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MEDIA - 리얼리티 TV가 ‘리얼’하다고?
culture MEDIA - 리얼리티 TV가 ‘리얼’하다고?
리얼리티 TV의 주라기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998년. 미국의 리얼리티 TV 스타 아이린 맥기는 출연 중이던 프로 ‘리얼 월드: 시애틀(The Real World:Seattle)’에서 도중하차했다. 맥기가 촬영 현장을 빠져 나와 친구의 자동차에 오르자마자 스티븐 윌리엄스(그녀와 한 집에 살면서 이 프로에 참여하던 출연자 중 한 명으로 동료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던 인물이다)가 달려와 그녀의 뺨을 때렸다. 이 사건은 “세계에 울려 퍼진 따귀’로 유명해졌다.
그 장면은 당시 리얼리티 TV 재방송 프로와 뉴스에서 수없이 다시 방영됐으며 지금도 유튜브에 올라 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맥기는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장면은 그 해 케이블 TV에서 최고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내가 카메라 앞에서 따귀를 맞은 일로 유명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리얼 월드’ 제작진은 맥기가 라임병 때문에 프로를 그만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떠난 이유는 프로 전체가 처음부터 철저히 조작됐기 때문이었다. 이 프로는 극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내려고 사람들을 비열해 보이게 만들었다.
매 시즌 기존의 TV 드라마 스토리 라인에 충실하게 구성됐으며 여기에 가십 거리가 될 만한 요소가 많이 첨가됐다. 여기서 중요 한 단어는 ‘구성(construct)’됐다는 말이다. 리얼리티 TV는 논픽션을 가장한 픽션이다. 실생활에서 픽션과 논픽션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을 겨냥한다.
이것은 서커스나 영화처럼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오락이다. 이 조작된 현실을 시청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제작자들은 대체 시청자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또 출연자들은 실제로 맥기와 한 집에 살던 동료들처럼 프로그램에서 설정한 대로 얄팍하고 변덕스럽고 비열한 성격으로 변해갈까?
현실보다 더 그럴 듯한 이야기 구성현재 리얼리티 TV의 스타들은 온갖 미국적인 요소를 총망라한다. 고급 향수 라인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구릿빛 피부의 LA 주부가 있는가 하면 매 순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업하는 아칸소의 게잡이 어부도 있다. 플롯과 구성은 달라도 리얼리티 TV는 모든 사람을 환영한다. “모든 리얼리티 TV 프로의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는 결점이 있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경의를 표한다는 점”이라고 오하이오 주립대의 명예 심리학 교수 스티븐 라이스가 말했다. “그것이 리얼리티 TV가 내세우는 핵심 가치다.”
여기에 리얼리티 TV의 근본적인 매력이 있다. 모든 프로그램이 결함을 지닌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이 현실적인 결함들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비현실적인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렇게 “과장된 결함을 지닌” 캐릭터들이 환상과 흥분, 극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시청자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동시에 시청자 역시 결함을 지닌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the Mind Works)’를 집필한 저명한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이런 현상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단점과 그들이 서로를 부당하게 이용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고 핑커는 말했다. “영향력 있고 유명한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일수록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하지만 핑커가 지적하듯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든 리얼리티쇼든 잘 쓰여진 픽션의 특징은 관객이 논픽션과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리얼리티 TV의 등장인물들이 때때로 연극 배우처럼 행동하도록 조작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리얼리티쇼 ‘오스본 가족(The Osbournes)’(MTV)의 대본을 쓰고 ‘농구선수의 아내들(Basketball Wives)’(VH1)의 공동 책임 프로듀서를 맡았던 트로이 디볼드는 A.V.클럽(미국 대중문화 사이트) 인터뷰에서 실생활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술에 관해 말했다.
“예를 들면 어떤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에게 이렇게 요청할 수도 있다. ‘여러분, 지난 목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화를 나눠주세요. 여러분의 생각이 왜 이전과 달라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시청자들에게 이 장면을 이해시킬 수가 없어요. 카메라 밖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제작진은 프로그램에서 원하는 분위기와 줄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캐스팅 과정에서 다양한 자극과 반응을 통해 출연자를 선발한다. 일례로 맥기가 ‘리얼 월드’ 오디션에 참가했을 때 한껏 멋을 낸 20대 응시자가 4만 명이나 몰렸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오디션장에 갔던 맥기는 응시자들이 늘어선 긴 줄을 떠나 나무 밑으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 앉아 중간고사 시험 공부를 했다. “다른 응시자들이 인터뷰를 하려고 줄을 서 있을 때 난 반대쪽으로 갔다”고 그녀는 말했다.
