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 피플(98) 마리사 메이어 야후 최고경영자] 야후의 재도약 이끈 팔방미인
[글로벌 파워 피플(98) 마리사 메이어 야후 최고경영자] 야후의 재도약 이끈 팔방미인
정보기술(IT) 부문을 포함한 기술경영 분야는 현재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영역이다. 아이디어와 창의성, 추진력을 가진 젊은 경영인들이 적지 않다. 특히 유리천장을 뚫고 오른 젊은 여성 경영인이 많다. 그중에서도 현재 ‘야후!(이하 야후)’의 CEO를 맡고 있는 마리사 앤 메이어(40)는 독보적이다. 구글 출신으로 야후로 옮겨 사령탑을 맡고 있는 그는 포춘 500 기업 중 최연소 CEO다. 2012년 7월 야후 CEO를 맡았으니 37세에 세계적인 IT 기업의 수장에 오른 셈이다. 메이어는 2014년 미국 경제잡지 포춘의 ‘40세 이하 유망 경영인’ 리스트에서 6위를 기록했다. 이 잡지가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비즈니스 여성 리스트’에선 16위에 올랐다. 미 경제잡지 포브스가 2015년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 22위를 기록했다.
그가 CEO를 맡고 있는 야후는 아직도 IT업계 강자 중 하나다. 스탠퍼드대 출신의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가 1994년 서비스를 시작한 야후는 전성기에 비해 빛이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IT 분야의 공룡기업이다. 한때 검색 업체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 2008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과 인수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웹서치 소프트웨어를 바탕으로 미디어와 인터넷 서비스 사업과 함께 컴퓨터 소프트웨어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검색엔진을 기반으로 야후 디렉토리, 야후 메일, 야후 뉴스, 야후 파이낸스, 야후 그룹스, 야후 앤서스, 광고, 온라인 지도, 비디오 공유,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미국에서 뉴스 검색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다. 전 세계 30개 언어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직원 1만1400명의 거대 기업이다. 2014년 46억1000만 달러의 매출과 5억89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총 자산이 619억 달러, 시가총액이 387억4000만 달러에 이른다. 야후닷컴(www.yahoo.com)은 미국의 상업용 웹사이트 트래픽 데이터를 제공하는 알렉사 순위에서 2015년 6월 현재 4위에 올랐다. 매달 평균 7억 명이 70억 회나 이 사이트를 찾는 것으로 나왔다. 1996년 설립된 알렉사 닷컴은 1999년부터 아마존닷컴(Amazon.com)의 자회사로서 신뢰성 높은 제3자의 트래픽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알렉사에 따르면 야후닷컴은 고정 방문자가 4억1200만 명에에 이를 정도로 전 세계 유저들이 가장 많이 찾는 웹사이트의 하나다. 하루 평균 페이지뷰가 44억번에 이른다.
이제 야후 CEO가 된 지 3년이 지난 메이어는 원래 구글 사람이었다. 구글에서 오랫동안 이사를 맡으면서 사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구글의 홍보 담당을 맡았다. 구글의 입이자 대외창구 역할을 했다. 메이어는 타고난 경영인이다. 야후로 옮긴 즉시 경영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야후의 문제는 심각한 관료주의였다. 작고 합리적이며 개혁적인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다른 IT업체와 마찬가지로 야후도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의사소통의 경색과 업무 효율보다 형식과 절차를 더 중요시하는 관료주의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기업문화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보신주의를 부르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고 일을 위한 일만하는 기업문화를 초래할 수 있다.
