기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북한을 포함해 모든 국가연구는 ‘준범용 모델’과 ‘유형분류학’을 적용하는 추세다. 예를 들어 신망 높은 권위자가 먼저 역사의 모든 독재정권을 탐욕에서 비롯된 부류, 정신불안에서 비롯된 부류 등으로 나눈다. 그러면 그의 제자가 그 분류를 기준으로 북한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설명하고, 그런 통찰력을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미국 정부에 조언한다. 어쩌면 감안되어야 할 ‘변수’로 해당 독재정권의 이념이 언급될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가 전부다.
외국어 학습의 쇠퇴도 문제다. 과거의 러시아 연구자들은 당연히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러나 우리 언론에서 인용되는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대개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을 읽지도 못한다. 그 전문가의 수준은 그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최근에 북한을 다녀 왔는지에 따라 측정된다. 그래서 정치적 분석보다는 경제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게 마련이다.
북한이 바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북한 정권은 특정 외국인을 화려한 정치 선전행사에 초청함으로써 어떤 외국인이 귀국해서 전문가 대접을 받을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돌아서서 관영 언론을 통해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말해주는 자칭 ‘북한 전문가들’”을 비웃는다.
김정은이 또 다른 ‘디즈니’ 캐릭터 공연을 참관하면 4월의 불쾌한 기억이 모두 지워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엄연한 진실을 말하고 싶다. 북한이 2002년 중앙통제식 ‘지령 경제’를 해체하기 시작한 이래 과거보다 더 호전적이고 위험해졌다는 사실 말이다.
북한 경제가 남한 경제를 닮을수록 북한 정권은 군사와 핵측면의 과시적인 진전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옹호하고 명분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냉전시대 사고방식에 갇힌 미국인들에게는 직관이나 상식에 어긋나 보일 수밖에 없다. 옛 동구권 공산국가들은 전부 자유주의 시장 경제로 이행하면서 곧바로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초민족주의 국가인 북한은 경제적인 변화만으로는 달라지게 할 수 없다.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라는 생각도 대단한 오해이지만 북한이 주체사상으로 엄격한 자립을 추구한다는 생각도 그 못지않게 잘못됐다. 주체국가이기 때문에 국경 무역을 활성화하면 북한의 핵심이 무너진다는 가정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런 오해가 어디서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김일성은 자립자조를 외치면서도 자주 그리고 노골적으로 외국상품을 수입했을 뿐 아니라 외국원조 끌어들였다. 북한의 지배 이념은 “독자적인 사회주의”라는 두루뭉술한 개념일 뿐이다. 그래서 요즘 북한의 기업가들도 다른 모든 북한인처럼 자신이 국가에 충성한다고 생각한다.
일부 평양 관측통은 북한 정권 내부에서 ‘실용파’와 ‘이념파’ 사이에 영역다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민을 안정시키고 정권에 충성하도록 만든 그 이념을 저버리는 것은 결코 실용이 아니다. 한반도에는 이미 경제 우선주의 국가인 한국이 트랙을 쌩쌩 달리고 있다. 100바퀴 뒤처져 경주에 뛰어든다고 해서 정치자본이 생기진 않는다. 북한의 노동당과 군부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물론 GDP가 올라가면 더 바랄 게 없다. 김정일 시대에도 더 많은 소비재 생산과 생활수준 향상의 촉구가 북한 정권의 전형적인 선전 문구였다. 국제 언론이 그런 일을 신선한 조짐으로 해석하기 훨씬 전인 시절에도 그랬다. 그러나 경제면에서 어떤 진전이 이뤄졌든 간에 북한은 그보다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계속 주장해야 존립할 수 있다. 두 개의 코리아 중에서 자신이 언제나 더 강하고 더 순수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군정치가 국내 선전용에 그치는 건 결코 아니다. 공격당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말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북한이 공격 당하기를 두려워 한다면 왜소한 군인들이 굶주리는 동안 사치품 수입에 경화를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 협상가들로부터 더 큰 보상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얄팍한 가능성을 노리고 거액을 무장 강화에 쏟아 붓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 정권이 미국 대사관이 평양에 들어오기 바란다거나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평화협정’을 원한다는 발상도 우리의 편리한 생각일 뿐이다. 북한 정권의 눈은 언제나 경쟁국인 남한이 제기하는 무한히 더 큰 위협에 고정돼 있다.
그 위협은 남한의 군사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남한은 1953년 이래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본격적인 무력으로 보복한 적이 없다. 도발이 없는 상황에서 선제 공격을 감행한 적도 없다. 북한이 두려워 하는 위협은 그보다는 남한의 자족적인 상황이다. “양키 식민지”가 그냥 자기 할 일을 즐겁게 하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지금은 북한 주민 다수가 외부의 문화와 정보에 접근이 가능하다.
따라서 남한 대중이 개인숭배에도 통일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 특히 그들에겐 위험하게 느껴진다. 당연하겠지만 북한 정권은 한반도가 자신의 통치 아래 통일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김정은과 그의 미디어가 대중에게 대담하게 약속하는 ‘최후 승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의 통치 아래서는 상당 기간 통일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어느 정도 긴장을 완화시켰다. 북한은 가난하고 약하지만 남한 좌파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인 협박보다는 범민족주의적인 선전과 은밀한 체제전복 활동을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다가 지난 5~6년 동안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핵프로그램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 만이 아니다.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이 떠오르고, 남한의 동맹국인 미국이 가라앉는 중이다. 갈수록 미국이 중국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북한에서는 모두가 안다. 동시에 남한 유권자들이 1970년대 이래보다 더 보수적인 연령층으로 변했다. 최근 친미성향의 대통령이 연속 선출됐다는 사실은 북한에 쓰라린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북한의 막말에서 분명한 변화가 생긴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하다. 지난해에는 죽음의 협박이 주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겨냥했다. 그의 후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어휘 사용적 이유에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협박을 받는다. 여성에게 해당하는 욕설은 북한의 기준에서도 너무 심하기 때문인 듯하다. 대신 북한은 남한과 미국을 향해 포괄적인 협박을 쏟아냈다. 둘다 똑같은 적대국가인 듯이 말이다. 물론 그 모든 협박과 욕설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을 협박으로 굴복시켜야 한다고 철저히 믿는 듯하다.
그들이 미쳤다고? 아니다. 남한에서는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녘땅에 대한 관심이 고점에 이르렀다가 그 이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남한 자체보다는 민족 전체에서 정체성을 훨씬 더 많이 찾는다. 북한을 좀 더 합법적인 국가로 간주하려는 남한인이 많다.
따라서 2010년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남한에서는 단순한 국가간의 무력 충동로 간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가 지금도 대중 시위로 이어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면 조건없는 북한 지원에 반대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도 긴장 고조는 원치 않는다. “경제적으로 좀 도와주고 끝내자”는 것이 갈수록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잡는 듯하다. 지금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위협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는 보수적인 유권자도 유화적인 성향을 가진 행정부가 들어서야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결론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북한의 협박은 계속될 것이다. 선군을 내세운 정권이 그 외에 무엇을 하겠는가? 미국이 최초의 핵무장한 극우 국가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내가 아는 척할 수는 없다. 그러나 냉전시대 사고방식을 답습해 경제적 변화에 거는 헛된 기대를 버리는 것이 첫걸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북한이 최근 발표한 ‘병진 정책’이 헛된 희망사항에 종지부를 찍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핵무력과 경제건설이라는 두 마리 말을 함께 묶는 북한의 국가 전략이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지금 그 두 마리에 말이 함께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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