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오락가락’ 경제팀은 ‘우왕좌왕’
정책은 ‘오락가락’ 경제팀은 ‘우왕좌왕’
‘민생경제 회복과 창조경제 구현’. 지난해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1577만표를 얻어 당선한 박근혜 대통령이 올 3월 말 밝힌 정부경제정책의 큰 방향이다. 박근혜정부는 임기 1826일 중 15% 정도를 보냈다. 정책을 시행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칠 때까지 시차를 감안할 때, 그동안의 경제지표만 놓고 평가하긴 이른감이 있지만 ‘기대 이하’다. 회복세를 보이는 선진국 경제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오락가락하는 정책에 우왕좌왕하는 경제팀, ‘네 탓’ 공방만 벌이는 정치권과 행정부…. 서민의 삶과 기업 환경은 짙어진 미세먼지처럼 앞날을 가늠하기 어렵다.
“뭐 한 게 있어야죠?” 박근혜정부 경제정책 1년을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많은 경제학자와 민간경제연구소 연구원들의 반응은 대개 이랬다. 한국금융연구원 소속 연구원은 “새 정부에 평가할 만한 경제정책이 있었느냐”고 뼈있는 반문을 했다. “평가를 유보하겠다”는 답변이 많았다. 질문에 헛웃음을 짓는 경제학자도 있었다. 박근혜정부 경제팀에 대해선 냉소적인 반응이 많았다.
한 사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유불여무(有不如無) 아니겠느냐”고 했다. ‘있어도 없는 것 같다’ ‘있으나 마나 하다’는 뜻이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정부 재정·통화정책을 평가하기엔 이른감이 있다”면서도 “경기 방향이나 심리를 바꿀 만한 과감한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경제 라인이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아직 기업이나 가계 등 경제 주체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며 “경제는 심리인데 정부만 경제 상황을 좋게 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경기회복세 진전은 정부의 희망사항?전반적인 평가는 인색했다. 종합하면 이렇다. ‘정책은 오락가락했다. 경제팀의 경제 상황 인식은 안일했다. 정책 조정 기능은 미흡했고 국회를 설득할 리더십은 부재했다. 실체가 모호한 경제민주화나 창조경제를 모두 잡겠다고 우왕좌왕했다. 기업은 기업대로, 가계는 가계대로 불만만 쌓인 한 해였다. 오죽하면 경제팀 경질·교체 얘기가 끊임없이 나오겠는가?’
정부 인식은 사뭇 다르다. 경제는 좋아지고 있는데 국회가 발목을 잡는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럼에도 부총리나 경제부처 장관이 야당 의원들을 만나 설득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경기 진단 역시 기업·가계와는 거리가 있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현재 국내 경기가 장기 침체에 빠졌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여러 경제 지표에서 턴 어라운드 징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11월 28일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열린 제3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1차 회의 때와 비교하면 성장·고용·수출 등 여러 측면에 회복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그린북(최근 경제동향)에서 ‘민간 부문 회복세가 견조하지 않지만, 우리 경제의 회복 조짐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획재정부가 회복 강화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올 들어 처음이다. 그 전에는 ‘회복 조짐(8월 그린북)’, ‘완만한 개선(9월 그린북)’ 등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좀 더 지나봐야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정부는 2분기 또는 3분기에 국내 경기가 저점을 통과한 것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박 대통령이 말한 국민경제자문회의 1차 회의는 올 5월 29일 열렸다. 그때와 최근을 비교해 보면, 경기회복세 진전은 정부의 희망사항처럼 보인다. 기업경기실사지수(BSI)와 소비자동향지수(CSI)를 합산해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경제심리지수(ESI)는 5월이나 11월 모두 94다. 100 이하면 경제를 안 좋게 보는 사람이 과반수라는 뜻이다.
제조업 BSI는 5월에 80에서 11월에 78로 하락했다. 경제활동 참가율이나 고용률은 제자리고 청년 실업률은 오히려 소폭 늘었다. 명목임금 증가율은 5월에 비해 약간 감소했다. 10월 광공업생산지수는 11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지만 재고지수와 어음부도율도 증가했다.