메이어는 건전한 비판의 기업문화를 만드는 일을 야후 개혁 작업의 첫 임무로 삼았다. 직원들의 불만을 수집하고 사무실의 문제에 대해 투표하게 해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하게 했다. 문제가 있다고 온라인으로 지적한 직원이 한 사무실에서 50명을 넘으면 경영진에서 그 문제를 즉각 자동으로 조사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이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도 사무실의 문제를 감출 수 없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다수 직원의 합리적이고 건전한 지적을 무시하고 부서장이 자기 자신의 명성을 높이려고 독단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연히 회사의 자원과 인력이 합리적으로 배분되게 된다. 야후의 기업문화는 이런 식으로 효율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야후의 관료주의를 손본 그는 이번에는 다른 방향의 작업에 나섰다. 거대 기업이 됐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야후의 벤처기업 성격도 손보기 시작했다. 야후는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기업답게 재택근무 문화가 상당히 남아있었다. 문제는 창의력을 높이려는 이유가 아닌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재택근무가 남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는 재택근무를 업무의 효율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적 삶을 즐기기 위해 활용했다. 메이어는 이런 재택근무 남용이 업무 비효율로 이어지고 비용 상승을 부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2013년 2월 모든 재택근무자들에게 사무실 귀환 지시를 내렸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더욱 자유분방한 구글에서 온 CEO가 야후에서 그런 지시를 내렸으니 기업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다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메이어 본인이 솔선수범했다. 2012년 9월 아들을 낳고 출산휴가를 마친 그는 재택근무를 마다하고 회사에 출근했다. 대신 회사 집무실 옆에 탁아방을 만들었다. 회사에서 탁아시설을 제공할 테니 재택근무를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직원들에겐 재택근무 금지령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2013년 4월 회사의 출산휴가 규정을 변경했다. 기간을 연장하는 한편 자녀를 얻은 남녀 모두에게 현금 보너스를 주기로 한 것이다. 이런 제도는 페이스북과 구글 같은 실리콘 밸리의 IT기업에 빠른 속도로 퍼져 실리콘밸리 스탠더드가 됐다. 그러면서 메이어는 검색엔진 사업 중심이던 야후의 사업 분야를 다각화했다. 마이크로 블로그로 이름을 날리던 텀블러를 인수했다. 문자·그림·영상·링크·음성 등을 작은 텀블로그에 올릴 수 있는 마이크로 블로그 플랫폼이자 웹사이트다. 이용자까리 서로 팔로우 할 수 있다. 인수가격은 11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를 필두로 메이어는 적극적인 인수합병으로 야후의 미래를 위한 포석을 했다.
메이어의 야후 개혁 드라이브는 비교적 빨리 효과가 나타났다. 2013년 7월 야후의 매출은 줄었으나 이익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만한 경영 거품을 빼고 수익 중심의 미래형 포맷 완성에 주력한 것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같은 미디어는 야후를 다시 보기 시작했으며 시장 반응이 이어졌다. 야후 주가는 메이어가 CEO가 된 뒤 14개월이 지난 2013년 9월까지 두 배로 뛰었다. 메이어의 승리였다.
메이어는 실리콘밸리에서 사회이사 활동이 가장 활발한 CEO중 한 명이다. 독특한 것은 월마트 등 일반 기업의 사외이사 외에 디자인 박물관, 뉴욕시티 발레, 샌프란시스코 발레,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 등 예술단체의 이사를 여럿 맡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메이어의 성장 배경이 작용한다.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주 출신인 메이어는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미술 교사였다. 아버지는 수도회사에 근무한 환경엔지니어였다. 할아버지는 소아마비로 장애를 겪었으나 32년간 위스콘신주 잭슨시의 시장을 맡았다. 친가로부터는 확고한 의지를, 외가로부터는 예술적인 감수성을 물려받은 셈이다. 어려서 지나치게 숫기가 없어 부모의 걱정을 샀던 그는 중학교와 고교에서 피아노와 발레를 배웠다. 그러면서 인생에 변화가 왔다. 메이어 스스로 “발레를 배우면서 비판정신과 규율, 균형감각과 자신감을 배웠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메이어의 화려한 고교 시절을 보면 입시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무용이나 음악, 미술 같은 예체능 교육을 등한히 하거나 특별활동 참여를 엄격히 제한하는 한국 교육 환경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메이어는 발레로 자신감을 얻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학업뿐 아니라 수많은 특별 활동으로 리더십 기르고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다. 고교 때의 특별활동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감각이 필요한 IT분야 업무에 큰 도움이 됐다.
