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희의 ‘삼국지로 본 사람 경영’(3) 장자방의 후예들
양선희의 ‘삼국지로 본 사람 경영’(3) 장자방의 후예들
한고조 유방(劉邦)의 건국공신인 장량(張良, 자 子房)은 건달 청년 유방을 중원의 황제로 올려놓은 책사로 선견지명과 계책에 능한 인물이었다. 단순히 주군을 보좌하는 책사가 아니라 자기 주군을 왕으로 만드는 킹메이커가 되는 장자방은 책사들의 롤모델이었고, 모든 제후들에게도 반드시 모시고 싶은 꿈의 모사였다. 후한말, 조조·유비·손권 진영에는 장자방에 비유할 만한 책사들이 있었으니 순욱, 곽가, 노숙, 방통이 그들이다. “내가 그대를 얻은 것은 고조께서 장자방을 얻은 것과 같다.” 조조는 영천(지금의 하남성 허창) 출신의 이름난 명사(名士) 순욱이 찾아오자 기쁨에 겨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언제나 정확한 판단력으로 조조로부터 “순욱은 늘 정확하지!”라는 평을 들으며 조조의 엄청난 인재 풀 중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한다. 순욱이 조조를 찾아간 것은 서기 191년, 조조가 동군태수로 있을 때였다. 그는 당대 명사들을 대거 배출했던 영천군의 명문가 호족 출신 명사였다. 어려서부터 ‘제왕을 보좌할 재능을 타고났다’는 평을 들은 그는 황건적이 출몰하는 등 난리의 한 가운데 있었던 고향 영천을 떠나 기주목이던 한복의 초청으로 기주로 갔다. 그가 기주에 갔을 때는 이미 한복이 권력을 잃고 원소가 기주목에 오른 뒤였다. 이때 같은 군 출신인 신평과 곽도, 동생인 순심이 모두 원소에게 임용되어 원소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의 인물됨을 헤아려본 뒤 그를 떠나 일개 동군태수였던 조조를 찾아간다.
남다르게 뛰어난 자질을 갖춘 킹메이커급 신하들은 주군을 고를 때 현재가 아닌 잠재력과 인물됨을 보고 선택한다. 제갈량이 그랬고, 순욱이 그랬다. 순욱은 주군이 스카우트하러 찾아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이 사람이다 싶은 주군을 찾아갔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순욱이 이런 혜안을 가지고 움직인 것은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의 일이다. 조조는 자신보다 아홉 살 아래인 순욱을 사마로 삼아 늘 정세를 묻고, 그의 의견에 따랐다. 순욱이 합류하고 난 이듬해 조조는 연주 태수가 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당대의 군웅들 중 조조라는 최고의 인물을 선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출발이 좋다고 모든 것이 좋은 건 아니다. 최고의 주군 밑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그에 걸맞은 업적을 쌓아야 한다.
순욱은 이 점에서도 남다른 성공을 거둔다. 우선 조조가 아버지 조숭 일행을 죽인 서주의 도겸을 정벌하러 연주를 비우고 떠나면서 순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한다. 이때 마침 진궁이 장막·장초 형제와 모의하여 여포를 연주의 주인으로 맞아들이며 배반을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때 대부분의 성이 진궁 일당에게 호응하여 연주 일대가 넘어갔지만, 순욱은 정욱과 함께 자신이 지키던 견성과 범현·동아 등 세 성을 지켜 조조가 돌아올 근거지를 마련해 놓는다.
도겸이 죽고 난 뒤 서주가 유비 손에 넘어가자 이에 분노한 조조가 다시 서주를 치겠다고 나선다. 이때 분노의 질주를 하던 대단한 조조를 ‘서주 정벌의 불리함’을 조목조목 들어 설명하고, 연주라는 근거를 다져놓도록 설득해 주저앉히기도 한다. 또 그 후 연주에서 여포를 내쫓고, 황건적을 무찔러 조조의 정예병 청주군을 얻고 난 뒤 그는 조조에게 환란 중에 있는 황제를 모실 것을 건의한다.
