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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의 날갯짓하는 ‘가상현실’

비상의 날갯짓하는 ‘가상현실’

최근 VR의 폭발적인 성장은 가격을 크게 떨어뜨린 기술 덕분이다. 2016 라스베이거스 전자제품박람회에서 삼성전자의 기어 VR 가상현실 헤드셋을 체험하는 관람객들.
미국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중심가의 유흥지역)의 한 호텔 32층 특실. 이언 폴이 자기 회사에 가상현실(VR)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광고 수입에 의존하는 무료 경쟁업체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자 그는 VR을 대항마로 내세웠다. 몰입적이고 흥미진진한 체험에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열성 고객을 끌어들이는 데 VR이 도움을 주리라고 그는 믿는다. 어쩌면 폴이 뉴욕타임스, 폭스 또는 ESPN 중역이겠거니 생각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모두 올해 라스베이거스 국제 전자제품박람회(CES)에 참가해 저마다 VR이 자신들의 사업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논한 기업들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언 폴은 포르노 제작자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노티 아메리카의 최고정보책임자(CIO)다. 그는 회사에서 새로 선보인 VR 포르노 서비스를 홍보할 목적으로 라스베이거스를 찾았다. 그는 월정액 24.95달러로 노티 아메리카가 광고 기반의 무료 포르노 사이트들에 우위를 점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사이트들이 어디에 광고를 올리겠는가? 벽에?”

가상현실이 현실세계로 들어왔다. 폴은 자신의 표적 고객에겐 360도 시야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그들은 주로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한다”). 같은 시각, 몇 층 떨어진 곳에서 폭스 영화사가 ‘(영화) 마션 VR 체험’ 서비스 개시를 기념하는 비공개 파티를 열고 있었다. CES 개막 전날인 지난 1월 5일 시장조사 업체 슈퍼데이터 리서치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6억6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소비자 VR 시장이 올해 51억 달러 규모로 폭발적인 성장을 보일 전망이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데렐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VR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1960년대 선구적인 컴퓨터 과학자 이반 서덜랜드가 처음으로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중 한 가지를 개발했다. 두 눈 앞에 각각 작은 브라운관(cathode ray tubes)을 위치시키는 방식이었지만 상용화되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 액정표시장치(LCD) 패널과 PC가 보급되기 시작하자 게임 업체 아타리가 VR 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연구소는 불과 2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아타리의 직원이었던 재런 레이니어와 토마스 짐머만은 선구적인 VR 회사 VPL 리서치를 설립하고 VR 헤드셋인 아이폰(EyePhone)을 생산했다. 그 밖에 ‘데이터 장갑(Data Glove)’도 개발했는데 그중 한 모델(마텔스 파워 글러브)은 초기 닌텐도 게임기 이용자가 손동작을 통해 게임을 제어할 수 있었다. 종종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레이니어는 업계의 상징으로 떠올라 첨단기술 분야의 초기 팬들 사이에서 록스타 같은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드웨어 가격이 싸지 않았다”고 짐머만은 돌이켰다. 1989년 VPL의 아이폰 가격은 1만 달러 선부터 시작됐다. 한편 다른 VR 시스템 가격은 무려 20만 달러를 호가했다.

초창기 소비자용 VR 제품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그 밖에도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닌텐도가 선보인 버추얼 보이 헤드셋은 큰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VR은 20년 가까이 주로 연구용과 고급 군용 또는 산업용으로만 쓰였다. 소비자용 VR은 잡힐 듯 말듯 가까우면서도 플라잉카나 제트팩(배낭형 추진장치)처럼 과거에 꿈꿨던 미래의 일부로 남을 운명인 듯했다.

VPL은 1990년대 초반 파산신청을 했다. 대다수 초기 개발자들은 다른 분야로 떠났다. 짐머만은 IBM 연구원이 됐고 레이니어는 음악 녹음 일을 하다가 결국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원으로 자리 잡았다. 브라이언 블라우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1990년대 업계를 떠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그는 1980년대 대학원생 시절 VR 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모두 떠나야 했다.”

마침내 기술이 VR의 비전을 따라잡는 날이 왔다. 데스크톱 PC가 레이니어 시대의 슈퍼컴퓨터보다 더 강력해지고 고해상도 디스플레이를 갖춘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는 등의 기술발전 덕분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분야의 대학생 신동 파머 러키가 등장했다. 그는 2012년 헤드셋 개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킥스타터(소셜 펀딩 사이트) 캠페인에 착수했다. 몇 시간 만에 25만 달러가 조달됐다. 며칠도 안 돼 러키의 리프트 헤드셋 초기모델을 구입하려 몸이 단 개발자들로부터 240만 달러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금은 오큘러스 VR로 불리는 그 회사가 판매한 초기모델은 최종적으로 17만5000대를 넘었다.

