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위기는 천재 아닌 인재
네팔 위기는 천재 아닌 인재
시신이 사방에 널려 있다. 발굴되지 않은 시신이 더 많다는 소문이 떠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망가진 거리는 텅 비었다. 이미 주민 수십만 명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잘 살아보려고 오지 마을을 떠나 수도로 몰려들었던 수많은 젊은 남녀(대다수는 남자)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카트만두는 시신 천지이기 때문이다.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주민 바바 타미가 말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지난 4월 25일 규모 7.8의 강진과 이어진 여진이 카트만두를 뒤흔들었다. 무너진 건물 다수에 묻힌 시신이 아직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다. 그 잔해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
스와얌부 구역에선 지진 발생 당시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목사는 교회 문을 걸어 닫고 신도들에게 기도하라고 했다. 결국 교회 건물이 무너져 전부 파묻혔다. 기도하던 신도들의 시신은 아직 그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뜬소문일지 모르지만 그 이면의 생생한 공포로 카트만두 전체가 떨고 있다.
또 다른 두려움은 수인성 전염병이다. 2010년 지진 직후 콜레라 유행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난 아이티의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 절도와 약탈, 식량·물 부족도 큰 문제다. 타미는 “지금 이곳은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말했다.
타미도 카트만두에서 약 145㎞ 떨어진 산악 지역 돌라카의 오지 마을 수스파-크셰마와티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아직 그 집에 산다. 지진 후 통화로 그들의 안전을 확인했지만 그 집은 이제 벽돌 더미와 먼지로 변했다.
타미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그곳에서 머물 곳과 식량,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려고 당분간 아내와 두 자녀를 카트만두에 두고 떠나기로 했다. 또 그는 비공식 구호원 역할도 한다. 수스파-크셰마와티로 가서 피해 상황을 직접 확인한 후 며칠 안에 카트만두로 돌아가 구호활동을 조직하는 임시 단체에 보고할 계획이다. 그가 수집하는 소중한 정보는 그곳으로 떠날 구호 트럭에 무엇을 실을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텐트? 식량? 아니면 의사? 내가 타미와 함께 카트만두를 떠나는 날 약 60만 명이 그 길을 나섰다. 네팔 정부는 카트만두에서 여러 시골 마을로 가는 교통편을 무료 제공했다. 하지만 정류장엔 약 800m의 줄이 늘어섰고, 버스는 지붕 위까지 가득 찼다. 버스가 갈라진 도로를 우회하려고 급커브를 틀 때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모두가 지붕 위의 레일을 붙잡고 매달린다. 우리가 탄 SUV는 승객 4명과 음식, 담요, 옷가지가 가득 든 큰 가방을 실었지만 그 버스들을 피해 비교적 쉽게 달렸다.
네팔에선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란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계곡이 신록으로 덮히고 꽃이 만발하며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산하가 지진으로 곳곳에서 흉물스런 속살을 드러냈다. 벽돌과 목재로 지은 노변의 가게와 식당, 주택은 대부분 허물어졌다.
차로 4시간을 달려 중국 국경에 가까운 도시 카디차우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타미의 고교 동창을 태웠다. 그는 장애인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우리는 마을 주민에게 줄 임시 텐트 설치에 필요한 플라스틱 시트를 구입했다. 그때까지 지나친 모든 마을처럼 이곳에서도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다. 그런데도 렌틸콩 수프, 밥, 커리 치킨, 콩 미트볼 등을 파는 식당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식사하는 동안 주인은 이 지역 전체에 비탈 아래 떨어진 자동차와 자전거에 끼어 있는 시신이 많다고 말했다. 비탈이 곧 무너질 듯해서 가족들이 아래로 내려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시신이 그대로 방치됐다. 최고 해발 3900m인 산자락 아래의 도로는 흘러내린 흙더미가 가득했다.