당시 동탁에 이어 이각과 곽사의 난으로 핍박받던 황제는 이미 황제라 할 수 없는 몰골이었지만, 동탁이 ‘황제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듯이 황제는 그를 모시는 제후에게 나름의 정통성을 구사할 수 있는 히든카드와 같은 것이었다. 이에 원소의 모사인 저수도 이미 원소에게 “황제를 모셔 낙양에서 유씨 종묘를 재건하고 천하에 호령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를 토벌한 다음 이 세력에 의지해 다른 세력들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당시 꿈이 남달리 큰 뛰어난 책사들의 경우 누구나 황제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분명하다. 문제는 자신의 주군이 직접 몸을 움직여 실행하느냐의 여부였다. 이에 저수의 주군이었던 게으른 원소는 실행하지 않았고, 순욱의 주군인 조조는 직접 몸을 움직여 황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도로 모시고 와서 이때부터 ‘황제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며 남들보다 일보 앞서게 된다.
그러나 조조가 황제만 모셔왔다고 난세의 패자(覇者)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제후들의 적이 된다. 가장 큰 적은 황하 이북을 병합해 가장 큰 세력을 떨치고 있는 원소였고, 이밖에도 동쪽으로는 여포, 남쪽으로는 장수(張繡)까지 황제를 모시고 있는 조조를 겨냥하고 있었다. 조조는 워낙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원소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장수와 싸워 패하고 돌아온 직후, 원소는 조조에게 교만하기 짝이 없는 편지를 보낸다. 조조는 원소를 토벌할 마음을 먹지만, 힘에서의 열세 때문에 주저한다. 이때 순욱은 조조가 원소를 이길 수밖에 없는 십승십패설(十勝十敗說)을 설파한다. 소설 『삼국지』에는 이를 곽가가 주장하고, 순욱이 동조하는 형태로 그려지지만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순욱이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약해지려는 주군을 다시 붙들어 세운 뒤, 그렇지만 지금 도모해야 할 화근은 원소가 아니라 여포임을 주지 시켜 여포를 치도록 하고, 원소를 안심시키도록 한다.
그는 여포를 무찌른 후에 전력 차가 과장하여 10배라는 원소와 맞붙어 싸워야하느냐를 놓고도 의연하게 정세분석을 통해 싸워서 이길 수 있음을 설파한다. 당시 원소 진영은 최대 세력이었던 만큼 조조 진영보다 월등한 군사력과 인재 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공융은 “원소는 영토가 넓고 군대가 강성하며, 전풍과 허유같이 지모가 뛰어난 선비와 심배와 봉기 같이 충성심 강한 신하가 있고, 안량과 문추 같은 용장이 있으니 이기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의 군사가 비록 많으나 군법이 정비되지 않고, 전풍은 고집이 너무 세서 윗사람 말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우며, 심배는 독단적이고, 봉기는 자기 말만 고집하고…” 등으로 원소 진영의 문제와 앞으로 일어날 내부 분란을 정확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실제로 후에 원소 진영에서 되어 돌아간 사정은 순욱의 예견대로였다. 그의 통찰력은 그 정도였다.
그는 사리사욕이 없고 검소하고 청아한 선비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조조는 자신이 정벌을 떠날 때면 늘 허도를 순욱에게 맡겨 지키도록 했다. 이처럼 그는 주군의 절대적 신뢰를 받았다. 또 조조는 순욱의 장남인 순운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아 사돈의 인연을 맺기도 한다.
또 조조는 멀리 원정을 떠나서도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의견을 묻곤 했다.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원소는 군량도 풍부했고, 군사도 많았다. 조조는 그들과 대치하는 데에서 몹시 지친다. 그에겐 이제 군량도 남지 않았다. 이때 조조는 그 싸움을 포기하려는 마음까지 먹고, 관도 철수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순욱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에 순욱은 관도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이렇게 답신을 보낸다.