화려한 고교 시절을 마치고 스탠퍼드대에 진학한 메이어는 처음에는 다른 우등생처럼 의사를 지망했다. 소아 신경과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의예과를 다녔다. 하지만 컴퓨터에 더 흥미를 느껴 나중에 전공을 바꿔 기호 시스템을 공부했다. 스탠퍼드에 다니면서도 메이어는 특별 활동에 몰두했다. 우선, 대학 발레부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 참가해 무대에서 멋진 춤을 선보였다. 춤추기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의회 토론팀’에서 논쟁을 주도했으며, 자원봉사에도 열심이었다.
1999년 스탠퍼드 대학원을 마친 메이어에게 일자리가 쏟아졌다. 무려 14가지의 제안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카네기 멜론대학 강사, 맥킨지의 컨설턴트가 포함됐다. 메이어의 선택은 과감했다. 당시 작은 벤처 기업에 불과했던 구글로 향했다. 입사 순서대로 매겨지는 구글의 사원번호 20번을 받았다. 구글의 첫 여성 엔지니어라는 수식어도 붙어다녔다. 그가 구글에서 처음 맡은 임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서치엔진의 개발과 디자인을 담당하는 작은 규모의 엔지니어 팀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메이어는 업무에서 디테일에 강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런 꼼꼼함에 힘입어 그는 제품 매니저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소비자 웹 제품 담당을 맡게 됐다. 그러면서 간결하기로 소문난 구글 서치 홈페이지의 윤곽 설계를 감독했다.
2002년 메이어는 구글의 제휴제품 매니저(APM)를 맡았다. 재능 있는 인재를 새롭게 발굴해 리더십을 길러주고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사내에서 비중 있는 업무를 맡기는 프로그램이었다. 고교 때부터 여러 사람을 모아 함께 일하는 데 능력을 보였던 메이어는 이 프로그램으로 자신이 구글의 미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올라섰다. 메이어는 매년 젊은 신입사원 중 일부를 선발해 2년짜리 집중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업무를 마친 뒤 저녁에 하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사원 개개인에게 본 업무 이외의 과제를 주고 실무교육을 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구글의 기둥이 되는 인재를 발굴하고 훈련시켰다. 메이어는 2005년 서치 제품과 유저 경험 분야 담당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메이어는 서치는 물론 이미지·뉴스·지도·책, 제품 서치, 툴바, G메일 등 구글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 간부로 떠올랐다. 2010년까지 부사장으로 승승장구하던 메이어는 2012년 시련을 겪었다. 당시 구글 CEO였던 에릭 슈미트가 강등시킨 것이다. 그 결과 구글의 지역, 지도, 위치 시스템만 담당하게 됐다.
2011년 메이어는 유명한 식당 서베이 사이트인 자가트를 인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구글은 이 사이트를 1억2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구글에서 고강도의 업무를 맡으면서도 메이어는 자원봉사를 쉬지 않았다. 스탠퍼드대가 지역 내 학교인 이스트 팰러앨토 채터스쿨의 학생들을 선발해 지도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해 멘토를 맡았다.
2000년대 초반 구글 공동창업자인 레리 페이지와 사귄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12월 변호사이자 발명가인 자카리 보그와 결혼했다. 야후 CEO로 지명된 바로 그날 자신의 임신 사실을 공개했으며, 그해 9월30일 출산했다. 급여는 첫 6개월간은 3660만 달러를 받았으며 이후 5년간 연봉 1억 1700만 달러를 받고 있다. 개인 재산이 3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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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CEO를 맡고 있는 야후는 아직도 IT업계 강자 중 하나다. 스탠퍼드대 출신의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가 1994년 서비스를 시작한 야후는 전성기에 비해 빛이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IT 분야의 공룡기업이다. 한때 검색 업체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 2008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과 인수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웹서치 소프트웨어를 바탕으로 미디어와 인터넷 서비스 사업과 함께 컴퓨터 소프트웨어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검색엔진을 기반으로 야후 디렉토리, 야후 메일, 야후 뉴스, 야후 파이낸스, 야후 그룹스, 야후 앤서스, 광고, 온라인 지도, 비디오 공유,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미국에서 뉴스 검색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다. 전 세계 30개 언어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직원 1만1400명의 거대 기업이다.