여러 마을을 지나쳤지만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리콧 지역에선 한 현지 공무원이 건물의 95%가 주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 SUV는 산비탈을 계속 올랐다. 도로 양편에서 이전에 사용하던 작은 물건 하나라도 건지려고 잔해 속을 뒤지는 주민이 보였다. 그들의 눈은 이 모든 죽음과 잔해를 넘어선 어느 장소와 시간을 응시하는 듯했다.
세계 곳곳에서 구호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 각국 구조팀과 생필품을 실은 비행기는 몇 시간 동안 공항 상공을 선회하다가 어쩔 수 없이 기수를 돌리는 경우가 많다. 카트만두 공항의 하나뿐인 활주로가 심한 정체를 빚기 때문이다. 지진 발생 직후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려고 네팔에 도착했지만 머물 곳도, 연락할 수 있는 곳이나 통역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조차 현지에서 먹고 지낼 방법을 몰랐다.
예일대학 사회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따려고 네팔에서 연구 중인 제이컵 링크는 “막 도착한 구호원들은 이곳 현실을 전혀 알 수 없어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현재 유엔이 네팔의 최대 공식 구호조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네팔 보건부는 의사와 의료단체에 먼저 관공서에 등록한 뒤 지시를 받아 활동을 시작해달라고 주문한다.
네팔 보건부 자문위원 아미트 아리알은 “그렇게 돼야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만 현실은 완전히 엉망”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지정된 곳으로 가지 않고, 어떤 사람은 길을 잃는다. 관공서에 등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링크와 그의 아내 아디티 슈레스타는 마음 맞는 몇몇 주민과 함께 ‘재난구호 중개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들은 전통 가구점 삼사라 스튜디오에 본부를 설치하고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과 필요한 사람을 찾아내 연결시켜 준다.
그들은 정부의 느린 대처와 무능, 부패에 좌절했다. 위기 초기엔 정부를 통하지 않고 비정부기구를 통해 네팔에 들어오는 방수포에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고 그중 1명인 파라크람 싱그 욘존이 말했다. “정부는 전체 과정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관료주의 방식은 도움이 절실한 800만 명을 도우려는 구호단체와 개인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 5월 3일 네팔 정부는 “구호물품이 면세가 되지 않고 수입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구호물품이 세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카트만두 공항에 쌓여 있다는 보도가 매일 나온다.
타미는 “우린 정부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호물품이 있으면 정치 지도자들은 가족과 친지에게 먼저 나눠줄 게 뻔하다.” 이런 냉소주의가 팽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88년 이번보다 작은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구호단체가 기부한 담요가 나중에 정부 관리들의 집과 그 물품을 분배하겠다고 자원한 사업체들의 창고에서 발견됐다. 삼사라 스튜디오 팀은 정부에 의존할 필요 없이 현지인의 지식과 자원을 직접 활용하는 구호 채널을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카트만두에서 가족이 부동산을 소유하는 프라지아 싱가는 가장 빈곤한 마을에 도움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그는 차에 물품을 싣고 운전기사를 고용해 일부 팀원의 고향집이 있는 타루카 마을로 가서 구호활동을 펼친다. 로빈 슈레스타는 약국을 운영하는 처남에게 고향인 고르카에 가능한 모든 물품을 보내고 계산서는 자신에게 보내라고 부탁했다. 안나 타라 에드워즈는 집안이 타이거 톱스라는 트레킹 회사를 운영하다. 그 회사 창고에는 텐트를 비롯해 임시 거주에 필요한 물품이 많이 쌓여 있다. 그는 오빠에게 “창고에 있는 물품 전부를 보내라”고 전화했다.
