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할리우드 영화에 동양인 여배우 급증

아시아권 흥행수입 늘면서 제작 단계부터 캐스팅 안배

1. ‘퍼시픽 림’의 기쿠치 린코. 2. ‘온리 갓 포기브스’의 야야잉 라타 퐁남. 3. ‘더 울버린’의 오카모토 다오.

영화는 마치 거울처럼 사회를 반영해왔다. F 스콧 피츠제럴드(『위대한 개츠비』의 저자)는 문화에 대한 영화의 기여도를 “0 이하”라고 폄하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영화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문화 척도 중 하나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낙관적인 영화 애호가들이라면 획기적이라고 할 만한 새로운 추세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 뜨거운 관심을 불러모은 영화들은 모두 아시아 출신 여배우들을 주연급으로 등장시켜 백인 남자 주인공의 상대역을 맡도록 했다. 로봇과 괴물이 싸우는 블록버스터 ‘퍼시픽 림’에서는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일본인 여배우 기쿠치 린코가 찰리 허냄에게 윙크를 보내고, ‘온리 갓 포기브스’에선 태국 팝스타 출신 야야잉 라타 퐁남이 라이언 고슬링의 둘도 없는 사랑으로 나온다. ‘더 울버린’에서는 일본인 모델 겸 배우인 오카모토 다오가 휴 잭맨의 피를 끓게 만든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솔직해져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1997년 영화 ‘007 네버다이’에서 본드걸 역할을 맡았던 미셸 여가 말했다. “아름다운 아시아 출신 여배우가 많다. 세계는 아주 좁아졌고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국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동양인 여배우가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선 안 된다.”

미셸 여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을 맡은 ‘007 네버다이’에서 주인공의 연인이자 조력자인 중국인 스파이 와이린 대령 역할을 맡았다. 이 배역을 차지하기 위해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풍만한 금발 여배우 나타샤 헨스트리지에게 배역이 거의 넘어갈 뻔하기도 했다.

“내가 연기를 시작할 때는 유럽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동양인 여배우의 수를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미셸 여는 말했다. “게다가 배우 전원이 백인인 영화에 왜 동양인이 출연하는지를 설명할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동양인은 폭력배이거나 차이나타운에 거주하고 우스꽝스러운 영어를 사용하는데, 나는 매우 불쾌하다고 느꼈다.”

갑자기 할리우드 배우의 국적이 다양해진 이유는 “마케팅 때문”이라고 미국 뉴요커지의 비평가 데이비드 덴비는 직설적으로 설명했다. 미국영화협회(MPA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중국 극장가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6.2%라는 어마어마한 상승폭을 보이면서 미국에 이어 규모 면에서 세계 2위의 시장으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영화사의 연간 흥행수익 중 70% 이상이 해외 시장에서 비롯된다. 아시아 관객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울버린’이나 ‘퍼시픽 림’ 같은 미국 블록버스터들은 일부 장면을 아시아 현지에서 촬영했다. 심지어 서양 영화사들은 중국 관객을 위해 중국판을 별도로 촬영하기도 한다.

코미디 영화 ‘21 앤드 오버’는 부모와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중국인 의대생이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파티를 벌이며 시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내용을 담았다. 제작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작사 렐러티비티 미디어의 이사진은 제작자에게 중국 관객을 위해 중국에서 몇 장면을 찍고 싶어했다고 LA타임스는 보도했다.

렐러티비티는 중국 국영 영화배급사 화샤를 포함한 몇몇 중국 기업들과 계약을 체결하고 영화 제작비의 일부를 지원받았다(그외 다른 혜택도 제공했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이 영화의 중국판(특히 마지막 부분)은 미국판과 전혀 다르다. “’21 앤드 오버’ 중국판은 중국을 떠난 소년이 서양의 방탕한 파티문화를 겪으면서 타락했다가 중국으로 돌아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라고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존 루카스가 말했다.

영화사들은 영화가 보다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내용을 수정하기도 한다. ‘월드 워 Z’가 그랬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이 영화에는 본래 등장인물들이 좀비 유행병의 진원지를 놓고 토론을 벌이다가 그것이 중국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는 장면이 있었다고 제작사 파라마운트의 한 임원이 미국 연예지 더 랩에 말했다.

그러나 그 장면이 중국에서 일으킬 파장이 걱정되자 제작자들은 진원지를 한국으로 바꿨다. 지난해 리메이크된 ‘레드 던’은 원작에서 중국군이었던 침략자들을 북한군으로 바꿔놓았다. 한국인들이 혀를 찰 노릇이지만 결국 돈이 되는 중국 극장가를 공략하기 위해서다. ‘아이언맨3’조차 중국판에서는 중국인 등장인물과 중국 장면을 추가했다.

앞으로 개봉할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변화가 더 확연히 드러난다. 유명한 아시아 배우들이 차기 블록버스터 영화의 출연자 명단에 포함됐다. ‘토르: 다크월드’의 아사노 다다노부, ‘다이버전트’의 매기 큐, ‘고질라’의 켄 와타나베,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의 판빙빙, ‘트랜스포머4’의 리빙빙 등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역할은 보통 명단의 7~9번째를 차지하는 조연이다.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영화를 제작하다 보면 느낀다.” ‘지.아이.조 2’의 감독 존 추는 말했다. “돈을 더 많이 벌려면 영화를 국제적으로 만드는 편이 좋다. 인기 중국 배우 섭외도 선호된다. 그가 맡는 배역의 질은 다른 문제다.”

중국 관객 입맛 맞게 내용 수정도매기 큐는 베트남인의 피가 섞인 액션 배우다. ‘미션 임파서블 3’ ‘다이하드 4.0’과 개봉을 앞둔 ‘다이버전트’에 출연한다. ‘다이버전트’에서는 CWTV의 연속극 ‘니키타’ 같은 정부 요원 역할을 맡았다. “서양 영화에서 아시아 여성들은 주로 액션물이나 역사물에 출연하고 창녀 역할을 맡으며 아시아인 특유의 억양이 두드러지는 영어를 사용한다”고 큐는 말했다.

“나 같은 여성을 인기 백인 주연배우의 상대역으로 쓰려 하지 않는다. 용기있고 생각이 열린 제작자가 주류와 다른 시도를 해보겠다는 뜻을 가져야 한다.” 큐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스스로도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어렵겠지만 동양인의 틀에 박힌 역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환경이 바뀐다.”

아시아(특히 중국)가 세계 영화시장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중국에서 역대 최고 흥행수입을 올린 영화 10편 중 4편이 할리우드 영화다. 최근 개봉한 ‘아이언맨3’는 지금까지 1억2200만 달러를 벌어들여 7위에 올랐다. 회계컨설팅업체 어네스트앤영은 최근 한 보고서에서 2020년까지 미국 영화산업이 중국보다 뒤처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다 폭넓은 배역을 차지하는 아시아인들이 갈수록 늘어나리라는 뜻이다.

“대개의 경우 사회가 크게 변하는 이유는 단지 돈 때문이기 마련이다. 거기까진 좋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미국 태생인 추가 말했다. “흥행을 위해 아시아 출신 배우를 영화에 섭외하는 게 아니라,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가 이국적인 역할이나 다른 곳에서 왔다는 설정 없이 영화에 출연하는 미래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