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2)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2)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에서 적을 무찌르는 데 필요한 군사 전략이 있듯이, 비즈니스에도 경쟁사를 겨냥한 비즈니스 전략이 있다. 명저『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는 CEO들에게 영감을 준다. 미국의 국제정치를 움직이는 사상가 투톱을 꼽는다면 마키아벨리(1469~1527)와 클라우제비츠(1780~1831)가 두 자리를 차지한다. 학부·대학원에서 지배적 패러다임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한 두 인물이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서양에서 전쟁을 다룬 최고의 책으로 평가된다. 동양의 『손자병법』과 쌍벽을 이룬다. 서구를 낳은 정전(正典, canon) 중에서 전쟁을 다룬 논픽션은 단 두 개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전쟁론』밖에 없다. 『전쟁론』은 미국 웨스트포인트, 영국 샌드허스트 등 전세계 사관학교와 경영대학원 전략 강의에서 필독서다. 독일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 독일 법학자·정치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 프랑스 철학자 레몽 아롱(1905~1983) 등 쟁쟁한 사상가들이 『전쟁론』을 두고 고심했다.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헨리 키신저, 잭 웰치 같은 활동가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전쟁론』은 세계의 동쪽과 서쪽, 민주·비민주, 좌파·우파를 뛰어넘는 인기를 누렸다. 흥미롭게도 히틀러(1889~1945)와 마르크스(1818~1883)·엥겔스(1820~1895)·마오(1893~1976)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수용해 이론과 실천의 근거로 삼았다.
『전쟁론』의 등장을 촉구한 배경은 ‘프랑스인들의 황제’ 나폴레옹(1769~1821)이 이룩한 혁신이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서부 유럽은 전란에 휩싸였다. 나폴레옹은 국민개병제·기동성 같은 혁신으로 한때 서부 유럽을 평정했다. 60번 싸워 7번 졌다. 주로 막판에 졌다. 『전쟁론』은 나폴레옹의 성공요인을 이론 화했다.
적에게 배워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의 제사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폴레옹식 전쟁 수행의 장점을 이론화했다. 클라우제비츠는 프랑스와 연합국이 싸운 프랑스혁명전쟁(1792~1802)과 나폴레옹전쟁(1803~1815)에 참전했다. 클라우제비츠는 너무 이른 12살 때 군인이 됐다. 지휘관보다는 참모형에 가까운 군인이었지만, 『전쟁론』을 쓰기 시작했을 때 벌써 군 경력 25년이었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프랑스군 포로가 돼 프랑스를 두루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전쟁론』은 우선 고국 프로이센에 적용됐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을 승리로 이끈 헬무트 폰 몰트케(1800~1891) 프로이센 참모총장은 클라우제비츠에게 공을 돌렸다. 19세기 독일통일의 논공행상에서 『전쟁론』의 비중이 과장됐다는 설도 있지만, 『전쟁론』 이 전쟁에 대한 당시 유럽인의 생각을 바꾼 것은 사실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클라우제비츠 이전과 이후(before and after)가 달라졌다. 『전쟁론』이전에는 정치와 전쟁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정치인들이나 외교관들이 뒤로 빠지고 군인들의 전략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과 더불어 행하는 정치적 교섭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개전 이후에도 전쟁 당사자들 간에 외교적·경제적·이념적 상호작용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정치의 수단인 전쟁은 단독으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외교를 비롯한 다른 수단들과 혼합(admixture)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이란 정치·사회·심리·이념 등 여러 측면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상이었다. 전쟁에는 심리적인 측면이 있다. 나폴레옹은 국민에게 동기(motivation)를 부여했다. 프랑스 국민은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했다. 체제적 측면도 있다. 프랑스는 국가의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순수 군사 측면도 있다. 나폴레옹은 선택과 집중으로 전쟁과 전투에서 승리했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임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회사의 역량을 집결해 목표를 달성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클라우제비츠 자신이 전쟁과 비즈니스 사이에 일종의 친연성(親緣性·affinity)가 존재한다고 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기예(技藝·art)보다는 비즈니스에 비유하는 게 더 정확하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비즈니스에서도 인간의 이익과 활동이 충돌한다. 하지만 전쟁은, 대규모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는 정치에 더 가깝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론과 실천·실행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봤을까. 그는 전쟁 참가자들이 충실하게 따라야할 일반적, 보편적인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전쟁은 카오스의 세계다. 정치 또한 카오스의 세계다. 두 카오스 세계가 만나면 혼란과 불확실성이 증폭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로부터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법칙도 제시하지 않는다. 역사는 학습자의 이해를 넓히고 그의 비판적 판단력을 강화할 뿐이다.”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역사 사례를 종합해 나오는 이론은 전쟁이라는 카오스 대처에 필요한 이해와 판단력을 선사하지만 이론의 효용성은 시한부다. 전장으로 떠나갈 때 잊어버리고 버려야 하는 게 이론이다. 이론에 대한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시각은 비즈니스에도 적용될 수 있다. 경영 이론은 유행을 탄다. 새로운 이론이 끊임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클라우제비츠적 관점에서 보면, 이론은 경영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각에 불과하다.