145㎞를 차로 이동하는 데 6시간이 걸렸다. 마을에 도착하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차에 함께 탔던 람 타미(바바 타미의 고향 동료)는 자신의 고향집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지붕이 내려앉았고 벽도 대부분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부엌과 화장실은 완전히 부서졌다. 건축 자재를 사려면 몇 시간은 가야 하는 마을로선 엄청난 손실이다. “내 손으로 지은 집”이라고 그가 말했다. “20년 동안 잘 서 있었는데 이제 그전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내와 네 자녀, 노모는 한동안 야외에서 자야 한다. 재봉사인 딸은 마치 종이처럼 구겨진 재봉틀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수스파-크셰마와티의 주민은 임시 텐트촌을 세웠다. 쓸만한 가재도구를 찾아낸 가족은 나무 기둥과 방수포, 양탄자, 누빈 이불로 텐트를 쳤다. 그럴 형편이 못 되는 가족은 건물 잔해에서 찾아온 골함석판 아래서 옹송그렸다.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다수는 마을 가게에서 외상으로 식품을 구입했다. 가게의 진열대가 비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람 타미의 동생 비르 바하두르 타미는 “차리콧에서 식품을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든 친척과 음식을 나눠 먹는다. 하지만 암시장이 생기면서 가격이 너무 올랐다. 앞으로 닥칠 위기가 심히 걱정된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땅이 또 흔들렸다. 달빛 밝은 넓은 하늘 아래 서 있었기에 잔해에 깔릴 위험은 없었다. 또 평지라 아래로 떨어질 곳도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오래 전 지각판이 서로 부딪쳐 땅을 하늘 높이 밀어 올린 지점이기에 어쩌면 상황이 역전돼 땅이 내려 꺼져 우리 모두를 삼킬지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첫 지진 후 5일째였다. 수스파-크셰마와티 마을에선 외부 세계와 연락이 완전히 두절됐다. 국제 구호단체나 정부의 피해 조사원도 이곳에는 오지 못했다. 관리들은 거의 입소문을 통해 오지 마을의 피해를 짐작할 뿐이다. 주민 야다브 라지 타미는 “지금 우린 무전기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현지 경찰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도 연락할 길이 없다. 빔 타미는 “사망자를 신고하려고 경찰을 불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이 겁먹고 달아났다. 우린 정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네팔에선 농민부터 국제 구호단체 간부나 외국 의원들까지 똑같이 느끼는 게 있다. 인신매매된 네팔 어린이를 가족에게 되돌려주는 비영리단체 ‘우산 재단(Umbrella Foundation)’에서 이사로 활동하는 마카르탄 고건은 “네팔 정부는 너무도 부패했고 대처가 느려 짜증 난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든 하려면 뇌물과 뒷거래가 필요하다며, 재단이 뇌물을 주지 않자 프로젝트 계약이 18개월 동안 지연됐다고 그는 하소연했다.
올해 초 영국 의회의 한 위원회는 네팔 원조를 중단하려 했다. 맬컴 브루스 위원장은 “네팔의 정부 운영이 엉망이고 부패가 극심하다”고 말했다. “네팔의 부패를 줄이려면 정부의 지배구조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이번 지진의 피해가 그토록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부패다. 로빈 슈레스타는 “사실 지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카트만두를 파괴했다”고 말했다.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건물을 대충 빨리 지었다는 뜻이다. 법으로는 신축 건물이 지진 안전기준에 부합해야 하지만 감독과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다. 네팔에서 유엔 연락관으로 일한 로버트 파이퍼는 2011년 톰슨로이터재단에 “카트만두에선 규정을 무시한 건물이 매일 하나씩 들어선다”고 말했다. 지방 공무원조차 지진 후 정부의 대응이 느리다고 불만이 크다. 돌라카의 한 공무원은 “이곳의 98%가 파괴됐다”고 말했다. “정부의 늦장 대응에 화가 난다. 제때 도움을 받지 못하면 파업하겠다.”
혼돈의 역사를 감안하면 정부의 무능이 그리 놀랍지 않다. 네팔은 마오쩌둥주의 봉기로 시작된 내전(1996~2006년)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채 안 됐다. 2001년엔 왕족 일가 전체가 살해됐다. 당시 황태자 디펜드라가 왕과 왕비를 포함해 가족 9명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전 막바지에 네팔은 입헌군주제에서 연방공화제로 고통스런 전환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벌써 6년째 헌법이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국제위기감시기구(ICG)가 2010년 보고서에서 지적했듯이 그 와중에서도 권력 상층부는 구습을 되풀이하며 멀쩡히 살아남았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국민 봉사가 아니라 부정축재다. 그들의 필요에 따라 네팔의 국가 시스템은 기능장애에 걸렸다.”