“원소는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관도 땅을 취함으로써 주공과 승부를 내고자 하며, 실로 관도가 무너지면 허도도 위험에 처하니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약한 군사로 강한 군사와 맞서는 형국이니 관도에서 저들을 제압하지 못하면 결정적인 기회를 원소에게 돌려주게 될 것입니다. 이는 천하의 운을 가르는 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원소의 군사는 많다 하나 대개는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쓸모없는 것들이니 어찌 주공의 명철한 신무(神武)로 제어하지 못하리까? 군사의 열세로만 본다 해도 옛날 초와 한이 형양과 성고에서 싸우던 때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공께서는 군사적으로 맞서지 마시고, 저들의 보급로만 노려 끊으십시오. 길목을 지켜 숨통만 노리시고, 저들의 공략은 굳게 지키시며 물러서지 마십시오.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적의 예기를 끊고, 사기를 떨어뜨리며, 혼란을 초래한다면 그들도 내부 문제를 다스리느라 감히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리 되면 형세는 반드시 변할 것이니 기민하게 노리시고, 때를 놓치지 말고 적절히 대응하시면 어찌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리까.”
순욱의 편지는 현실적 고민 앞에 꺾여 들어가던 조조의 용기를 다시 북돋운다. 그러는 사이 순욱이 예견했듯이 원소 측 내부 갈등으로 정세가 변한다. 탐욕스러운 허유가 심배와의 갈등으로 조조에게 투항하여 원소의 군량 기지를 알려줌으로써 승기를 잡고, 원소의 지모를 겸비한 장수 장합이 투항함으로써 원소 진영은 급격히 무너진다. 조조는 이렇게 여포를 잡고, 원소를 무찔러 중원의 가장 너른 지역을 평정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땅은 유표의 형양과 손권의 강동, 유장의 익주와 마등의 양주 등 중원의 관점에선 외곽의 지역들이었다. 이쯤 되니 조조의 눈치 빠른 신하들은 조조를 국공(國公)으로 올리고, 황제가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에게 크나큰 특권으로 내리는 구석(九錫)의 예물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공론이 벌어진다. 조조도 자신의 공국을 세울 수 있는 공작의 지위로 올라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이 찬탈의 전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공작, 그 다음은 왕, 그 다음은 황위 찬탈로 이어질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 순간 순욱은 분연히 반대하며 간한다.
“승상께서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황실을 받들어 모신 것은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니 겸양하고 물러서는 금도를 지켜야 합니다. 군자는 덕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는 법이니 그런 특권은 누리지 마소서.”
그러나 조조는 이 말 때문에 순욱을 괘씸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조조는 군사를 일으켜 강남으로 진군하면서 순욱에게 함께 출정할 것을 명한다. 보통 조조가 출정하면 순욱이 남아 허도를 지켰던 기존 관행을 깬 것이다. 이에 순욱은 조조에게서 살의를 느끼고, 진군 도중 병이 났다며 따라가지 않고 수춘에 머문다. 그러던 어느 날, 조조의 심부름꾼이 순욱에게 와서 음식 합(盒)을 전달한다. 순욱이 열어보니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합이다. 순욱은 깜짝 놀란다. 먹을 것이 없다. 굶어죽으라는 말이다. 순욱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는 소설에 나온 이야기다. 실제로 빈 합 때문에 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그의 죽음은 분명 미스테리 속에 남아 있다.
순욱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삶도 어떤 의미에선 무결점이었다. 그는 청아하고 검소하고 겸허하여 식읍 2000호의 높은 녹봉을 받았지만 이를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고 본인은 검소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후세 사람들은 ‘순욱이 조조를 모심으로써 한 왕조가 무너지고 군주와 신하가 바뀌었다’고 비판하며 그의 처세를 문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정사의 주석에서 논하듯이 과연 순욱과 같은 인물이 당시 영웅을 보좌하여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려 할 때 선택할 수 대안이 조조가 아니면 누구였겠느냐는 질문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그의 주군 선택은 탁월했다. 그의 주군에 대한 보좌도 탁월했다.