소비자 물가지수는 너무 낮아서 걱정일 정도다. 11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0.9% 올랐다. 지난 9월 14년 만에 처음으로 0%대 물가상승률을 보인 후 석 달째 초 저물가를 이어가고 있다. 일각에선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3분기 수출은 전분기보다 1.3%, 수입은 0.6% 줄었다. 소비 부문도 나아진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백화점·할인점 매출이나 휘발유 판매량, 신용카드 국내 승인액 등이 모두 감소 추세다. 시중에 도는 통화량(M2·광의통화)도 5월에 비해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가계는 소득이 조금 늘었지만 부채가 더 늘었다. 정부·가계·기업이 진 빚은 3분기 현재 3600조원에 육박한다. 1년 새 6%(210조원)가 늘었다. 현재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경기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거의 제자리 걸음이다. 10월 경기동행지수는 99.1로 18개월 연속 100 이하다. 1차 회의가 열린 5월 29일 코스피 지수는 2001포인트였는데, 12월 6일 종가는 1980포인트다. 경상수지는 올 10월까지 21개월째 흑자행진을 이어갔지만, 수출 증가보다 수입감소가 더 큰 ‘불황형 흑자’였다.
단기간 실물지표를 놓고 정부 경제팀만 탓할 수는 없다. 현오석 부총리가 “올해의 정책 효과가 내년에 시차를 두고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정작 큰 문제는 경제 주체인 기업·가계가 정부 경제팀을 불신한다는 데 있다. 정책 기조는 흔들렸고 경제팀은 우왕좌왕했다. 하도급법 강화, 일감 몰아주기 엄벌, 공정위 전속고발권 폐지 등 서슬 퍼렇게 추진한 경제민주화 정책은 집권 1년 차 후반부로 갈수록 흐지부지됐다.
경제활성화로 정책 노선을 바꿨지만, 법무부가 8월에 입법예고한 다중대표소송제·집중투표제·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을 포함한 상법 개정안이 처리될까 재계는 초조해 한다. 통상임금 확대, 중소기업 적합 업종 지정, 공정거래법 강화, 과도한 세무조사 등에 대한 불만도 팽배하다.
기업·가계 모두 불만 팽배특히 세정당국의 저인망식 세무조사에 대·중소기업 할 것 없이 불만을 터뜨린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준비해 8월 발표한 세법 개정안은 누진과세 강화, 넓은 세원 확보 등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평가에도 샐러리맨들의 역풍을 맞으면서 발표 사흘만에 대통령이 나서 원점 재검토를 지시하는 등 망신을 당했다.
핵심 공약이던 기초연금 확대는 반대 여론에 부딪혀 후퇴했다. 네 차례 걸쳐 내놓은 부동산 대책에도 아파트 매매 시장은 살아나지 않고, 전국 아파트 전셋값은 66주 연속 올랐다.
급기야 정부는 12월 3일 연 1%대 저금리 모기지(장기주택담보 대출) 제도 시행을 발표했지만 ‘빚 내서 집 사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저렴한 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면 추진한 행복주택 계획은 삽도 뜨지 못하고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렌트 푸어, 하우스 푸어’ 구제 대책이라며 내놓은 목돈 안 드는 전세 대출 대책도 사실상 실패했다.
손톱 밑 가시를 뽑겠다고 했지만 규제는 오히려 늘었다. 규제개혁위원회에 등록된 규제는 지난해 말 1만4927개에서 현재 1만5067개로 오히려 140개 늘었다. 기획재정부 소관 규제는 6개, 창조경제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 소관 규제는 5개 증가했다.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관련 규제는 13개 늘었다.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는 고용률 70% 달성 공약 역시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네덜란드 모델을 벤치마킹한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늘리면 2017년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는 게 정부 주장이다. 현재 국내 고용률은 64.2%. 지난 10년 간 1%도 채 오르지 않았다. 70%를 달성하려면 새 일자리 200만개가 필요한데 현재 경제 구조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고용노동부 이재흥 고용정책실장은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고용률 70% 수치에 집착해 진행하는 사업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정부는 부처별로 얼마나 시간제 일자리를 창출했는지 2주마다 평가·점검하고 있다. 자칫 수치를 채우려다 나쁜 일자리만 양산할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일각에선 고용률 70% 공약을 ‘제2의 747(이명박 대통령의 7% 경제성장률,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경제대국) 공약’에 빗대 공허하다고 비판한다.