네팔 제헌의회의 라지브 샤 의원은 현재 정부가 받는 비난은 부당하고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용한 자원으로 최선을 다한다. 지금은 정부 불신이 해결책이 아니다.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 구호자금의 부당한 배분을 둘러싼 국민의 우려를 집요하게 캐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국민이 총리의 재난구호기금 분배를 믿지 않지만 주민이 독자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정부만이 이런 규모의 재난을 다룰 수 있다.” 그는 동료의원들과 함께 피해 지역 각각에 난민촌을 세우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아무리 선의의 노력이라고 해도 네팔에선 이동이 어려운 지리적 여건이 주요 장애물이다. 험준한 고산지대라는 사실은 네팔에 행운인 동시에 불운이었다. 19세기 아시아를 분할 지배한 유럽 열강 중 어느 나라도 네팔을 정복하진 못했다. 그 결과 네팔은 민족성과 고유 문화를 지켰다. 네팔이 특별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카트만두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이국적인 곳이라는 기적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동시에 그런 지리적·문화적 격리는 나라를 허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남쪽으로 국경을 맞댄 인도는 영국 식민지 시절 건설된 도로·철도 인프라의 유산이 남아 있지만 네팔에는 포장도로 약 4840㎞(세계 132위), 철도 약 60㎞(129위)가 전부다. 인구로는 42위, 영토로는 94위다. 인구가 많고 갈 곳도 많은데 갈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카트만두의 유엔 지역 공보관 오를라 파간은 “험난한 지형으로 구호물품 전달이 너무도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모든 마을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겠다.”
그러나 그 모든 마을에 유엔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바바 타미와 뢴 슈레스타 같은 주민이 직접 구호활동을 해야 한다. 그들이 마을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며 꼼꼼히 메모한 뒤 우리는 텐트를 치고 현지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현지에서 쌀로 빚는 술을 마실 때 다시 미진이 땅을 흔들었다.
취기가 약간 오른 람의 여동생은 지진 당시를 이야기했다. 가장 먼저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밖으로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당시엔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파괴된 건물과 썩어가는 시신들 가운데서도 네팔이 다른 어떤 나라와도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에선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는 표현이 희망과 기대가 사라진 체념을 의미한다. 그러나 네팔인은 변화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대개 성격이 푸근하고 침착하다. 람의 딸은 재봉틀을 최대한 빨리 고치고 싶어했다. 그의 아들은 잔해 속에서 합판과 못을 주워 나를 포함한 가족의 손님들을 위해 임시 침상을 만들었다. 람의 조카 사가르 타미(17)는 학교가 폐쇄된 게 가장 속상한 듯했다. “학교가 빨리 문을 열지 않으면 학생들을 규합해 시위를 벌이겠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너진 수많은 마을을 지나면서 한숨과 혀 차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농담과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수스파-크셰마와티 마을에 도착했을 대 우리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눈물이 아니라 결혼식이었고, 가장 먼저 들은 것은 불평이 아니라 결혼행진곡이었다.
차리콧에선 시청 건물의 창문이 전부 깨졌다. 지진 탓이 아니었다. 며칠 전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이 무시되고 있다고 분노한 주민들이 시청으로 몰려가 돌멩이를 던져 창문을 부셨다. 그 다음 내부로 들어가 테이블과 의자를 박살냈다.
당연히 이곳 관리들은 불안해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네팔군 병력이 거리를 누빈다. 네팔 무장경찰 간부인 라메시 파우델은 “일부 주민은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해 아주 신경이 날카롭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을 지키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했다. 나머지는 오늘 전달되는 식품 운송 트럭을 호위할 것이다.
