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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THEATER - ‘상자 밖의 남자’ 바리시니코프

CULTURE THEATER - ‘상자 밖의 남자’ 바리시니코프

러시아라는 굴레에서 벗어났고, 발레라는 틀을 뛰어넘었으며, 영화와 연극을 넘나들며 실험적인 작품에 도전한다

발레 영화 ‘터닝 포인트’(1977)에서 레슬리 브라운과 공연하는 바리시니코프.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레퍼토리 극장 밖에서 한 무리의 여성이 미하일 바리시니코프(1974년 옛 소련에서 서방으로 망명한 세계적인 발레리노)를 기다리고 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라면 공연이 끝난 후 유명 배우의 사인을 받으려고 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다. 하지만 안톤 체호프가 시골이라고 불렀을 법한 캘리포니아에선 드문 일이다. 그 여성들의 연령대는 다양하다.

발레 영화 ‘터닝 포인트’(1977)에서 바리시니코프를 처음 알게 됐거나 1970~80년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 순회 공연에서 그의 라이브 발레 공연을 본 장년층부터 그를 TV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의 연인으로 기억하는 젊은 세대까지.

그들은 빅 댄스 시어터(Big Dance Theater)가 체호프의 단편소설 두 편을 바탕으로 만든 실험적인 작품 ‘상자 속의 사나이(Man in a Case)’에서 바리시니코프가 공연하는 모습을 막 보고 나온 참이다. 그 여성들은 이 공연에서 공중으로 사뿐히 날아오르며 춤추는 바리시니코프의 모습을 보지 못해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내색을 하진 않았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바리시니코프와 아침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대생들의 편지를 많이 받는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나를 보고 나서 내 발레 공연 비디오를 찾아 보거나 나에 관한 책을 읽은 사람들이다.” 바리시니코프가 말했다. “그들은 드라마를 통해 나를 알고 나서 내 발레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된다. 유튜브에서 ‘호두까기 인형’(1977년 바리시니코프가 겔시 커클랜드와 호흡을 맞춘 ABT의 전설적인 발레 공연) 동영상을 찾아 보고는 내 팬이 된다. 기분이 좋다.”

40년 전 여름 26세의 바리시니코프는 키로프 발레단의 일원으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순회 공연 중이었다. 당시 이미 서방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그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준다는 핑계로 KGB(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요원들의 감시를 따돌린 뒤 캐나다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그후 바리시니코프는 미국으로 귀화했다.

“내가 러시아를 떠날 당시 그곳은 현대예술의 원시 시대였다.” 바리시니코프가 통밀 토스트를 조금씩 베어 먹으면서 말했다. (남성들이여, 바리시니코프 같은 몸매를 원한다면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시라.) “난 매우 보수적인 발레단에서 일했는데 좀 더 넓은 무대로 뻗어나가고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언어를 써 보고 내가 무용가로서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바리시니코프는 뉴욕에서 혁신적인 무용의 세계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그는 제롬 로빈스, 앨빈 에일리, 트와일라 사프, 그리고 뉴욕 시립 발레단의 조지 발란신과 함께 일했다. (발란신은 러시아 태생이지만 ‘미국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곤 한다.)

“안무가로서 바리시니코프와 함께 일하는 것은 무용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안무와 공동연출을 맡은 애니-B 파슨의 말이다. “무용이라는 예술 분야가 지닌 특성상 무용에서 피카소처럼 걸작을 남긴 대가를 꼽기는 어렵다(발란신이나 머스 커닝햄 정도가 거론되기는 한다). 하지만 바리시니코프의 50년 무용 인생은 무용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말할 만하다.”

브루클린에 본부를 둔 빅 댄스 시어터는 문학작품에 바탕을 둔 작품을 주로 만들지만 결과는 들쭉날쭉 기복이 심하다. 버클리 레퍼토리 극장에서 ‘상자 속의 사나이’를 관람한 한 여자 관객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바리시니코프가 이 무용극단에 체호프의 단편 ‘상자 속의 사나이’와 ‘사랑에 관하여’를 바탕으로 자신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파슨은 어리둥절했다. “난 안무를 어떻게 짤까 생각하며 이 소설들을 읽었다. 하지만 정작 바리시니코프가 맡은 역할은 춤추기를 거부하는 캐릭터다.”

바리시니코프가 맡은 주인공 캐릭터는 벨리코프라는 교사다.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에 공포심을 느끼는 인물이다. 벨리코프는 삶의 무대에 나서서 사람들과 어울려 춤추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을 상자에서 끌어내려고 애쓰는 여성과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바로 이 대목이 이 이야기가 지닌 비극의 원천이며 여기서 바리시니코프의 해석이 시작된다.

“결혼 생활이 행복한 사람이라도 배우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고 숨막힐 정도로 좋아하게 될 때가 있다”고 바리시니코프가 말했다. “난 이미 60대에 들어섰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만(ABT의 발레리나 리사 라인하트가 그의 부인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까 늘 두렵다. 참 골치 아픈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벨리코프는 독신이다 …” 바리시니코프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 감정을 놓치지 말고 붙들라”는 것이 체호프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위대한 춤꾼 바리시니코프가 연기하는 캐릭터) 벨리코프가 춤을 안 추려고 하는 상황은 약간 우스꽝스럽게 비쳐진다. 바리시니코프는 벨리코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상자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기를 두려워한다. 상자 안의 삶이 매우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그는 덧신을 신고 앉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듣는다. 신은 그가 이 관능미 넘치고 자유분방한 여성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리시니코프는 극의 후반부에서 또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이 때 잠깐 탭댄스 스텝을 보여준다. 1인무를 끝내면서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러분이 바라던 일 아닌가!”라는 대사를 던진다. “아는 사람만 아는 농담”이라고 파슨은 말했다. “관객과 일부 비평가는 세월이 사람의 몸을 늙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그들은 바리시니코프가 30년 전에 했던 춤동작들을 지금도 보여주길 바란다.”)

