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 재계 ‘총력 저지’에 정부 고민
Issue - 재계 ‘총력 저지’에 정부 고민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이행을 위해 정부가 만든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상법 개정안)’ 논란에 사그라질 기미가 안 보인다. 법무부 주최로 두 차례 공청회가 열렸지만 찬반 양측 의견차만 확인하는 자리였다. 공은 다시 법무부로 넘어갔다. 현재로선 7월 17일 입법 예고한 개정안 원안을 밀어붙이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배수진을 친 총력 저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재계의 반발이 거세다.
8월 말에는 이례적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코스닥협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19개 경제단체가 상법 개정안 재검토를 요구하는 공동 건의문을 정부에 제출했다. 대통령은 8월 28일 대기업회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재계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 신중히 검토하고 많은 의견을 청취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예정에 없던 2차 공청회(9월 10일)가 열린 것도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게 재계의 판단이다.
강찬우 법무부 법무실장은 10일 열린 공청회에 참석해 “전문가·재계 사이에서 이견이 상당하기 때문에 좀 더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후속 합의 과정을 거쳐 최종안을 조만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9월 1일부터 100일 동안 열리는 정기국회 중에 최종 법안이 제출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지만,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도 있다. 최종안이 나와도 국회 통과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민주당은 찬성하지만 새누리당의 반대 기류가 강하기 때문이다.
2006~2007년의 재판이번 상법 개정안 논란은 2006~2007년의 데자뷰다. 2006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며 이중대표소송, 집행임원제도 법제화, 회사 기회 유용 금지, 주주총회 전자투표제 도입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당시에도 재계는 “지나친 규제로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며 반발했다. 갑론을박은 1년을 끌었다. 결국 핵심 쟁점이던 이중대표소송제 도입이 빠진 개정안이 2007년 9월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됐다.
하지만 개정안은 여·야간 대립으로 국회에서 계류하다 17대 국회 임기가 만료되면서 자동 폐기됐다. 개정안은 18대 국회 때인 2008년 10월 이명박 정부에 의해 다시 제출됐지만 거의 3년간 논란을 거듭하다 2011년 3월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은 지난해 4월부터 시행됐다. 입법 예고돼 시행되는 데 6년이 걸린 셈이다.
물론 개정안에 찬성하는 학자도 많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최근 상법·경제학·경영학 전공 교수 5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78%(39명)가 개정안에 찬성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김우찬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내 기업은 지배주주에 의해 이사회가 종속돼 있어 대주주 견제와 감독, 소수 주주 보호가 미약하다”며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은 대선 이전에 증명이 됐는데 아무것도 고치지 말자는 반대론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감사위원 분리 선출, 집행임원제 의무화, 집중투표제 간접 의무화, 전자투표제 일부 의무화, 다중대표소송 도입이다. 재계는 이를 모두 반대한다.
현재 자산 2조원 이상인 상장회사는 감사를 대신해 감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감사위원회 위원 3분의 2 이상은 사외이사로 선임해야 한다. 여기에 적용되는 기업은 지난해 말 현재 146곳이다.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는 지배주주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대주주의 의결권을 소유 주식의 3%로 제한한다.
하지만 현행상법은 대주주 의결권 제한이 없는 이사를 먼저 선출한 후 선출된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을 선임하는 일괄 선출방식이기 때문에 3% 의결권 제한 규정이 무의미하다는 게 법무부 판단이다. 개정안은 감사위원을 이사와 분리해 선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감사위원회 독립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재계는 “감사위원 선임에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은 회사 경영의 핵심인 이사 선임에도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경영권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반발한다. 또한 외국계 또는 해외펀드의 경우 지분 쪼개기를 통해 3% 의결권 제한 규정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국내 대주주라고 주장한다.
재계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입법”집행임원제에 대해선 ‘충분한 검증이 없는 상태에서 도입을 강제하는 것은 기업에 위험한 실험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집행임원제는 감독 기능을 하는 이사회와 별도로 기업 업무만 전담하는 임원을 두는 제도다. 이 제도는 2011년 3월 상법 개정 때 도입됐지만, 각 기업이 자율 선택하도록 했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의무화로 바꿨다. 이사회는 감독형 이사회 역할을 하고, 전문경영인인 집행임원은 업무 집행을 담당해 경영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일부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이 제도가 대기업 총수의 전횡을 견제하고 소유·지배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재계 시각은 다르다. 업무 집행과 감독의 분리로 이사회가 업무 집행에서 배제되면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져 경영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는 집행임원제는 최대주주의 경영권을 합법적으로 빼앗겠다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 반발한다.