현지 공무원 레샴 칸델은 “곧 구호품을 배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엔 성인 주민에게 각각 20달러씩 지급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요청해도 중앙정부에선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린 대규모 지원이 필요하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헬기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 언덕 위를 쳐다봤다. 바로 전날까지 네팔은 간헐적인 폭우에 시달렸다. 그 비로 집을 잃고 야외에서 텐트도 없이 자야 하는 사람들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오늘은 구름이 걷혔다. 처음으로 봉우리가 얼음에 덮인 히말라야가 멀리 보였다.
헬기는 산속 깊이 자리 잡은 마을에서 어린이 15명을 데려왔다. 평상시 차로 5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그들의 마을은 초롤파 빙하호수 바로 아래 있다. 관리들은 지진으로 호수 바닥이 갈라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다음 여진이 발생하면 거대한 산사태에 마을이 파묻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헬기로는 성인 70명을 실어올 수 없었다. 그중에는 아이들의 부모도 있다. 헬기는 조만간엔 그들을 데리러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기사는 국제취재프로젝트(International Reporting Project)의 지원으로 작성됐다.]-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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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망가진 거리는 텅 비었다. 이미 주민 수십만 명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잘 살아보려고 오지 마을을 떠나 수도로 몰려들었던 수많은 젊은 남녀(대다수는 남자)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카트만두는 시신 천지이기 때문이다.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주민 바바 타미가 말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지난 4월 25일 규모 7.8의 강진과 이어진 여진이 카트만두를 뒤흔들었다. 무너진 건물 다수에 묻힌 시신이 아직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다. 그 잔해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
스와얌부 구역에선 지진 발생 당시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목사는 교회 문을 걸어 닫고 신도들에게 기도하라고 했다. 결국 교회 건물이 무너져 전부 파묻혔다. 기도하던 신도들의 시신은 아직 그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뜬소문일지 모르지만 그 이면의 생생한 공포로 카트만두 전체가 떨고 있다.
또 다른 두려움은 수인성 전염병이다. 2010년 지진 직후 콜레라 유행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난 아이티의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 절도와 약탈, 식량·물 부족도 큰 문제다. 타미는 “지금 이곳은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말했다.
타미도 카트만두에서 약 145㎞ 떨어진 산악 지역 돌라카의 오지 마을 수스파-크셰마와티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아직 그 집에 산다. 지진 후 통화로 그들의 안전을 확인했지만 그 집은 이제 벽돌 더미와 먼지로 변했다.
타미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그곳에서 머물 곳과 식량,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려고 당분간 아내와 두 자녀를 카트만두에 두고 떠나기로 했다. 또 그는 비공식 구호원 역할도 한다. 수스파-크셰마와티로 가서 피해 상황을 직접 확인한 후 며칠 안에 카트만두로 돌아가 구호활동을 조직하는 임시 단체에 보고할 계획이다. 그가 수집하는 소중한 정보는 그곳으로 떠날 구호 트럭에 무엇을 실을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텐트? 식량? 아니면 의사?
재난구호 중개 서비스
네팔에선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란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계곡이 신록으로 덮히고 꽃이 만발하며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산하가 지진으로 곳곳에서 흉물스런 속살을 드러냈다. 벽돌과 목재로 지은 노변의 가게와 식당, 주택은 대부분 허물어졌다.
차로 4시간을 달려 중국 국경에 가까운 도시 카디차우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타미의 고교 동창을 태웠다. 그는 장애인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우리는 마을 주민에게 줄 임시 텐트 설치에 필요한 플라스틱 시트를 구입했다. 그때까지 지나친 모든 마을처럼 이곳에서도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다. 그런데도 렌틸콩 수프, 밥, 커리 치킨, 콩 미트볼 등을 파는 식당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식사하는 동안 주인은 이 지역 전체에 비탈 아래 떨어진 자동차와 자전거에 끼어 있는 시신이 많다고 말했다. 비탈이 곧 무너질 듯해서 가족들이 아래로 내려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시신이 그대로 방치됐다. 최고 해발 3900m인 산자락 아래의 도로는 흘러내린 흙더미가 가득했다.
