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부영웅’ 가수 하춘화
‘한국의 기부영웅’ 가수 하춘화
여섯 살에 데뷔해 55년째 활동하고 있는 가수 하춘화. 45년 동안 200억원 넘게 기부한 소문난 자선가다. 그가 기부를 시작한 데는 한 사람의 영향이 컸다. 최근에는 기부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다고 한다. 7월 12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아버지였다. 지금의 가수 하춘화(61)를 있게 한 원동력은. 나눔의 중요성을 알려준 이도 아버지다. 하춘화 하면 떠오르는 ‘큰 눈’ 역시 아버지를 닮았다. 하씨의 아버지 하종오(97)씨는 1919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나 딸 넷을 낳기 전 부산으로 이사해 로프 생산회사를 경영했다. 하춘화 씨가 5살 때 서울로 이사하면서 장안에 노래 실력이 알려졌고 아버지는 그를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4층에 있던 동화예술학원에 입학시켰다. 그것이 하춘화 가수인생의 시작이다.
아버지께서 딸이 가수가 되기를 바라셨나요.
당시 어느 집에서 대중예술인이 나왔다고 하면 ‘아유, 저 집은 어쩌나’라고 할 만큼 사회 분위기가 그런 직업을 무시할 때였어요. 근데 아버지는 부모의 역할이 자식의 소질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고시공부를 하다 폐병 때문에 그만둔 터라 딸 넷 중 하나는 법관이 됐으면 하셨지만 ‘내 자식이 그쪽(노래)으로 타고났는데 어쩌겠느냐’며 집안에서 유일하게 저를 후원해주셨어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가수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데뷔 때를 기억하나요(하춘화는 1961년 최연소 독집 음반 ‘효녀 심청 되오리다’로 데뷔했다).
어렴풋이요. 8곡이 들어가는 10인치 LP판에 녹음한 기억이 나요. 세계 최연소 가수라고 해서 외국 기자들이 취재를 올 만큼 화제였어요. 가수를 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 나는 가수를 해야 하는 것,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 같아요. 마치 가수로 태어난 것처럼요.(웃음) 3살 때 대중가요 300곡을 불렀다니…. 운명은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를 보면 운명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해요.
그래도 어린 딸이 가수를 한다니 걱정하셨을 듯 해요.
사람들이 가수를 딴따라, 광대라고 부르며 얕잡아 봤는데도 늘 ‘너는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니 그걸 어려운 사람들과 나눠서 가수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선후배들이 본받을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라’고 가르치셨어요. 너무 어릴 때라 아버지가 말씀하시니까 그냥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요즘은 실제로 송해 선생님, 김흥국 씨, 태진아 씨, 박상철 씨, 이상벽 씨 같은 선후배분들이 자선공연에 무료로 동참하거나 기부금을 보태주시기도 해요.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 때 아버지께서 기부문화를 가르치신 게 놀랍습니다.
좀 남다르셨어요. 시대를 앞서간다고 할까요. 아버지가 장손인데 집에 딸만 넷이었어요. 할머니께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심한 말씀도 하셨다는데 아버지는 ‘앞으로 아들, 딸 따질 필요 없는 시대가 온다. 나는 딸 넷을 잘 키우겠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대요. 요즘은 정말 딸을 더 좋아한다죠? 또 데뷔 후에 일본으로 귀화한 유명 프로레슬러 역도산이 한국에 와 조선호텔에서 만났어요. ‘이 아이를 일본으로 데려가 키우겠다’고 해서 아버지도 흔쾌히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며 허락하셨다가 귀화를 해야 한다는 말에 단호히 거절하셨어요. 한국 사람으로 이름을 빛내라는 거죠. 제가 45년 동안 기부하면서 한 번도 돈이 아깝다고 여긴 적이 없었던 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 돈은 당연히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써야 한다고 교육 받았거든요.
그럼 아버지의 자선활동을 보고 자라신 건가요.