기업문화 바꾸고 사업도 다각화
이제 야후 CEO가 된 지 3년이 지난 메이어는 원래 구글 사람이었다. 구글에서 오랫동안 이사를 맡으면서 사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구글의 홍보 담당을 맡았다. 구글의 입이자 대외창구 역할을 했다. 메이어는 타고난 경영인이다. 야후로 옮긴 즉시 경영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야후의 문제는 심각한 관료주의였다. 작고 합리적이며 개혁적인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다른 IT업체와 마찬가지로 야후도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의사소통의 경색과 업무 효율보다 형식과 절차를 더 중요시하는 관료주의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기업문화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보신주의를 부르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고 일을 위한 일만하는 기업문화를 초래할 수 있다.
메이어는 건전한 비판의 기업문화를 만드는 일을 야후 개혁 작업의 첫 임무로 삼았다. 직원들의 불만을 수집하고 사무실의 문제에 대해 투표하게 해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하게 했다. 문제가 있다고 온라인으로 지적한 직원이 한 사무실에서 50명을 넘으면 경영진에서 그 문제를 즉각 자동으로 조사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이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도 사무실의 문제를 감출 수 없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다수 직원의 합리적이고 건전한 지적을 무시하고 부서장이 자기 자신의 명성을 높이려고 독단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연히 회사의 자원과 인력이 합리적으로 배분되게 된다. 야후의 기업문화는 이런 식으로 효율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야후의 관료주의를 손본 그는 이번에는 다른 방향의 작업에 나섰다. 거대 기업이 됐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야후의 벤처기업 성격도 손보기 시작했다. 야후는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기업답게 재택근무 문화가 상당히 남아있었다. 문제는 창의력을 높이려는 이유가 아닌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재택근무가 남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는 재택근무를 업무의 효율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적 삶을 즐기기 위해 활용했다. 메이어는 이런 재택근무 남용이 업무 비효율로 이어지고 비용 상승을 부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2013년 2월 모든 재택근무자들에게 사무실 귀환 지시를 내렸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더욱 자유분방한 구글에서 온 CEO가 야후에서 그런 지시를 내렸으니 기업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다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메이어 본인이 솔선수범했다. 2012년 9월 아들을 낳고 출산휴가를 마친 그는 재택근무를 마다하고 회사에 출근했다. 대신 회사 집무실 옆에 탁아방을 만들었다. 회사에서 탁아시설을 제공할 테니 재택근무를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직원들에겐 재택근무 금지령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2013년 4월 회사의 출산휴가 규정을 변경했다. 기간을 연장하는 한편 자녀를 얻은 남녀 모두에게 현금 보너스를 주기로 한 것이다. 이런 제도는 페이스북과 구글 같은 실리콘 밸리의 IT기업에 빠른 속도로 퍼져 실리콘밸리 스탠더드가 됐다.
사외이사 활동 활발
메이어의 야후 개혁 드라이브는 비교적 빨리 효과가 나타났다. 2013년 7월 야후의 매출은 줄었으나 이익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만한 경영 거품을 빼고 수익 중심의 미래형 포맷 완성에 주력한 것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같은 미디어는 야후를 다시 보기 시작했으며 시장 반응이 이어졌다. 야후 주가는 메이어가 CEO가 된 뒤 14개월이 지난 2013년 9월까지 두 배로 뛰었다. 메이어의 승리였다.