집중투표제 확대와 전자투표제 의무화도 논란거리다. 집중투표제란 ‘1주(株) 1표’와 달리, 가령 이사 3명을 선임할 때 1주당 3표를, 4명을 뽑을 땐 4표를 주고 한쪽으로 몰아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이러면 상대적으로 지분이 적은 소액주주가 자신들이 원하는 이사를 선임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집중투표제를 통해 이사회의 구성이 다양해지고 경영 투명성이 제고될 것이라고 본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 상장회사의 4.8%가 이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재계는 주요 국가 중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는 나라는 없다고 강조한다. 또한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이사들이 이사회를 구성하게 돼 기업의 신속한 의사 결정에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다중대표소송제 역시 문제가 많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이 제도는 자회사 임원이 자회사에 손해를 끼칠 경우 모 회사 주주가 해당 이사를 상대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재계는 외국계 투기 자본이 이 제도를 활용해 악의적 소송을 제기하고, 이를 계기로 경영권에 개입할 여지를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자투표제를 의무화하는 법안에 대해선 기술적 오류 발생 가능성, 악의적 루머 등으로 투표 결과가 왜곡될 가능성을 우려해 반대한다. 재계는 전자투표제를 강제하는 나라는 대만뿐이고 대부분 국가는 기업 자율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재계가 ‘헌정 질서’까지 언급하며 집단 반발하는 상법 개정안은 누가 만들었을까. 10일 열린 공청회에 참석한 김재호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전문위원은 “상법 개정안이 통과돼 국가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문제가 생기면 상법 개정을 주도한 교수들이 책임질 거냐”고 말했다. 법무부는 그동안 “올 3월부터 기업지배구조 상법개정위원회를 발족해 운영했다”면서 “경제부처소속 정부위원과 관련 전문분야 학자가 참여했다”고만 밝혔다.
정부에서는 법무부 상사법무과, 기획재정부 기업환경과, 금융위원회 자본시장과 과장이 참여했고,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과장급 한 명이 파견됐다. 그렇다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전문 분야학자는 누굴까. 취재 결과 5명의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교수들이 참여했다.
정찬형(고려대)·정경영(성균관대)·심인숙(중앙대)·안수현(한국외대)·천경훈(서울대) 교수다. 8월 30일 정년 퇴임한 정찬형 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위원장을 맡았다. 정 교수는 2000년대 초부터 이번 개정안의 쟁점 중 하나인 전자투표제 도입을 주장해 왔다.
한국상사법학회장, 법무부 법무자문위원 등을 역임한 그는 2006년 법무부 상법(회사편) 개정위원회 제1소위원장을 맡는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 관련 활동을 활발히 했다. 2009년 말에는 상법 개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칼럼을 일간지에 쓰기도 했다.
정경영 성균관대 교수는 정찬형 교수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전자투표제 도입을 주장했다. 관련 논문도 썼다. 6월 중순 열린 상법개정안 1차 공청회에서 주제 발표자로 나서기도 했다. 심인숙 중앙대 교수는 법무법인 세종·지평지성·김앤장 변호사를 거쳐, 2004년부터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일했다.
2005년 중앙대 법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사외이사, 국민권익위원회 행정심판위원, 금융위원회 비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증권법 분야 전문가로 꼽힌다. 천경훈 서울대 교수는 사법연수원 26기 수석 수료자로, 김앤장 소속 변호사로 일하다가 2010년 중순 서울대 조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인수합병(M&A) 분야에 특히 밝다는 평이다.
안수현 한국외대 교수는 금융위원회·법무부·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위원회 활동을 많이 한 상법 전공 교수다. 기업의 내부 통제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문을 많이 썼다. 안 교수는 법무부가 상법 개정안 입법 예고를 발표하기 이틀 전 한 일간지에 시평을 쓰기도 했다. 시평에서 그는 이번 상법 개정안을 ‘경영 투명화 및 소액주주 보호 방안’이라고 규정한 후 이런 글을 남겼다.
개정위원회에 정찬형·정경영·안수현 교수 참여‘일부 대기업들의 눈부신 해외 영업성과에도 정부는 왜 대기업의 지배 구조를 신뢰하지 못하고, 지배구조 상(像)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동안 많은 개선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내 기업의 자발적 개선 노력은 그다지 이뤄지지 않았다. 경영자를 감독하는 이사회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으며 소액주주 보호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다수다.
비록 강력 처방책으로 변화를 요구하는 정부의 시도가 매끄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내용이 2006년부터 지속적으로 논의됐음에도 기업의 자발적 변화가 얼마나 되었을까. 대규모 기업들의 적극적인 변화 의지가 시장에 전달되는 것이 법적 강제를 낮추는 길이 될 것이다.’ 상법개정위원회 분위기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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