특별히 어떤 활동을 하셨다기보다는 돈을 별로 강조하지 않으셨어요. 명예가 중요하다고 하셨죠. 꿔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그쪽 사정이 어려우면 오히려 돈을 주고 오시곤 했어요. 만약 돈 욕심이 있었다면 부산에서 사업을 계속 하지 월급쟁이 생활을 하러 서울로 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럼 데뷔 때부터 기부를 하신 건가요.
그때는 너무 어렸고 히트곡도 없었어요. 16살 때 ‘물새 한 마리’가 나오면서 하춘화 라는 이름 석자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됐지요. 제1회 하춘화 리사이틀을 하고 나서 첫 기부를 했어요. 경기도 안양에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나자로 마을’이 있었어요. 환자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고(故) 육영수 여사님도 비품을 넣어주곤 하셨는데 거기에 공연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죠.
공연 수익금은 늘 자선활동에 쓰시나요
글쎄, 자선이 먼저냐, 공연이 먼저냐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자선을 하기 위해서 공연을 한다는 말이 더 맞겠네요. 1년 열두 달 지방공연을 가면 그 지역의 가장 어려운 곳을 도왔어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도 기부하고요. 군수님, 시장님을 초대해 관객이 보는 앞에서 공연 수익금을 전달해요. 얼마 전에는 공연 수익금 1억3000만원을 서울 25개 구에 나눠서 기부했고요. 올해 12월에는 부산 시민회관에서 독거노인을 위한 자선공연을 할 계획입니다.
200억원이라는 기부 액수는 어떻게 나온 겁니까.
기부는 조용히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2011년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을 할 때 서울 오류동 다문화가정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 건립 기금을 모았어요. 그런데 진수희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좋은 일은 널리 알려야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된다’고 해서 기자회견에서 얘기를 했는데 한 기자가 ‘이제까지 기부한 금액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어 제가 어림잡아 급하게 얘기한 거였어요(웃음). 처음 안양 나자로 마을에 기부한 금액이 1000만원 이상이었는데 당시 330㎡(100평)짜리 집값이 300~400만원이었어요. 그때부터 화제가 된 것 같아요.
45년 동안 매년 기부를 해왔다는 게 놀랍습니다.
크게 하려고 하면 자꾸 미루게 돼요. 기부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주저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주 작은 것부터, 가까운 곳부터 찾아 하면 됩니다. 가령 우리 마을에 노인잔치를 하는데 식사비를 보태드린다든지 그런 게 다 기부죠.
최근에는 아프리카도 다녀오셨지요
3월에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인 ‘세이브더 칠드런’과 함께 잠비아에 다녀왔어요. 아프리카 봉사는 처음 간 건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많은 단체가 한 달에 3만원이면 아프리카 아이 몇 명을 살릴 수 있다 이런 광고를 하잖아요. 근데 저는 아니,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애들이 많은데 왜 굳이 외국 애들을 돕나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처음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연락 왔을 때도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열심히 도울 거라고 거절했어요. 그런데 세부적인 내용을 듣고 나서 오래 고민한 끝에 가기로 한 거죠.
가보시니 어땠나요
막상 결정하고 나니 두려운 거예요. 내가 괜히 가서 그 사람들을 귀찮게만 하고 오는 게 아닌가 싶고요. 직접 가보니 아프리카 봉사 다니는 사람들 이유가 어떻든 간에 쉽게 생각할 게 아니에요. 우선 멀어요.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야 하는데 가는데 36시간, 오는데 42시간 걸려요. 공항 대기 4, 5시간은 보통이고요. 거기서 벌써 지치더라고요. 잠비아에서 목적지인 온돌라에 들어가려면 차를 타고 매일 비포장도로를 4시간 동안 달려야 해요. 가다가 바퀴가 웅덩이에 빠지면 내려서 다 밀어요. 더운 건 물론이고 화장실이 없어서 물도 함부로 못 마셔요. 마실 물도 충분히 않고요. 점심은 굶어요. 샌드위치를 준비해 가도 그 사람들 앞에서 먹을 수가 없잖아요. 하루는 다같이 음식을 준비해서 몇백 명이 함께 점심파티를 열었어요.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학교에 지붕도 없고 비가 오면 휴교예요. 아이들이 일을 해야 먹고 살 수가 있어요. 5월에 학교를 지어주기로 하고 돌아오는데 발이 안 떨어지고 뒤통수가 당기더라고요.