메이어는 실리콘밸리에서 사회이사 활동이 가장 활발한 CEO중 한 명이다. 독특한 것은 월마트 등 일반 기업의 사외이사 외에 디자인 박물관, 뉴욕시티 발레, 샌프란시스코 발레,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 등 예술단체의 이사를 여럿 맡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메이어의 성장 배경이 작용한다.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주 출신인 메이어는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미술 교사였다. 아버지는 수도회사에 근무한 환경엔지니어였다. 할아버지는 소아마비로 장애를 겪었으나 32년간 위스콘신주 잭슨시의 시장을 맡았다. 친가로부터는 확고한 의지를, 외가로부터는 예술적인 감수성을 물려받은 셈이다. 어려서 지나치게 숫기가 없어 부모의 걱정을 샀던 그는 중학교와 고교에서 피아노와 발레를 배웠다. 그러면서 인생에 변화가 왔다. 메이어 스스로 “발레를 배우면서 비판정신과 규율, 균형감각과 자신감을 배웠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메이어의 화려한 고교 시절을 보면 입시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무용이나 음악, 미술 같은 예체능 교육을 등한히 하거나 특별활동 참여를 엄격히 제한하는 한국 교육 환경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메이어는 발레로 자신감을 얻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학업뿐 아니라 수많은 특별 활동으로 리더십 기르고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다. 고교 때의 특별활동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감각이 필요한 IT분야 업무에 큰 도움이 됐다.
화려한 고교 시절을 마치고 스탠퍼드대에 진학한 메이어는 처음에는 다른 우등생처럼 의사를 지망했다. 소아 신경과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의예과를 다녔다. 하지만 컴퓨터에 더 흥미를 느껴 나중에 전공을 바꿔 기호 시스템을 공부했다. 스탠퍼드에 다니면서도 메이어는 특별 활동에 몰두했다. 우선, 대학 발레부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 참가해 무대에서 멋진 춤을 선보였다. 춤추기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의회 토론팀’에서 논쟁을 주도했으며, 자원봉사에도 열심이었다.
1999년 스탠퍼드 대학원을 마친 메이어에게 일자리가 쏟아졌다. 무려 14가지의 제안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카네기 멜론대학 강사, 맥킨지의 컨설턴트가 포함됐다. 메이어의 선택은 과감했다. 당시 작은 벤처 기업에 불과했던 구글로 향했다. 입사 순서대로 매겨지는 구글의 사원번호 20번을 받았다. 구글의 첫 여성 엔지니어라는 수식어도 붙어다녔다. 그가 구글에서 처음 맡은 임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서치엔진의 개발과 디자인을 담당하는 작은 규모의 엔지니어 팀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메이어는 업무에서 디테일에 강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런 꼼꼼함에 힘입어 그는 제품 매니저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소비자 웹 제품 담당을 맡게 됐다. 그러면서 간결하기로 소문난 구글 서치 홈페이지의 윤곽 설계를 감독했다.
2002년 메이어는 구글의 제휴제품 매니저(APM)를 맡았다. 재능 있는 인재를 새롭게 발굴해 리더십을 길러주고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사내에서 비중 있는 업무를 맡기는 프로그램이었다. 고교 때부터 여러 사람을 모아 함께 일하는 데 능력을 보였던 메이어는 이 프로그램으로 자신이 구글의 미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올라섰다. 메이어는 매년 젊은 신입사원 중 일부를 선발해 2년짜리 집중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업무를 마친 뒤 저녁에 하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사원 개개인에게 본 업무 이외의 과제를 주고 실무교육을 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구글의 기둥이 되는 인재를 발굴하고 훈련시켰다.
레리 페이지와 사귀기도
2011년 메이어는 유명한 식당 서베이 사이트인 자가트를 인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구글은 이 사이트를 1억2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구글에서 고강도의 업무를 맡으면서도 메이어는 자원봉사를 쉬지 않았다. 스탠퍼드대가 지역 내 학교인 이스트 팰러앨토 채터스쿨의 학생들을 선발해 지도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해 멘토를 맡았다.
2000년대 초반 구글 공동창업자인 레리 페이지와 사귄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12월 변호사이자 발명가인 자카리 보그와 결혼했다. 야후 CEO로 지명된 바로 그날 자신의 임신 사실을 공개했으며, 그해 9월30일 출산했다. 급여는 첫 6개월간은 3660만 달러를 받았으며 이후 5년간 연봉 1억 1700만 달러를 받고 있다. 개인 재산이 3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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