개발자의 열정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존 카맥 같은 베테랑 게임 개발자들의 인정이었다. 1990년대 초 획기적인 1인칭 슈팅 게임(사용자 시점의 총격 게임) ‘둠’을 개발하고 훗날 오큘러스의 최고기술책임자(CTO)로 합류한 인물이다. 카맥 개발자는 2012년 E3 국제 게임 박람회에서 리프트 초기모델을 가리켜 “지금껏 세상에 나온 최고의 VR 데모작”이라고 평했다.

2013년과 2014년 CES에서 오큘러스는 갈수록 향상된 기본모델을 선보이며 ‘최고상’을 다수 휩쓸었다. 그러다가 2014년 초 회사 경영권이 20억 달러에 페이스북으로 넘어갔다. 당시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는 오큘러스의 기술이 언젠가는 “수십억 명에게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올해 CES에선 종종 수십억 명(그리고 수백만 개 기업)이 VR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듯 보였다. 오큘러스는 CES의 가상현실·게임 전시장의 중심을 이루는 대형 부스를 마련했다. 관람객은 체험에 참여하려 2시간 이상 줄을 서 기다렸다. 오는 3월 600달러짜리 리프트가 출시되면 오큘러스는 개인 소비자용 고급 VR 시스템을 내놓는 최초의 회사가 된다. 한편 삼성·소니·HTC 모두 제각기 헤드셋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쏘시스템(프랑스의 3D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 사이파이(Syfy) 공상과학 케이블 채널, 미국 항공우주국(NASA) 등 다양한 출품업체들이 자신들의 최신 VR 앱을 공유했다. NASA는 독자적으로 무료 구글 카드보드 플랫폼을 이용하는 화성 테마 VR 체험을 제공했다.VR이 마침내 비상의 날갯짓을 하게 된 데는 한 가지 비결이 있다. 넌더리를 내던 엔터테인먼트 또는 전자업종 종사자조차 열광적인 마니아로 바꿔놓는 능력이다. 오큘러스의 제이슨 루빈 게임 개발팀장은 “개발자가 미팅할 시간이 없다고 하면 제품을 하나 보낸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다시 전화가 걸려와 ‘이런, 정말 미안해요. 우리 만나서 이야기해요’라고 말한다.” ‘마션 VR 체험’의 출범 파티에서 할리우드 중역들은 공들여 치장한 머리 위에 리프트 헤드셋을 조심스럽게 올렸다가 5분이 지난 뒤에는 태도를 바꿔 좀 더 보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 프로젝트의 로버트 스트롬버그 팀장은 아카데미상 수상 시각효과 아티스트이자 히트작 영화 ‘말레피센트’의 감독이다. 하지만 잘 나가던 할리우드 경력을 접고 VR의 미래에 인생을 걸었다.

1990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과학자가 ‘가상 인터페이스 환경 워크스테이션’ 실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VPL의 아이폰(EyePhone)과 데이터 글러브를 이용하고 있다(왼쪽). CES 2016에서 최신 오큘러스 리프트 헤드셋과 터치 콘트롤러를 체험하는 기자.
스트롬버그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약 2년 전 ‘말레피센트’의 포스트프로덕션(촬영 후 마무리 작업) 중일 때 오큘러스라는 회사가 페이스북으로 넘어간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고 스트롬버그 팀장은 말했다. “귀가 솔깃해져 오큘러스에 전화를 걸었더니 와서 직접 보라고 나를 회사로 초대했다. 바로 그날 나도 곧바로 가상현실 회사를 차렸다.”

스트롬버그 팀장과 함께 ‘마션 VR 체험’을 제작한 폭스 영화사도 앞날을 낙관한다. “우리를 따라 우주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머리에 뭔가 착용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고 폭스 미래전문가(futurist, 그의 진짜 직함이다) 테드 실로위츠는 말했다. CES에 참가한 주요 미디어 업체는 폭스뿐이 아니었다. 지난해 구글 카드보드 VR 뷰어를 구독자 120만 명에게 무료 배급한 뉴욕타임스 관계자도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제작한 VR 영화 9편에 덧붙여 이제부턴 매달 2편씩 새 VR 비디오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할리우드 제작자로부터 NASA 과학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열광할지 몰라도 VR은 게임 시장에 기반을 구축하게 될 듯하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면 게이머가 필요하다”고 다쏘의 데이비드 나혼 몰입형 가상실험실장은 말한다. “대규모 시장이 형성돼야 한다.”