신하로 사는 사람으로서 그의 잘못은 하나였다. 자신의 주군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조조가 의군을 일으킨 것이 난세를 바로잡고 조정을 지키려는 충정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조조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얘기했고, 또 자신의 신하들을 대하는데 예의가 있었고, 인재를 아꼈고 공평했고, 자신의 조상 3대를 욕했던 진림까지도 용서하고 받아들일 만큼 도량이 컸다. 그러니 오해할 만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쩌면 학자적 양심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자신은 충의와 기개가 있는 인물을 보좌하고 있다고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주군만은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설사 조조가 처음엔 충의와 기개로 나섰다 하더라도 인간은 변한다. 조조는 이룬 것이 너무 많았다. 중원에서 그는 황제보다 높았다. 그런데 그가 왜 누리지 않고 겸허하게 사양하며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이룬 게 많으면 그만큼 대우받으며 누리면서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런 점에서 순욱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또 그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렸다. 역린이란 용의 턱밑에 직경 한 자 정도의 거꾸로 박힌 비늘을 말하는데 이는 ‘임금의 변덕’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말은 한비자(韓非子)의 세난(說難)편에 있는 고사에서 나온다.
이는 춘추시대 위(衛) 영공(靈公)의 총신이었던 미자하(彌子瑕)의 고사에서 나온 얘기다. 위나라 법에는 군주의 수레를 몰래 타면 발을 자르는 형벌이 있었다. 그런데 미자하가 어머니가 병들었다며 군주의 수레를 빌려 타고 나갔다. 누군가 이를 군주에게 이르자 미자하를 사랑하던 군주는 “참 효자로구나. 어머니 병 때문에 발이 잘리는 벌까지 잊었구나”라고 말한다. 어느날은 군주를 모시고 과수원에 갔다가 미자하가 복숭아를 먹어보니 너무 맛이 있어서 제가 먹던 것을 군주에게 맛을 보라며 건넨다. 군주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맛있는 것을 제가 다 먹지 못하고 이렇게 내게 주는구나”하고 말했다. 그런데 사랑은 움직이는 거다. 어느 날 그에 대한 총애가 엷어지니 문득 당시의 일들이 떠오르며 화가 난다. ‘이 자가 건방지게 내 수레를 타고 가다니…, 이 자가 자기가 먹던 것을 내게 먹였다는 말이지.’ 그리고 영공은 미자하를 참한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과거엔 칭찬했던 행동을 나중엔 책망하게 된다. 그건 상황이 변한 게 아니라 군주의 애증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언을 드리거나 담론을 펼 때는 자신이 군주로부터 사랑을 받는지 미움을 받는지 확인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군주의 심사를 역린이라고 한다. 사람이 용을 길들여 탈 수는 있지만 이 역린을 건드리는 순간 죽는다는 것이다. 군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군주에게 바른 말을 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군주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심과 변덕이다. 『삼국지』에서도 수많은 군웅들 중 ‘믿음’의 경쟁력 하나로 황제까지 오른 유비를 제외하면 모두 의심과 변덕의 화신들이다. 이는 유비가 독특한 것이지 다른 군주들이 특별히 소인배여서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다.
조조는 처음엔 순욱의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조조가 세상을 평정하고 위세가 드높아지면서, 유가적 선비인 순욱의 말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순욱은 충의가 아니라 세상을 평정할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조조의 큰 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날로 높아져가는 주군의 눈높이를 미처 맞추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그리고 워낙 큰 신하는 군주의 총애를 잃으면 죽음 외엔 답이 없다. 그것이 큰 신하가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주군의 커가는 야심과 높아지는 눈높이에 맞춰 그를 황제로까지 추대하려는 무리들의 담론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이런 이치를 다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마지막 순간, 조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변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한 것은 그 순간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나이 50살. 그 나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정립하게 되고, 어떤 사람으로 살고 어떤 위치에서 죽고 싶고, 죽음 이후 세상에 어떤 이름을 남기고 싶은지 정리하게 된다. 그는 간웅 조조를 모시며 그의 패권을 도왔다. 그러나 조조가 찬탈한다면 역사는 그동안 조조의 뛰어난 업적보다 찬탈에 방점을 찍고 ‘찬탈자’로서 비난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최고 모사였던 자신의 이름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겠는가. 선비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려면 그에게는 대안이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맞바꾸는 것.