기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신 거군요.
아이들은 국경·사상·이념을 초월해서 도와야 하는데 그 동안 제가 너무 답답한 생각을 한 거죠. 부끄러웠어요.
삶에서 기부가 어떤 의미입니까.
처음에는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명감 같은 게 생겼어요.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하루 밥 세끼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진 거죠. 열심히 무대에서 뛰어 번 돈을 어려운 분들과 나눠야 한다 그게 머릿속에 각인된 것 같아요. 기부로 얻은 마음의 뿌듯함은 돈을 받거나 뭐가 생겼을 때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요. 기부를 하면서 살아가는 의미를 얻는 거죠.
제일 뿌듯했던 기억은 뭔가요.
중요한 건 관객들에게 최고의 공연을 보여주고 좋은 일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자선만 하고 공연이 엉망이면 안되잖아요. 무대는 항상 최고여야 해요. 제 자존심이니까요. 5년에 한번씩 공연을 하는데 피나는 노력을 해요.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공연 한번 하고 나면 몸무게가 5kg씩 빠지거든요. 그래도 공연이 끝나고 수익금을 전달할 때 그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기억이 ‘싹’ 사라지는 거예요. 그때가 제일 보람 있고 흐뭇하죠. 산모들이 출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재미에 낳고, 또 낳고 하잖아요. 비슷해요.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영암군과 함께 영암에 하춘화기념관을 짓기로 했어요. 부모님 고향인데다 제 노래 ‘영암 아리랑’으로 인연이 깊지요. 기념관을 한국 전통을 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또 대중음악전문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는 것이 마지막 꿈입니다. 20대부터 생각해 온 꿈인데 현재 기초작업을 하고 있어요.
아버지께 한 말씀 하신다면요.
늘 큰 공연이 끝나면 ‘장하다’라고 해주세요. 올해 초 데뷔 55주년 기념 공연에는 오셨는데 5년 후 60주년 기념 공연에도 오실 수 있기를 바라요. 아버지가 제 노래 중 ‘무죄’를 제일 좋아하시거든요. 가수 하춘화를 만들고 철학을 심어준 것은 아버지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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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가수 하춘화를 있게 한 사람
아버지께서 딸이 가수가 되기를 바라셨나요.
당시 어느 집에서 대중예술인이 나왔다고 하면 ‘아유, 저 집은 어쩌나’라고 할 만큼 사회 분위기가 그런 직업을 무시할 때였어요. 근데 아버지는 부모의 역할이 자식의 소질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고시공부를 하다 폐병 때문에 그만둔 터라 딸 넷 중 하나는 법관이 됐으면 하셨지만 ‘내 자식이 그쪽(노래)으로 타고났는데 어쩌겠느냐’며 집안에서 유일하게 저를 후원해주셨어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가수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데뷔 때를 기억하나요(하춘화는 1961년 최연소 독집 음반 ‘효녀 심청 되오리다’로 데뷔했다).
어렴풋이요. 8곡이 들어가는 10인치 LP판에 녹음한 기억이 나요. 세계 최연소 가수라고 해서 외국 기자들이 취재를 올 만큼 화제였어요. 가수를 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 나는 가수를 해야 하는 것,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 같아요. 마치 가수로 태어난 것처럼요.(웃음) 3살 때 대중가요 300곡을 불렀다니…. 운명은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를 보면 운명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해요.
그래도 어린 딸이 가수를 한다니 걱정하셨을 듯 해요.