“난 이 캐릭터가 나와 정반대라서 흥미를 느낀다.” 바리시니코프가 여전히 약간 서툰 영어로 말했다. “난 진보주의자인 반면 그는 파시스트에 가깝다. 그는 여성해방을 비롯해 어떤 종류의 진보적인 일에도 반대한다. 미국 의회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바리시니코프는 냉전의 절정기였던 1970년대 중반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미국식 사고에 이끌려 소련을 저버렸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공화당원들이 나를 자기네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바리시니코프가 말했다. 하지만 그가 절친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 중엔 펩시코의 전 사장 도널드 켄덜 등 부유한 보수주의자가 꽤 많다.

켄덜은 1959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 부통령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무역 박람회에서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상대로 이른바 ‘부엌 논쟁(Kitchen Debate, 박람회에 전시된 미국산 최신 가전제품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체제 옹호 설전)’을 벌일 때 닉슨 바로 옆에 서 있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2005년 바리시니코프가 바리시니코프 아트 센터 건립에 사재 100만 달러를 투자하자 켄덜은 “나도 그만큼 내놓겠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바리시니코프는 말했다. 바리시니코프와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 이견이 두드러지는 분야는 예술 쪽인 듯하다. “보수주의자들은 예술에서 늘 모종의 범죄를 찾아내려 한다”고 바리시니코프는 말했다. “예술의 의미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바리시니코프는 자신을 신인 연극배우로 보는 시각에 발끈한다. “사람들은 ‘아 이제 연극도 하시는군요!’라고 말하지만 난 1980년대에도 연극을 했다. 100%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카프카의 ‘변신’(브로드웨이)에 출연했고, 조앤 애컬레이티스(마부 마인스 극단의 설립자)와 함께 새뮤얼 베케트의 단막극 4편을 공연했다. 난 일부 배우들이 평생에 걸쳐 하는 만큼의 연극 공연을 이미 다 했다. 내게 많은 기회가 열려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뛰어든 작품도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하게 된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실수로부터도 배우게 마련이다.”

바리시니코프와 아침 식사를 하던 중 그가 자신과 “잘 통하는 사람(whisperer)”이라고 지칭하는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할리우드에서 연기 지도자로 활동하는 그녀는 ‘상자 속의 남자’를 아직 안 봤지만 이 무용극이 보스턴과 시카고를 거쳐 샌타 모니카 무대에 오르면 볼 예정이라고 했다. 바리시니코프는 이 작품이 끝나면 러시아 초현실주의 작가 다닐 카름스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2인극 ‘올드 우먼(The Old Woman)’(윌렘 대포와 공연)의 순회공연에 나선다.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로버트 윌슨이 연출한 이 연극은 2013년 파리에서 공연돼 찬사를 받았다.

“윌슨이 하는 일이 늘 그렇듯이 이 작업은 매우 어려웠다”고 바리시니코프는 말했다. “대포와 나는 광대처럼 얼굴에 새하얀 분칠을 하는데 분장에만 1시간 반이 걸린다.” 만화 캐릭터 검비를 연상케 하는 이 연극의 스틸 사진들을 보면서 버클리 레퍼토리 극장 앞에서 바리시니코프의 사인을 받으려고 기다리던 여성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윌슨은 공연 팀을 호령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한다. 매 순간 모든 것이 철저하게 연출된다. 바리시니코프는 보통 자신이 상황을 이끌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난 내 자신의 프로젝트를 만드는 게 좋다”고 그는 말한다. “막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다. 연출자들과 세부사항을 논할 때 그들이 나를 거북하게 여길 듯하다. 하지만 그게 내 모습이다. 바꾸기엔 너무 늦었다. 난 함께 일하기에 언제나 100% 기분 좋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은 어디까지나 일일 뿐이다. 적어도 그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그는 러시아식 표현을 써서 이렇게 말했다 “자녀의 세례식 때 부모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대부나 대모로 세울 필요는 없다.”(일로 만난 사람들과 사적으로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는 뜻인 듯하다.)

하긴 바리시니코프는 발레를 피겨 스케이팅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러시아에서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한 10대 시절부터 스타였다. 그는 러시아를 떠나온 뒤 한번도 돌아가지 않았고 그곳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다. “난 문화와 교육의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인이지만 라트비아 출신이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산 기간은 10년 남짓밖에 안 된다”고 그가 말했다.

바리시니코프의 아버지는 러시아 군대에 소속돼 있었다. 그를 예술에 눈뜨게 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는 처음 발레 공연을 보러 가서 막이 오르던 순간 ‘이게 바로 탈출구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나(난 그곳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는 러시아를 조국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난 그 나라가 내게 맞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했다. 러시아는 결코 내가 살 만한 곳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교육, 그리고 예술과 문화에 대한 사랑 등 러시아가 자신에게 준 모든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보다 상자 밖으로 뛰쳐나온 자신의 결단과 행동을 더 고맙게 여긴다. “난 언제나 자유로운 세계인이 되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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