공자가 말한 ‘사생취의(捨生取義)’처럼 목숨을 버리더라도 의를 취하는 것이 유가 선비의 지향점이다. 그러니 타자(他者)의 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신하가 자신의 의를 실현하고 의지를 관철하려 할 때 갈 수 있는 길은 목숨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조조 같은 인물을 보필하면서 순욱처럼 살았다면,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영웅을 세웠고, 자신은 품위를 지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조조는 끝내 성공한 군주가 되었고, 인생 말년에는 수없이 살인을 하며 인간으로서 의사로서의 삶은 허무하게 무너진다.
순욱은 죽기 전에 자신이 국가를 다스리고 전쟁을 도모하는 책략과 계획을 적어놓은 편지들을 모두 불에 태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조를 세우고, 그는 깔끔하게 소멸한 것이다. 순욱은 죽는 순간 자신의 기록을 모두 불태운 것으로 보아 자신의 삶이 헛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으로서 역사에서 조조의 다른 모사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원래 한 시대의 질서를 다시 세운 위대한 군주의 척신들은 품위는커녕 영혼을 지키기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장량이 한나라 건국 후에는 조정을 떠나 정치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지킨 것처럼 이런 신하는 절정에서는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사실 순욱은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아 명예로운 은퇴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신하의 자리에서 품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그는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순욱에게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이것이다. ‘주군의 총애는 믿을 것이 못 된다.’
-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여류(余流) 삼국지』저자
양선희 -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 ‘양선희의 시시각각’을 연재하는 중이다. 2011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품집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 미디어), 『카페 만우절』(나남) 『5월의 파리를 사랑해』(문예중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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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동군태수였던 조조를 찾아간 혜안
남다르게 뛰어난 자질을 갖춘 킹메이커급 신하들은 주군을 고를 때 현재가 아닌 잠재력과 인물됨을 보고 선택한다. 제갈량이 그랬고, 순욱이 그랬다. 순욱은 주군이 스카우트하러 찾아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이 사람이다 싶은 주군을 찾아갔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순욱이 이런 혜안을 가지고 움직인 것은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의 일이다. 조조는 자신보다 아홉 살 아래인 순욱을 사마로 삼아 늘 정세를 묻고, 그의 의견에 따랐다. 순욱이 합류하고 난 이듬해 조조는 연주 태수가 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당대의 군웅들 중 조조라는 최고의 인물을 선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출발이 좋다고 모든 것이 좋은 건 아니다. 최고의 주군 밑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그에 걸맞은 업적을 쌓아야 한다.
순욱은 이 점에서도 남다른 성공을 거둔다. 우선 조조가 아버지 조숭 일행을 죽인 서주의 도겸을 정벌하러 연주를 비우고 떠나면서 순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한다. 이때 마침 진궁이 장막·장초 형제와 모의하여 여포를 연주의 주인으로 맞아들이며 배반을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때 대부분의 성이 진궁 일당에게 호응하여 연주 일대가 넘어갔지만, 순욱은 정욱과 함께 자신이 지키던 견성과 범현·동아 등 세 성을 지켜 조조가 돌아올 근거지를 마련해 놓는다.
도겸이 죽고 난 뒤 서주가 유비 손에 넘어가자 이에 분노한 조조가 다시 서주를 치겠다고 나선다. 이때 분노의 질주를 하던 대단한 조조를 ‘서주 정벌의 불리함’을 조목조목 들어 설명하고, 연주라는 근거를 다져놓도록 설득해 주저앉히기도 한다. 또 그 후 연주에서 여포를 내쫓고, 황건적을 무찔러 조조의 정예병 청주군을 얻고 난 뒤 그는 조조에게 환란 중에 있는 황제를 모실 것을 건의한다.
