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동북아 정치·경제 지형도 - 美·日 밀착에 中 거대시장으로 맞서
격변의 동북아 정치·경제 지형도 - 美·日 밀착에 中 거대시장으로 맞서
동북아시아를 움직이는 지각판은 크게 세 개다. 미국·중국·일본판(板)이다. 최근 지각판의 형세를 요약하면 이렇다. 사방으로 세를 확장하던 중국판의 관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미국판은 예전자리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곁에서 일본판은 중국판 아래를 파고들며 횡으로도 세력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아시아 중시 전략(Pivot to Asia), 일본의 아베노믹스와 ‘자유와 번영의 활’ 전략에 뿌리내리고 있는 집단 자위권 확대 해석 등은 밀고 내려오는 중국판을 에워싸는 과정에서 정치·경제학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미국·일본·호주·말레이시아·베트남 등 아시아태평양 12개국이 참여한 TPP협상은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 경제블록 탄생을 의미한다. 관세철폐와 자유무역을 통한 상호이익 증진을 기치로 내건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참여하는 나라 수만큼이나 개방 분야별 이해관계도 첨예하게 얽히고 설켜 있지만 12개 국가는 연내 타결을 목표로 협상을 진행 중이다.
형세로는 팽창하는 중화 경제권을 에워싸는 연대전선의 모양이다. 중국이 원한다면 협상 테이블에 자리 하나를 내줄 생각이지만 중국 입장에선 미국이 짜놓은 판에 들러리 서는 것 같아 못 마땅하다. 미국의 군사외교 측면에선 기존 동맹국과의 전략적 공동방위 강화를 담은 아시아 중시 전략이 있다. 이는 TPP와 함께, 군사전략과 경제적 이해(통상전략)를 연계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대외전략 핵심이다.
美·日 주도의 환태평양 경제블록이를 고스란히 일본에 옮겨다 놓은 것이 아베노믹스와 집단자위권 확대 해석, 나아가 헌법 개정으로 이어질 대외팽창 전략이다. 아베노믹스가 외형상 내세운 목표는 일본의 디플레이션 종식이지만, 방법론에선 매우 팽창적 노선을 택하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세 가지 화살 중 핵심인 일본은행(BOJ)의 양적·질적 완화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는 실질금리를 떨어뜨려 일본 내 고여있는 자금을 위험자산과 해외로 뿜어내 엔 약세를 도모하는 게 본질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민관(民官) 자금은 직접 투자(FDI)와 공적 원조 형태로 인근 아세안 지역으로 스며든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일부 아세안 국가들이 아베노믹스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군사·외교적으로는 2006년 11월 외무상이던 아소 다로가 내놓은 ‘자유와 번영의 활’ 전략을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이 전략은 일본을 중심으로 호주·아세안·인도·중동·북아프리카·유럽을 연결하는 횡적 연대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도상에는 길다란 활 모양으로 나타난다. 이 활이 견제하는 것은 당연히 중국의 남동진(南東進)이다.
자민당 정권 출범후 아베 총리는 자신의 공약대로 미국과 정치·경제·외교 면에서 ‘샴쌍둥이’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재정 문제에 봉착한 미국으로서도 아시아 주둔군 유지에 따른 비용을 일본이 덜어준다니 반갑기도 할 것이다. 미국 정치권이 아베 총리의 군비 증강과 집단자위권 확대 해석을 내심 지지하는 이유다.
이 같은 밑그림 때문에 10월 7일~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동북아시아의 세 지각판이 아세안을 둘러싸고 힘겨루기를 벌이는 양상을 띨 것이라 예상됐다. 집안 문제(정치권의 재정협상 문제)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이 불참하면서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우리에겐 중국의 전략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최근 일본이 아세안 국가들을 포섭하기 위해 저리의 엔 자금을 살포하고 다녔다면 이에 맞서는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메가마켓 파워’를 내세워 주변국을 끌어당기고 있다. 이번 APEC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잇따라 방문한 시진핑 주석은 아세안 국가들과의 교역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경제·정치·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교류를 확대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APCE 회의장에서도 시 주석은 “향후 5년 간 중국의 수입액은 10조 달러를 넘어설 것이고, 해외 투자는 50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다. 이는 세계 경제에 자양강장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환태평양경제블록(TPP)을 완성하려는 오바마와 아베에 맞서 중국이 주변국에 던진 화두는 ‘지는 해와 뜨는 해를 구분하라, 어느 시장이 여러분의 제품을 더 많이 사들일지 따져보라’는 거였다.
사실 미국과 일본이 성공적으로 아세안과 손을 잡는다 해도 장기적으로 아세안은 중국 시장의 중력에 빨려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아세안 국가들 입장에서 일본이 주는 돈은 “고맙다”며 받겠지만 길게 봐서는 자기네 물건을 사줄 나라가 어딘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일본 내수시장이 중국만큼 커진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물론 미국이라는 거함을 대체하기엔 중국의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최근 시리아 사태에서 보여준 미국의 무기력함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의 내수시장은 세계가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극화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인도는 중·러와 협력 강화국제 동맹 관점에서 촘촘해진 미·일 동맹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다. 시진핑 집권 이후 빈번해진 중·러 합동군사훈련이나, 중동 사태에 대한 일치된 목소리를 통해 양국 관계는 한층 돈독해졌다. 여기에서 한발 나아가 최근 눈길을 끄는 건 인도와 러시아의 밀월관계 복원 조짐이다. 이미 중국과 러시아는 한배를 탔지만, 인도는 경제적 이익 공유에는 동참하되 외교적으로는 한 발짝 비켜 선 태도를 취해 왔다.
최근 루피화 환율 출렁임 등 금융 불안으로 쓴 맛을 본 인도가 러시아와 가까워지려는 것은 1차적으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 확보가 목적이다.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와 LNG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한편 인도 내 천연가스 개발 및 파이프라인 사업에 러시아 자금을 끌어오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향후 국제 정치 무대에서도 러시아-중국 연대에 조금 더 친밀감을 내비쳐야 할 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10월 21일로 예정된 만모한 싱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눈 여겨 봐야 한다. 지난 20년 간 소원했다면 소원했을 수 있는 두 나라 관계가 일시에 거리 좁히기에 들어갈 수 있다.
사실 1991년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경제시스템은 소비에트 경제모델을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에너지 등 유틸리티 부문의 가격 통제와 보조금 지원, 금융의 핵을 이루는 국유은행 시스템, 5개년 단위의 중앙 경제계획 등은 아직도 그 시절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당시 금융위기를 맞은 인도는 어쩔 수 없이 서구의 요구대로 시장을 개방하고 금융시스템 내 소비에트적 색채를 빼야 했다. 올해 서구 자본의 루피화 공격은 큰 틀에서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중국과 러시아가 인도를 성공적으로 끌어들인다면 동북아 정세는 한층 흥미로워질 것이다.
한국 정부로선 어느 때보다 복잡한 외교 지형에 직면했다. 우물 안 정치 놀음에 빠져 있기엔 나라 밖의 물살이 거세다. 세계사에 획을 그을 대전환기를 맞고 있음을 정신차리고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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