박근혜정부의 경제 어젠다 셋팅(의제 설정)도 실패했다는 평이 많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 15년 만에 경제관계장관회의를 부활시키며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라는 거대 어젠다를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개념 모두 국민을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10월에 19세 이상 남녀 2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은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 용어는 들어봤지만 내용은 잘 모른다’고 답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이 국내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한 최근 설문조사에서도 42%는 ‘창조경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창조경제를 들어봤다는 응답자 중 67%는 ‘들어는 봤지만 내용은 모른다’고 답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평가도 인색하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최근 실시한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 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제민주화 정책에 대해 응답자(1000명)의 39.7%는 C학점을 줬다. B학점은 29.5%, A학점은 5.5%였다. 또한 ‘박근혜정부 경제정책이 중소기업 중심’이라는 응답은 14.5%에 불과했다. 지난 3월 같은 조사보다 20%포인트 넘게 줄었다.
중소기업마저 경제민주화 법안에 피로를 호소한다. 11월 말 중소기업중앙회는 일감 몰아주기 과세, 상법 개정안,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범위 확대, 화학물질 등록·관리제, 환경오염 피해 구제 등 중소기업에 부담을 주는 과잉 입법을 완화해 달라는 건의서를 국회에 전달했다. 대기업도 불만이 팽배하기는 마찬가지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10월에 기업 CEO와 임원을 상대로 새 정부 출범 후 기업 경영환경 변화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2.5%는 ‘달라진 게 없다’고 답했다. 22.6%는 ‘악화됐다’고 답했다.
중소기업도 경제민주화 법안에 피로 호소호평을 받은 정책이 없는 건 아니다. 4월 17조원 추가경정예산 편성, 5월 벤처창업 자금 생태계 선순환 방안, 수출 중소·중견기업 지원확대, 7월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 11월 중소기업 재도전 종합대책은 방향을 잘 잡았다는 평가가 많았다. 5월부터 세차례에 걸쳐 발표한 투자 활성화 방안도 진일보했다는 평이 우세하다. 신흥국 위기설에도 한국 자본시장에 외국인 자금이 몰리는 등 대외 위기관리 능력도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는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 경제팀은 출범 이후 내내 교체·사퇴 압력을 받았다.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도 경제팀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올 중순에는 새누리당에서 현오석 부총리와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 사퇴 주장까지 나왔다. 9월 국정감사 때는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이 “바깥에서 보기에 경제팀은 답답하기 그지 없다”고 질타했고, 11월 21일부터 이틀간 열린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에서는 새누리당 김태원 의원이 “현 경제팀이 아직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말했다. 같은 당 서병수 의원은 “정부 스스로 경제 살리기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부총리 체제가 부활했지만, 컨트롤 타워 역할은 미흡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정책 조율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부처 간 혼선도 많았다. 기초연금 논란을 둘러싸고 진영 복지부 장관이 사퇴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치력은 부재했다. 1년 내내 국회에 발목이 잡혔다. 정부가 아무리 잘하려 해도 국회가 움직이지 않으면 허사다. 이럴 땐 청와대 경제수석이나 경제 부총리가 나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지만 그들은 국회 탓만 했다.
현오석 부총리는 12월 3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예산안과 경제법안 처리가 지연되면 경제회복이 늦어질 뿐 아니라 대외 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며 “올해 경제 활성화와 국정 과제 이행을 위한 100여 건의 경제 분야 법안들이 심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국회는 정쟁에 몰두하고 정부는 국회 탓만 하면서 올해 정기국회 석 달 동안 단 한 건의 법안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내년에도 올해 같은 일은 반복된다면 결과는 뻔하다. 현 부총리 말대로 내년은 ‘정상 성장궤도로 턴 어라운드 하느냐, 반짝 회복 후 다시 저성장 늪에 빠지느냐 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정부가 사활을 걸고 국회와 담판을 짓든, 2기 경제팀을 구성해 분위기를 전환하든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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