당시 동탁에 이어 이각과 곽사의 난으로 핍박받던 황제는 이미 황제라 할 수 없는 몰골이었지만, 동탁이 ‘황제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듯이 황제는 그를 모시는 제후에게 나름의 정통성을 구사할 수 있는 히든카드와 같은 것이었다. 이에 원소의 모사인 저수도 이미 원소에게 “황제를 모셔 낙양에서 유씨 종묘를 재건하고 천하에 호령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를 토벌한 다음 이 세력에 의지해 다른 세력들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당시 꿈이 남달리 큰 뛰어난 책사들의 경우 누구나 황제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분명하다. 문제는 자신의 주군이 직접 몸을 움직여 실행하느냐의 여부였다. 이에 저수의 주군이었던 게으른 원소는 실행하지 않았고, 순욱의 주군인 조조는 직접 몸을 움직여 황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도로 모시고 와서 이때부터 ‘황제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며 남들보다 일보 앞서게 된다.
그러나 조조가 황제만 모셔왔다고 난세의 패자(覇者)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제후들의 적이 된다. 가장 큰 적은 황하 이북을 병합해 가장 큰 세력을 떨치고 있는 원소였고, 이밖에도 동쪽으로는 여포, 남쪽으로는 장수(張繡)까지 황제를 모시고 있는 조조를 겨냥하고 있었다. 조조는 워낙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원소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원소를 이길 수 있는 ‘십승십패설’ 설파
그는 여포를 무찌른 후에 전력 차가 과장하여 10배라는 원소와 맞붙어 싸워야하느냐를 놓고도 의연하게 정세분석을 통해 싸워서 이길 수 있음을 설파한다. 당시 원소 진영은 최대 세력이었던 만큼 조조 진영보다 월등한 군사력과 인재 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공융은 “원소는 영토가 넓고 군대가 강성하며, 전풍과 허유같이 지모가 뛰어난 선비와 심배와 봉기 같이 충성심 강한 신하가 있고, 안량과 문추 같은 용장이 있으니 이기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의 군사가 비록 많으나 군법이 정비되지 않고, 전풍은 고집이 너무 세서 윗사람 말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우며, 심배는 독단적이고, 봉기는 자기 말만 고집하고…” 등으로 원소 진영의 문제와 앞으로 일어날 내부 분란을 정확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실제로 후에 원소 진영에서 되어 돌아간 사정은 순욱의 예견대로였다. 그의 통찰력은 그 정도였다.
그는 사리사욕이 없고 검소하고 청아한 선비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조조는 자신이 정벌을 떠날 때면 늘 허도를 순욱에게 맡겨 지키도록 했다. 이처럼 그는 주군의 절대적 신뢰를 받았다. 또 조조는 순욱의 장남인 순운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아 사돈의 인연을 맺기도 한다.
또 조조는 멀리 원정을 떠나서도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의견을 묻곤 했다.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원소는 군량도 풍부했고, 군사도 많았다. 조조는 그들과 대치하는 데에서 몹시 지친다. 그에겐 이제 군량도 남지 않았다. 이때 조조는 그 싸움을 포기하려는 마음까지 먹고, 관도 철수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순욱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에 순욱은 관도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이렇게 답신을 보낸다.
“원소는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관도 땅을 취함으로써 주공과 승부를 내고자 하며, 실로 관도가 무너지면 허도도 위험에 처하니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약한 군사로 강한 군사와 맞서는 형국이니 관도에서 저들을 제압하지 못하면 결정적인 기회를 원소에게 돌려주게 될 것입니다. 이는 천하의 운을 가르는 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원소의 군사는 많다 하나 대개는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쓸모없는 것들이니 어찌 주공의 명철한 신무(神武)로 제어하지 못하리까? 군사의 열세로만 본다 해도 옛날 초와 한이 형양과 성고에서 싸우던 때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공께서는 군사적으로 맞서지 마시고, 저들의 보급로만 노려 끊으십시오. 길목을 지켜 숨통만 노리시고, 저들의 공략은 굳게 지키시며 물러서지 마십시오.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적의 예기를 끊고, 사기를 떨어뜨리며, 혼란을 초래한다면 그들도 내부 문제를 다스리느라 감히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리 되면 형세는 반드시 변할 것이니 기민하게 노리시고, 때를 놓치지 말고 적절히 대응하시면 어찌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리까.”