여러 마을을 지나쳤지만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리콧 지역에선 한 현지 공무원이 건물의 95%가 주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 SUV는 산비탈을 계속 올랐다. 도로 양편에서 이전에 사용하던 작은 물건 하나라도 건지려고 잔해 속을 뒤지는 주민이 보였다. 그들의 눈은 이 모든 죽음과 잔해를 넘어선 어느 장소와 시간을 응시하는 듯했다.
세계 곳곳에서 구호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 각국 구조팀과 생필품을 실은 비행기는 몇 시간 동안 공항 상공을 선회하다가 어쩔 수 없이 기수를 돌리는 경우가 많다. 카트만두 공항의 하나뿐인 활주로가 심한 정체를 빚기 때문이다. 지진 발생 직후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려고 네팔에 도착했지만 머물 곳도, 연락할 수 있는 곳이나 통역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조차 현지에서 먹고 지낼 방법을 몰랐다.
예일대학 사회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따려고 네팔에서 연구 중인 제이컵 링크는 “막 도착한 구호원들은 이곳 현실을 전혀 알 수 없어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현재 유엔이 네팔의 최대 공식 구호조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네팔 보건부는 의사와 의료단체에 먼저 관공서에 등록한 뒤 지시를 받아 활동을 시작해달라고 주문한다.
네팔 보건부 자문위원 아미트 아리알은 “그렇게 돼야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만 현실은 완전히 엉망”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지정된 곳으로 가지 않고, 어떤 사람은 길을 잃는다. 관공서에 등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링크와 그의 아내 아디티 슈레스타는 마음 맞는 몇몇 주민과 함께 ‘재난구호 중개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들은 전통 가구점 삼사라 스튜디오에 본부를 설치하고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과 필요한 사람을 찾아내 연결시켜 준다.
그들은 정부의 느린 대처와 무능, 부패에 좌절했다. 위기 초기엔 정부를 통하지 않고 비정부기구를 통해 네팔에 들어오는 방수포에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고 그중 1명인 파라크람 싱그 욘존이 말했다. “정부는 전체 과정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관료주의 방식은 도움이 절실한 800만 명을 도우려는 구호단체와 개인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 5월 3일 네팔 정부는 “구호물품이 면세가 되지 않고 수입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구호물품이 세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카트만두 공항에 쌓여 있다는 보도가 매일 나온다.
타미는 “우린 정부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호물품이 있으면 정치 지도자들은 가족과 친지에게 먼저 나눠줄 게 뻔하다.” 이런 냉소주의가 팽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88년 이번보다 작은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구호단체가 기부한 담요가 나중에 정부 관리들의 집과 그 물품을 분배하겠다고 자원한 사업체들의 창고에서 발견됐다.
암시장 생기면서 생필품 가격 치솟아
145㎞를 차로 이동하는 데 6시간이 걸렸다. 마을에 도착하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차에 함께 탔던 람 타미(바바 타미의 고향 동료)는 자신의 고향집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지붕이 내려앉았고 벽도 대부분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부엌과 화장실은 완전히 부서졌다. 건축 자재를 사려면 몇 시간은 가야 하는 마을로선 엄청난 손실이다. “내 손으로 지은 집”이라고 그가 말했다. “20년 동안 잘 서 있었는데 이제 그전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내와 네 자녀, 노모는 한동안 야외에서 자야 한다. 