사람들이 가수를 딴따라, 광대라고 부르며 얕잡아 봤는데도 늘 ‘너는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니 그걸 어려운 사람들과 나눠서 가수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선후배들이 본받을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라’고 가르치셨어요. 너무 어릴 때라 아버지가 말씀하시니까 그냥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요즘은 실제로 송해 선생님, 김흥국 씨, 태진아 씨, 박상철 씨, 이상벽 씨 같은 선후배분들이 자선공연에 무료로 동참하거나 기부금을 보태주시기도 해요.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 때 아버지께서 기부문화를 가르치신 게 놀랍습니다.
좀 남다르셨어요. 시대를 앞서간다고 할까요. 아버지가 장손인데 집에 딸만 넷이었어요. 할머니께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심한 말씀도 하셨다는데 아버지는 ‘앞으로 아들, 딸 따질 필요 없는 시대가 온다. 나는 딸 넷을 잘 키우겠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대요. 요즘은 정말 딸을 더 좋아한다죠? 또 데뷔 후에 일본으로 귀화한 유명 프로레슬러 역도산이 한국에 와 조선호텔에서 만났어요. ‘이 아이를 일본으로 데려가 키우겠다’고 해서 아버지도 흔쾌히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며 허락하셨다가 귀화를 해야 한다는 말에 단호히 거절하셨어요. 한국 사람으로 이름을 빛내라는 거죠. 제가 45년 동안 기부하면서 한 번도 돈이 아깝다고 여긴 적이 없었던 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 돈은 당연히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써야 한다고 교육 받았거든요.
“시대 앞서가신, 남다른 분이셨다”
그럼 아버지의 자선활동을 보고 자라신 건가요.
특별히 어떤 활동을 하셨다기보다는 돈을 별로 강조하지 않으셨어요. 명예가 중요하다고 하셨죠. 꿔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그쪽 사정이 어려우면 오히려 돈을 주고 오시곤 했어요. 만약 돈 욕심이 있었다면 부산에서 사업을 계속 하지 월급쟁이 생활을 하러 서울로 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럼 데뷔 때부터 기부를 하신 건가요.
그때는 너무 어렸고 히트곡도 없었어요. 16살 때 ‘물새 한 마리’가 나오면서 하춘화 라는 이름 석자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됐지요. 제1회 하춘화 리사이틀을 하고 나서 첫 기부를 했어요. 경기도 안양에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나자로 마을’이 있었어요. 환자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고(故) 육영수 여사님도 비품을 넣어주곤 하셨는데 거기에 공연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죠.
공연 수익금은 늘 자선활동에 쓰시나요
글쎄, 자선이 먼저냐, 공연이 먼저냐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자선을 하기 위해서 공연을 한다는 말이 더 맞겠네요. 1년 열두 달 지방공연을 가면 그 지역의 가장 어려운 곳을 도왔어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도 기부하고요. 군수님, 시장님을 초대해 관객이 보는 앞에서 공연 수익금을 전달해요. 얼마 전에는 공연 수익금 1억3000만원을 서울 25개 구에 나눠서 기부했고요. 올해 12월에는 부산 시민회관에서 독거노인을 위한 자선공연을 할 계획입니다.
200억원이라는 기부 액수는 어떻게 나온 겁니까.
기부는 조용히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2011년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을 할 때 서울 오류동 다문화가정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 건립 기금을 모았어요. 그런데 진수희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좋은 일은 널리 알려야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된다’고 해서 기자회견에서 얘기를 했는데 한 기자가 ‘이제까지 기부한 금액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어 제가 어림잡아 급하게 얘기한 거였어요(웃음). 처음 안양 나자로 마을에 기부한 금액이 1000만원 이상이었는데 당시 330㎡(100평)짜리 집값이 300~400만원이었어요. 그때부터 화제가 된 것 같아요.
45년 동안 매년 기부를 해왔다는 게 놀랍습니다.
크게 하려고 하면 자꾸 미루게 돼요. 기부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주저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주 작은 것부터, 가까운 곳부터 찾아 하면 됩니다. 가령 우리 마을에 노인잔치를 하는데 식사비를 보태드린다든지 그런 게 다 기부죠.