맥기는 자신이 건방진 태도 덕분에 캐스팅됐다고 믿는다. 프로듀서들은 실생활을 흉내내 일관된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뛰어난 기술을 습득했다. 극적으로 구성된 이 이야기들은 실생활의 모방에 불과하지만 꽤 그럴 듯한 현실로 받아들여진다. 이성적인 성인들은 어떤 프로를 얼만큼 시청할지 본인의 판단으로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는 청소년들이 현실을 가장한 그럴 듯한 리얼리티쇼에 노출될 경우엔 누군가 그 정도를 조절해줘야 한다. 라이스 교수의 말대로 “드라마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조작된 ‘현실’이 현실을 능가할 때2011년 실시된 한 조사에서 11~17세의 미국인 소녀 1100여 명에게 그들의 생각과 리얼리티 TV 시청 습관에 관해 물었다. ‘저지 쇼어(Jersey Shore)’ ‘프로젝트 런웨이(Project Runway)’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 ‘더 힐스(The Hills)’ 등의 리얼리티쇼를 자주 보는 그룹은 그렇지않은 그룹에 비해 이들 프로그램에서 옹호하는 가치관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얼리티쇼를 자주 보는 소녀들은 그렇지 않은 소녀들과 비교할 때 또래 간의 관계에 대한 기대와 자기 이미지, 세계 정세에 관한 이해 측면에서 큰 차이가 났다”고 연구원들은 말했다.
리얼리티쇼를 시청하는 소녀들은 그렇지 않은 소녀들에 비해 여자 아이들의 관계에서 남의 소문을 퍼뜨리는 행동이 정상적이라고 받아들이는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 악의적이며 경쟁적인 것이 여자 아이들의 본성이라고 여겼으며 “다른 여자 아이들을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또 비열하고 남을 속일 줄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리얼리티쇼를 시청하는 그룹 37%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시청하지 않는 그룹 중 그렇다고 답한 경우는 24%에 불과했다.
또 2011년의 한 마케팅 관련 조사에서는 ‘아메리칸 아이돌’과 ‘비기스트 루저(The Biggest Loser) ‘저지 쇼어’ ‘리얼 월드’ 등의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청소년들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자신을 더 인기 있고, 매력적이며, 학업성취도가 높다고 여기는 것으로 드러났다.
1970년대 이후 아동의 TV 시청에 관한 비판적인 조사가 계속됐지만 리얼리티 TV는 별도로 취급돼야 한다. 위스콘신대의 카린 리들과 J J 디시몬은 ‘스누키 효과(A Snooki Effect? An exploration of the surveillance sub-genre of reality TV and viewers’ beliefs about the “real” real world)’라는 제목의 포괄적인 최근 연구에서 145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TV 시청 습관과 현실의 개념에 관한 조사를 실시했다. 연구팀은 “개인의 ‘진짜’ 생활 경험을 중심으로 제작됐다”는 인기 리얼리티쇼 15편 중 한 편의 시청 빈도를 기준으로 참가자들을 분류했다.
‘더 힐스’ ‘저지 쇼어’‘라구나 비치(Laguna Beach)’등의 프로와 ‘진짜 주부들(The Real Housewives)’‘리얼 월드’의 아류 작품들이 포함됐다. 이들 프로그램은 “관계적 공격성(relational aggression)이 많이 드러나며” 여성을 묘사할 때 “우정을 저버리고, 남의 험담을 하고,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으로 그리는 경향 때문에 선택됐다.
조사 대상자들에게 미국의 이혼율과 “소문 퍼뜨리기를 즐기는” 남녀의 비율,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남녀의 비율을 추측하도록 했다. 또 미국인 중 컨트리 클럽에 등록된 사람과 배우자를 배신하는 사람, 집에 넓은 욕조를 갖춘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도 추측하도록 했다.
리얼리티쇼를 자주 시청하는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모든 종목에서 비율을 높게 추측했다. 리들과 디시몬은 “리얼리티쇼를 자주 시청하는 사람들은 외도와 이혼 등 결혼 불화의 비율을 지나치게 높게 추측했으며 남녀 관계에서 섹스(첫 데이트에서의 섹스, 여러 명의 섹스 파트너를 두는 경향 등)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리얼리티쇼를 많이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제작자들이 만들어낸 현실과 진짜 현실의 차이를 더 근소하게 본다. 그들은 환상에 열광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무죄판결에도 무거운 책임감”…떨리는 목소리로 전한 이재용 최후진술은
2中 “엔비디아 중국에서 뿌리내리길”…美 반도체 규제 속 협력 강조
3충격의 중국 증시…‘5대 빅테크’ 시총 한 주 만에 57조원 증발
4이재용 ‘부당합병’ 2심도 징역 5년 구형…삼성 공식입장 ‘無’
5격화하는 한미사이언스 경영권 갈등…예화랑 계약 두고 형제·모녀 충돌
6“이번엔 진짜다”…24년 만에 예금자보호 1억원 상향 가닥
7로앤굿, 국내 최초 소송금융 세미나 ‘엘피나’ 성료
8카드사들, 후불 기후동행카드 사전 신청받는다…사용은 30일부터
9카카오페이증권, 간편하고 편리한 연금 관리 솔루션 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