재봉사인 딸은 마치 종이처럼 구겨진 재봉틀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수스파-크셰마와티의 주민은 임시 텐트촌을 세웠다. 쓸만한 가재도구를 찾아낸 가족은 나무 기둥과 방수포, 양탄자, 누빈 이불로 텐트를 쳤다. 그럴 형편이 못 되는 가족은 건물 잔해에서 찾아온 골함석판 아래서 옹송그렸다.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다수는 마을 가게에서 외상으로 식품을 구입했다. 가게의 진열대가 비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람 타미의 동생 비르 바하두르 타미는 “차리콧에서 식품을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든 친척과 음식을 나눠 먹는다. 하지만 암시장이 생기면서 가격이 너무 올랐다. 앞으로 닥칠 위기가 심히 걱정된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땅이 또 흔들렸다. 달빛 밝은 넓은 하늘 아래 서 있었기에 잔해에 깔릴 위험은 없었다. 또 평지라 아래로 떨어질 곳도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오래 전 지각판이 서로 부딪쳐 땅을 하늘 높이 밀어 올린 지점이기에 어쩌면 상황이 역전돼 땅이 내려 꺼져 우리 모두를 삼킬지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첫 지진 후 5일째였다. 수스파-크셰마와티 마을에선 외부 세계와 연락이 완전히 두절됐다. 국제 구호단체나 정부의 피해 조사원도 이곳에는 오지 못했다. 관리들은 거의 입소문을 통해 오지 마을의 피해를 짐작할 뿐이다. 주민 야다브 라지 타미는 “지금 우린 무전기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현지 경찰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도 연락할 길이 없다. 빔 타미는 “사망자를 신고하려고 경찰을 불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이 겁먹고 달아났다. 우린 정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네팔에선 농민부터 국제 구호단체 간부나 외국 의원들까지 똑같이 느끼는 게 있다. 인신매매된 네팔 어린이를 가족에게 되돌려주는 비영리단체 ‘우산 재단(Umbrella Foundation)’에서 이사로 활동하는 마카르탄 고건은 “네팔 정부는 너무도 부패했고 대처가 느려 짜증 난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든 하려면 뇌물과 뒷거래가 필요하다며, 재단이 뇌물을 주지 않자 프로젝트 계약이 18개월 동안 지연됐다고 그는 하소연했다.
올해 초 영국 의회의 한 위원회는 네팔 원조를 중단하려 했다. 맬컴 브루스 위원장은 “네팔의 정부 운영이 엉망이고 부패가 극심하다”고 말했다. “네팔의 부패를 줄이려면 정부의 지배구조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이번 지진의 피해가 그토록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부패다. 로빈 슈레스타는 “사실 지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카트만두를 파괴했다”고 말했다.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건물을 대충 빨리 지었다는 뜻이다. 법으로는 신축 건물이 지진 안전기준에 부합해야 하지만 감독과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다. 네팔에서 유엔 연락관으로 일한 로버트 파이퍼는 2011년 톰슨로이터재단에 “카트만두에선 규정을 무시한 건물이 매일 하나씩 들어선다”고 말했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다
혼돈의 역사를 감안하면 정부의 무능이 그리 놀랍지 않다. 네팔은 마오쩌둥주의 봉기로 시작된 내전(1996~2006년)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채 안 됐다. 2001년엔 왕족 일가 전체가 살해됐다. 당시 황태자 디펜드라가 왕과 왕비를 포함해 가족 9명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전 막바지에 네팔은 입헌군주제에서 연방공화제로 고통스런 전환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벌써 6년째 헌법이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국제위기감시기구(ICG)가 2010년 보고서에서 지적했듯이 그 와중에서도 권력 상층부는 구습을 되풀이하며 멀쩡히 살아남았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국민 봉사가 아니라 부정축재다. 그들의 필요에 따라 네팔의 국가 시스템은 기능장애에 걸렸다.”