최근에는 아프리카도 다녀오셨지요
3월에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인 ‘세이브더 칠드런’과 함께 잠비아에 다녀왔어요. 아프리카 봉사는 처음 간 건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많은 단체가 한 달에 3만원이면 아프리카 아이 몇 명을 살릴 수 있다 이런 광고를 하잖아요. 근데 저는 아니,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애들이 많은데 왜 굳이 외국 애들을 돕나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처음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연락 왔을 때도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열심히 도울 거라고 거절했어요. 그런데 세부적인 내용을 듣고 나서 오래 고민한 끝에 가기로 한 거죠.
가보시니 어땠나요
막상 결정하고 나니 두려운 거예요. 내가 괜히 가서 그 사람들을 귀찮게만 하고 오는 게 아닌가 싶고요. 직접 가보니 아프리카 봉사 다니는 사람들 이유가 어떻든 간에 쉽게 생각할 게 아니에요. 우선 멀어요.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야 하는데 가는데 36시간, 오는데 42시간 걸려요. 공항 대기 4, 5시간은 보통이고요. 거기서 벌써 지치더라고요. 잠비아에서 목적지인 온돌라에 들어가려면 차를 타고 매일 비포장도로를 4시간 동안 달려야 해요. 가다가 바퀴가 웅덩이에 빠지면 내려서 다 밀어요. 더운 건 물론이고 화장실이 없어서 물도 함부로 못 마셔요. 마실 물도 충분히 않고요. 점심은 굶어요. 샌드위치를 준비해 가도 그 사람들 앞에서 먹을 수가 없잖아요. 하루는 다같이 음식을 준비해서 몇백 명이 함께 점심파티를 열었어요.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학교에 지붕도 없고 비가 오면 휴교예요. 아이들이 일을 해야 먹고 살 수가 있어요. 5월에 학교를 지어주기로 하고 돌아오는데 발이 안 떨어지고 뒤통수가 당기더라고요.
“아이들은 국경·사상·이념을 초월해서 도와야”
기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신 거군요.
아이들은 국경·사상·이념을 초월해서 도와야 하는데 그 동안 제가 너무 답답한 생각을 한 거죠. 부끄러웠어요.
삶에서 기부가 어떤 의미입니까.
처음에는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명감 같은 게 생겼어요.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하루 밥 세끼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진 거죠. 열심히 무대에서 뛰어 번 돈을 어려운 분들과 나눠야 한다 그게 머릿속에 각인된 것 같아요. 기부로 얻은 마음의 뿌듯함은 돈을 받거나 뭐가 생겼을 때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요. 기부를 하면서 살아가는 의미를 얻는 거죠.
제일 뿌듯했던 기억은 뭔가요.
중요한 건 관객들에게 최고의 공연을 보여주고 좋은 일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자선만 하고 공연이 엉망이면 안되잖아요. 무대는 항상 최고여야 해요. 제 자존심이니까요. 5년에 한번씩 공연을 하는데 피나는 노력을 해요.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공연 한번 하고 나면 몸무게가 5kg씩 빠지거든요. 그래도 공연이 끝나고 수익금을 전달할 때 그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기억이 ‘싹’ 사라지는 거예요. 그때가 제일 보람 있고 흐뭇하죠. 산모들이 출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재미에 낳고, 또 낳고 하잖아요. 비슷해요.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영암군과 함께 영암에 하춘화기념관을 짓기로 했어요. 부모님 고향인데다 제 노래 ‘영암 아리랑’으로 인연이 깊지요. 기념관을 한국 전통을 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또 대중음악전문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는 것이 마지막 꿈입니다. 20대부터 생각해 온 꿈인데 현재 기초작업을 하고 있어요.
아버지께 한 말씀 하신다면요.
늘 큰 공연이 끝나면 ‘장하다’라고 해주세요. 올해 초 데뷔 55주년 기념 공연에는 오셨는데 5년 후 60주년 기념 공연에도 오실 수 있기를 바라요. 아버지가 제 노래 중 ‘무죄’를 제일 좋아하시거든요. 가수 하춘화를 만들고 철학을 심어준 것은 아버지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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