순욱의 편지는 현실적 고민 앞에 꺾여 들어가던 조조의 용기를 다시 북돋운다. 그러는 사이 순욱이 예견했듯이 원소 측 내부 갈등으로 정세가 변한다. 탐욕스러운 허유가 심배와의 갈등으로 조조에게 투항하여 원소의 군량 기지를 알려줌으로써 승기를 잡고, 원소의 지모를 겸비한 장수 장합이 투항함으로써 원소 진영은 급격히 무너진다. 조조는 이렇게 여포를 잡고, 원소를 무찔러 중원의 가장 너른 지역을 평정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땅은 유표의 형양과 손권의 강동, 유장의 익주와 마등의 양주 등 중원의 관점에선 외곽의 지역들이었다.
청아하고 검소하고 겸허한 선비의 허무한 죽음
“승상께서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황실을 받들어 모신 것은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니 겸양하고 물러서는 금도를 지켜야 합니다. 군자는 덕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는 법이니 그런 특권은 누리지 마소서.”
그러나 조조는 이 말 때문에 순욱을 괘씸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조조는 군사를 일으켜 강남으로 진군하면서 순욱에게 함께 출정할 것을 명한다. 보통 조조가 출정하면 순욱이 남아 허도를 지켰던 기존 관행을 깬 것이다. 이에 순욱은 조조에게서 살의를 느끼고, 진군 도중 병이 났다며 따라가지 않고 수춘에 머문다. 그러던 어느 날, 조조의 심부름꾼이 순욱에게 와서 음식 합(盒)을 전달한다. 순욱이 열어보니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합이다. 순욱은 깜짝 놀란다. 먹을 것이 없다. 굶어죽으라는 말이다. 순욱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는 소설에 나온 이야기다. 실제로 빈 합 때문에 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그의 죽음은 분명 미스테리 속에 남아 있다.
순욱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삶도 어떤 의미에선 무결점이었다. 그는 청아하고 검소하고 겸허하여 식읍 2000호의 높은 녹봉을 받았지만 이를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고 본인은 검소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후세 사람들은 ‘순욱이 조조를 모심으로써 한 왕조가 무너지고 군주와 신하가 바뀌었다’고 비판하며 그의 처세를 문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정사의 주석에서 논하듯이 과연 순욱과 같은 인물이 당시 영웅을 보좌하여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려 할 때 선택할 수 대안이 조조가 아니면 누구였겠느냐는 질문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그의 주군 선택은 탁월했다. 그의 주군에 대한 보좌도 탁월했다.
신하로 사는 사람으로서 그의 잘못은 하나였다. 자신의 주군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조조가 의군을 일으킨 것이 난세를 바로잡고 조정을 지키려는 충정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조조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얘기했고, 또 자신의 신하들을 대하는데 예의가 있었고, 인재를 아꼈고 공평했고, 자신의 조상 3대를 욕했던 진림까지도 용서하고 받아들일 만큼 도량이 컸다. 그러니 오해할 만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쩌면 학자적 양심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자신은 충의와 기개가 있는 인물을 보좌하고 있다고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주군만은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설사 조조가 처음엔 충의와 기개로 나섰다 하더라도 인간은 변한다. 조조는 이룬 것이 너무 많았다. 중원에서 그는 황제보다 높았다. 그런데 그가 왜 누리지 않고 겸허하게 사양하며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이룬 게 많으면 그만큼 대우받으며 누리면서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런 점에서 순욱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군주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잘못
이는 춘추시대 위(衛) 영공(靈公)의 총신이었던 미자하(彌子瑕)의 고사에서 나온 얘기다. 위나라 법에는 군주의 수레를 몰래 타면 발을 자르는 형벌이 있었다. 그런데 미자하가 어머니가 병들었다며 군주의 수레를 빌려 타고 나갔다. 누군가 이를 군주에게 이르자 미자하를 사랑하던 군주는 “참 효자로구나. 어머니 병 때문에 발이 잘리는 벌까지 잊었구나”라고 말한다. 어느날은 군주를 모시고 과수원에 갔다가 미자하가 복숭아를 먹어보니 너무 맛이 있어서 제가 먹던 것을 군주에게 맛을 보라며 건넨다. 군주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맛있는 것을 제가 다 먹지 못하고 이렇게 내게 주는구나”하고 말했다. 그런데 사랑은 움직이는 거다. 어느 날 그에 대한 총애가 엷어지니 문득 당시의 일들이 떠오르며 화가 난다. ‘이 자가 건방지게 내 수레를 타고 가다니…, 이 자가 자기가 먹던 것을 내게 먹였다는 말이지.’ 그리고 영공은 미자하를 참한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과거엔 칭찬했던 행동을 나중엔 책망하게 된다. 