네팔 제헌의회의 라지브 샤 의원은 현재 정부가 받는 비난은 부당하고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용한 자원으로 최선을 다한다. 지금은 정부 불신이 해결책이 아니다.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 구호자금의 부당한 배분을 둘러싼 국민의 우려를 집요하게 캐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국민이 총리의 재난구호기금 분배를 믿지 않지만 주민이 독자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정부만이 이런 규모의 재난을 다룰 수 있다.” 그는 동료의원들과 함께 피해 지역 각각에 난민촌을 세우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아무리 선의의 노력이라고 해도 네팔에선 이동이 어려운 지리적 여건이 주요 장애물이다. 험준한 고산지대라는 사실은 네팔에 행운인 동시에 불운이었다. 19세기 아시아를 분할 지배한 유럽 열강 중 어느 나라도 네팔을 정복하진 못했다. 그 결과 네팔은 민족성과 고유 문화를 지켰다. 네팔이 특별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카트만두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이국적인 곳이라는 기적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동시에 그런 지리적·문화적 격리는 나라를 허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남쪽으로 국경을 맞댄 인도는 영국 식민지 시절 건설된 도로·철도 인프라의 유산이 남아 있지만 네팔에는 포장도로 약 4840㎞(세계 132위), 철도 약 60㎞(129위)가 전부다. 인구로는 42위, 영토로는 94위다. 인구가 많고 갈 곳도 많은데 갈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카트만두의 유엔 지역 공보관 오를라 파간은 “험난한 지형으로 구호물품 전달이 너무도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모든 마을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겠다.”
그러나 그 모든 마을에 유엔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바바 타미와 뢴 슈레스타 같은 주민이 직접 구호활동을 해야 한다. 그들이 마을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며 꼼꼼히 메모한 뒤 우리는 텐트를 치고 현지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현지에서 쌀로 빚는 술을 마실 때 다시 미진이 땅을 흔들었다.
취기가 약간 오른 람의 여동생은 지진 당시를 이야기했다. 가장 먼저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밖으로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당시엔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파괴된 건물과 썩어가는 시신들 가운데서도 네팔이 다른 어떤 나라와도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에선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는 표현이 희망과 기대가 사라진 체념을 의미한다. 그러나 네팔인은 변화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대개 성격이 푸근하고 침착하다. 람의 딸은 재봉틀을 최대한 빨리 고치고 싶어했다. 그의 아들은 잔해 속에서 합판과 못을 주워 나를 포함한 가족의 손님들을 위해 임시 침상을 만들었다. 람의 조카 사가르 타미(17)는 학교가 폐쇄된 게 가장 속상한 듯했다. “학교가 빨리 문을 열지 않으면 학생들을 규합해 시위를 벌이겠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너진 수많은 마을을 지나면서 한숨과 혀 차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농담과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수스파-크셰마와티 마을에 도착했을 대 우리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눈물이 아니라 결혼식이었고, 가장 먼저 들은 것은 불평이 아니라 결혼행진곡이었다.
차리콧에선 시청 건물의 창문이 전부 깨졌다. 지진 탓이 아니었다. 며칠 전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이 무시되고 있다고 분노한 주민들이 시청으로 몰려가 돌멩이를 던져 창문을 부셨다. 그 다음 내부로 들어가 테이블과 의자를 박살냈다.
당연히 이곳 관리들은 불안해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네팔군 병력이 거리를 누빈다. 네팔 무장경찰 간부인 라메시 파우델은 “일부 주민은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해 아주 신경이 날카롭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을 지키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했다. 나머지는 오늘 전달되는 식품 운송 트럭을 호위할 것이다.
현지 공무원 레샴 칸델은 “곧 구호품을 배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엔 성인 주민에게 각각 20달러씩 지급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요청해도 중앙정부에선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린 대규모 지원이 필요하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헬기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 언덕 위를 쳐다봤다. 바로 전날까지 네팔은 간헐적인 폭우에 시달렸다. 그 비로 집을 잃고 야외에서 텐트도 없이 자야 하는 사람들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오늘은 구름이 걷혔다. 처음으로 봉우리가 얼음에 덮인 히말라야가 멀리 보였다.
헬기는 산속 깊이 자리 잡은 마을에서 어린이 15명을 데려왔다. 평상시 차로 5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그들의 마을은 초롤파 빙하호수 바로 아래 있다. 관리들은 지진으로 호수 바닥이 갈라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다음 여진이 발생하면 거대한 산사태에 마을이 파묻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헬기로는 성인 70명을 실어올 수 없었다. 그중에는 아이들의 부모도 있다. 헬기는 조만간엔 그들을 데리러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기사는 국제취재프로젝트(International Reporting Project)의 지원으로 작성됐다.]-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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