슈퍼데이터가 예상하는 올해 VR 시장 매출액 51억 달러 중 약 35억 달러는 거의 전적으로 게임과 관련된다. 이들은 올해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VR 모델 130만 대와 함께 PC 기반 VR 헤드셋 540만 대가 출시될 것으로 예상한다. 삼성의 기어 VR과 구글 카드보드 같은 보급형 스마트폰 기반 VR 단말기가 소비자에게 호응을 얻음에 따라 모바일 게임도 VR의 정착에 큰 역할을 할 전망이다. 올해 모바일 VR 헤드셋 4200만 대가 출고될 것으로 슈퍼데이터는 내다본다.

현재 VR 시장에서 게임이 갖는 중요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CES에선 없었다. 소니로부터 오큘러스, HTC에 이르기까지 제품 데모행사는 대부분 게임 기반이었다. 소니의 ‘런던 강도(London Heist)’ 게임에선 이용자가 도주 차량의 탑승자가 된다. 이용자의 돈을 빼앗으려 애쓰는 공격자들을 쏘아 맞춰야 한다. 오큘러스의 총격 게임 ‘불릿 트레인(Bullet Train)’에선 영화 ‘매트릭스’ 스타일로 시간의 흐름을 늦추고 날아오는 총알을 잡아 공격자들에게 되던질 수 있다.

HTC는 우주 모험 게임 ‘엘리트 데인저러스(Elite: Dangerous)’와 기발한 ‘잡 시뮬레이터(Job Simulator)’를 선보였다. ‘잡 시뮬레이터’에선 커피를 타고, 컴퓨터를 켜고, 전화를 받는 등의 과제가 주어진다. 오큘러스의 더 흥미로운 데모작 중 하나는 ‘토이박스(Toybox)’ 환경이었다. 다른 사람(당시엔 옆 방에 있었지만 때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과 가상 공간을 공유하면서 탁구와 테더볼(기둥에 공을 매단 뒤 주고받는 게임)을 하고, 사방으로 블록을 던지고, 서로에게 축소 광선(shrink ray, 공상과학에서 물체를 작아지게 만드는 광선)을 쏜다. 단순히 인공 환경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는 완벽한 쌍방향 체험으로서 VR의 잠재력을 실감나게 맛보여준다.이처럼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소비자용 VR 시장은 아직 걸음마단계다. 삼성전자의 닉 디칼로 VR 팀장은 “VR 시장은 휴대전화에 비유하자면 플립폰 시대”라고 평했다. 오큘러스의 루빈 개발팀장은 “VR이 대중시장에 도달하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현재 최고의 VR 신제품 가격은 대중적이지 않다. 600달러짜리 리프트는 충동 구매할 만한 가격수준이 아니다. 특히 그것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마력을 가진 PC에 추가로 최소 1000달러는 들 것이다. 올 후반 출시될 예정인 HTC 바이브는 리프트보다 판매가가 더 높을지 모른다. 한편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VR의 판매가는 최소 400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플레이스테이션 4 게임기보다도 비싼 가격이다.

게다가 얼마나 큰 규모의 소비자 그룹에게 호응을 얻게 될지도 의문이다. 짐머만은 “피로감이 변수”라며 초기 VR 시스템이 뜨지 못한 한 가지 이유로 디스플레이가 머리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모습이 이용자가 예상하는 이미지보다 한 박자 늦었다는 의미다. 그것이 뱃멀미 비슷한 증상을 초래했다. 현재의 시스템은 대체로 그 문제를 해소했지만 완전히 해결하기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 점은 소비자기술협회의 스티브 쾨닉 산업분석 팀장도 부인하지 않는다. “대중시장 소비자가 어떻게 반응할까? 돌아오는 피드백을 보면서 배워나갈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 우려도 업계 관계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짐머만은 “몰입 기술에 사람들이 넋을 잃을 듯하다”고 말했다. 다쏘의 나혼 실장은 “대박날 것”이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오늘날의 VR 헤드셋은 영화 ‘스타트렉’의 홀로데크(holodeck, 홀로그램 시뮬레이션을 제공하는 가상 공간)와 유사한 몰입 환경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과도기의 기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발전은 VR 선구자 서덜랜드가 초창기 두부 착용 기기의 개발에 착수할 때 꿈꿨던 미래를 열어줄 가능성이 크다.

그는 1965년 이렇게 썼다. “궁극의 디스플레이는 물론 방 안에 있는 물질의 존재를 컴퓨터가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 방에 놓인 의자는 앉을 수 있고, 수갑은 사람을 속박하고, 총알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적절히 프로그래밍을 하면 그와 같은 디스플레이는 말 그대로 앨리스가 발을 들여놓은 멋진 신세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마크 퍼튼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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