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 달라진 재벌 오너 양형 기류 - 죄질(횡령·탈세 등) 나쁜 재벌 오너는 역시 엄벌
Issue | 달라진 재벌 오너 양형 기류 - 죄질(횡령·탈세 등) 나쁜 재벌 오너는 역시 엄벌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실형을 살게 됐다.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2월 27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회장(54)에 징역 4년을, 동생 최재원(51) 부회장에게 징역 3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코노미스트는 2월 17일에 발행된 1225호 커버스토리에서 재판부가 최태원 회장에게 엄정한 판결을 내릴 것으로 분석했다. 재판부가 과도한 배임죄 적용에는 관대해진 반면 개인적 치부를 목적으로 한 횡령·탈세 등 죄질이 나쁜 범죄에 대해서는 단죄할 것이라고 봤다. 최 회장에 대한 판결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경제민주화보다 경제활성화에 무게가 실리면서 재벌 엄벌주의에 대한 기류가 엄벌과 선처로 나뉘고 있으며, 재판부가 좀 더 명백한 양형 기준을 적용할 것이란 전망이었다.
최근 거세진 경제활성화 바람에 힘입어 예전보단 재벌에 대한 선처가 예상되지만 죄질을 더욱 구체적으로 따지게 될 것으로 봤다. 사익을 취하지 않고 실제 손해를 발생시키지 않아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경제활성화의 간접적 혜택을 받았다면, 최 회장은 이에 대한 역풍을 받아 나쁜 죄질이 더 부각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이는 실제 재판부가 최 회장을 엄벌한 주요 이유였다.
최태원 형제 횡령죄 중시횡령·배임에도 질이 달랐다. 최 회장 형제와 김준홍(49)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 등은 2008년 SK텔레콤과 SK C&C 등 SK계열사로부터 펀드출자금 선지급금 명목으로 465억원을 빼돌렸다. 1심 재판부는 최 회장이 주식·선물 투자 등을 위해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는 점을 인정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동생 최 부회장은 여기에 공모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무죄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최 부회장 역시 공모한 것으로 보고 원심을 깨고 최 부회장에게도 징역 3년 6월의 실형을 선고한 뒤 법정 구속했다. 횡령 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된 김원홍(53) 전 SK해운 고문은 1월 28일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상고심에서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의 공모사실을 인정한 원심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고 판시했다. 최 회장 형제는 상고심에서 이 사건 핵심 인물인 김원홍 고문이 국내로 송환되기 전에 항소심이 이뤄졌기 때문에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전 고문은 검찰 수사가 시작될 무렵 해외로 도피해 기소 중지됐다가 항소심 선고 직전 대만에서 전격 체포돼 국내로 송환됐다. 최 회장 형제가 송환된 김 전 고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모습을 보인 것도 죄질을 따지려는 재판부의 심기를 건드렸을 수 있다.
오너 형제가 모두 구속돼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된 SK 그룹은 충격에 휩싸였다. 징역 4년이 확정된 최태원 회장은 2017년 9월까지, 최재원 부회장은 1심 구속기간 6개월을 제하고 2016년 9월까지 수감될 전망이다. SK 그룹은 특별사면이 없는 한 장기간 오너 부재라는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 SK그룹은 판결 직후 “그동안 많은 노력에도 우리의 소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해 참담하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밝혔다.
SK그룹은 그룹 집단경영체제인 수펙스추구협의회를 긴급히 개최하고 입장을 정리했다.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에 참석한) 모든 CEO들은 그룹 회장 형제의 경영공백 장기화가 본인들이 직접 진두지휘 했던 대규모 신규 사업과 글로벌 사업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며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기업 정착 노력, 글로벌 국격 제고 활동 등이 이번 선고로 중단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같이 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해외 자원 개발, 반도체 산업 같은 미래 성장동력 발굴이 더뎌질 것으로 보인다. 총수의 사업방향에 따라 적시에 거액의 투자가 집행돼야 하는데 최 회장 형제의 부재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2011년 브라질 원유 광구를 매각한 자금을 종자돈으로 신규 자원개발 사업에 뛰어들려던 SK 그룹의 계획은 무기한 보류됐다.
최 회장이 직접 나선 유럽 진출 전략도 지지부진해졌다. 터키 도우쉬 그룹과의 사업 협력에도 힘이 빠져버렸다. 기대를 모은 반도체 사업도 안갯속이다. SK하이닉스는 ‘시스템 반도체’를 신수종 사업으로 삼고 준비해왔지만 총수 부재로 대규모 투자를 집행할지 미지수다.
최 회장의 이번 실형은 유례 없는 SK의 위기다. 특히 최 회장뿐 아니라 동생인 최 부회장까지 구속돼 양대 오너가 장기간 경영일선에서 제외돼야 하기 때문이다. 오너 의존 성향이 강한 한국 재벌그룹의 CEO들이 사업 결정과 추진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대 오너를 대신할 마땅한 오너 일가 구성원이 없는 SK로서는 각종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동력을 잃었다.
최 회장이 실형을 받은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최 회장은 2003년 2월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같은 해 9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전에도 검찰은 최 회장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1994년 8월 당시 최 회장 부부가 20만 달러를 미국 캘리포니아주 11개 은행에 불법 예치한 혐의를 잡았다.
이후 1998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2003년 ‘SK사태’를 밝혀냈다. 이 때 최 회장과 손길승 SK그룹 회장 등이 배임과 증권거래법, 외부감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기소와 구속, 실형 선고 등 위기를 맞았지만 최 회장은 늘 풀려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기간의 실형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재판 앞둔 재계 오너들 긴장한편, 최 회장 형제의 판결을 지켜본 재계는 긴장하고 있다. 앞서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 등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나자 재벌에 대한 엄단 분위기가 완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최 회장 실형 판결로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졌다고 본다. 특히 최 회장과 비슷한 횡령 혐의로 기소된 이재현 CJ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사건에도 엄벌 기조가 유지될 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재현 회장은 조세포탈과 탈세, 횡령을 통한 비자금 조성 혐의로 기소됐다. 2월 14일 징역4년에 벌금 250억원의 1심 판결을 받고 2심을 기다리고 있다. 조석래 회장은 5000억원대 분식회계로 1500억원 규모 세금을 포탈하고 900억원대 횡령·배임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 같은 기조라면 횡령 혐의로 기소된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이나 1조원대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한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도 엄벌을 피하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역시 재판부로부터 실형을 선고 받으면 해당 그룹이 장기간 경영공백에 빠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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