그건 상황이 변한 게 아니라 군주의 애증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언을 드리거나 담론을 펼 때는 자신이 군주로부터 사랑을 받는지 미움을 받는지 확인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군주의 심사를 역린이라고 한다. 사람이 용을 길들여 탈 수는 있지만 이 역린을 건드리는 순간 죽는다는 것이다. 군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군주에게 바른 말을 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군주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심과 변덕이다. 『삼국지』에서도 수많은 군웅들 중 ‘믿음’의 경쟁력 하나로 황제까지 오른 유비를 제외하면 모두 의심과 변덕의 화신들이다. 이는 유비가 독특한 것이지 다른 군주들이 특별히 소인배여서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다.
조조는 처음엔 순욱의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조조가 세상을 평정하고 위세가 드높아지면서, 유가적 선비인 순욱의 말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순욱은 충의가 아니라 세상을 평정할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조조의 큰 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날로 높아져가는 주군의 눈높이를 미처 맞추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그리고 워낙 큰 신하는 군주의 총애를 잃으면 죽음 외엔 답이 없다. 그것이 큰 신하가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주군의 커가는 야심과 높아지는 눈높이에 맞춰 그를 황제로까지 추대하려는 무리들의 담론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이런 이치를 다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마지막 순간, 조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변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한 것은 그 순간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나이 50살. 그 나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정립하게 되고, 어떤 사람으로 살고 어떤 위치에서 죽고 싶고, 죽음 이후 세상에 어떤 이름을 남기고 싶은지 정리하게 된다.
‘주군의 총애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교훈
공자가 말한 ‘사생취의(捨生取義)’처럼 목숨을 버리더라도 의를 취하는 것이 유가 선비의 지향점이다. 그러니 타자(他者)의 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신하가 자신의 의를 실현하고 의지를 관철하려 할 때 갈 수 있는 길은 목숨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조조 같은 인물을 보필하면서 순욱처럼 살았다면,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영웅을 세웠고, 자신은 품위를 지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조조는 끝내 성공한 군주가 되었고, 인생 말년에는 수없이 살인을 하며 인간으로서 의사로서의 삶은 허무하게 무너진다.
순욱은 죽기 전에 자신이 국가를 다스리고 전쟁을 도모하는 책략과 계획을 적어놓은 편지들을 모두 불에 태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조를 세우고, 그는 깔끔하게 소멸한 것이다. 순욱은 죽는 순간 자신의 기록을 모두 불태운 것으로 보아 자신의 삶이 헛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으로서 역사에서 조조의 다른 모사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원래 한 시대의 질서를 다시 세운 위대한 군주의 척신들은 품위는커녕 영혼을 지키기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장량이 한나라 건국 후에는 조정을 떠나 정치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지킨 것처럼 이런 신하는 절정에서는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사실 순욱은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아 명예로운 은퇴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신하의 자리에서 품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그는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순욱에게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이것이다. ‘주군의 총애는 믿을 것이 못 된다.’
-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여류(余流) 삼국지』저자
양선희 -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 ‘양선희의 시시각각’을 연재하는 중이다. 2011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품집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 미디어), 『카페 만우절』(나남) 『5월의 파리를 사랑해』(문예중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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