클라우제비츠의 사상 중에서 비즈니스 적용성이 가장 높은 것을 두개 든다면, 단순함(simplicity)과 대담함(boldness)이다. 단순함의 중요성에 대해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에서 모든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가장 간단한 것이 어렵다. 어려움이 축적되면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찰을 생산한다.” 여기서 마찰은 계획이 예상한 상황과 실제 벌어진 상황 사이의 차이를 말한다. 마찰이 발생하는 이유는 날씨, 부족하거나 잘못된 정보, 감정적·심리적 요인 등이라고 클라우제비츠는 파악한다.
단순함에 대해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 “계획이 간결해야 실행이 활기차다. 간단한 아이디어를 강한 결의로 이행하는 것이 성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우리가 모색하는 승리를 보장하는 단순함, 천재적인 단순함은 격렬한 정신적 교전(交戰·engagement)의 결과물이다.”
장군과 최고경영자(CEO)의 생각이 단순하게 전달되지 않으면 병사들이나 임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 CEO는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나 깨나 골똘히, 장시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계획이 명료하다. 하지만 한 문장으로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은 계획은 임직원에게 전달돼 이해시키기 힘들다.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없는 계획은 사실 CEO의 머릿속에서도 카오스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경우 계획이 명료하다는 생각은 CEO의 착각이다. 클라우제비츠는 대담함을 다음과 같은 말들로 정리했다. “최고의 대담성이 최고의 지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우수한 지적 능력으로 자신의 대담성을 다스리는 것이 영웅의 특징이다”, “무엇보다 용기가 전사의 첫 번째 자질이다”, “재빠르게 움직이다 실수하는 게 때를 놓치도록 머뭇거리는 것보다 낫다”, “용자(勇者)만이 미인을 차지한다(None but the brave deserve the fair)”는 말처럼 서양은 신중함보다는 대담함을 높게 쳐준다.
『전쟁론』은 읽기 어려운 책이다. 유럽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군사학·역사학뿐만 아니라 문학·철학·예술·과학·교육을 깊이 있게 공부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변증법적인 글쓰기 스타일도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가 모토인 독자들에게는 여기선 이 말, 저기선 저 말하는 것 같은 클라우제비츠에게 호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2000만 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 6000만 명이 사망했다. 일부 영국 역사학자들은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에 클라우제비츠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클라우제비츠는 ‘전면전쟁(total war)의 사도’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전면전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그가 “전쟁의 철학 그 자체에 절제의 원칙을 도입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제한전쟁(limited war)’의 이론가이기도 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제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쟁’과 적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무력화시켜 ‘무장해제 시키는 전쟁’으로 나누었다. 클라우제비츠는 또 방어에 대한 공격의 우위를 맹신했다는 공격도 받았다. 하지만 『전쟁론』에서 가장 길게 다루고 있는 것은 방어다. 문맥을 무시하고 『전쟁론』을 인용하면 클라우제비츠가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생전에 이미 국민영웅으로 칭송 받는 유명인이었다. 그는 톨스토이(1817~1875)의 『전쟁과 평화』(1869년)에도 작은 비중이지만 나온다. 그에게도 야심과 좌절이 있었다. 내성적인 책벌레였다. 스캔들 없는 인생을 살았다. 좀 따분하게 보였지만 평판이 두루두루 좋았다. 하지만 그의 저작은 정열로 넘친다. 냉혹하기까지 한 날카로운 분석이 담겼다.
“전투에 나선 사람을 움직이는 여러 가지 열망 중에서 명예와 명성이 가장 강력하고 항구적이라고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야심가’ 클라우제비츠에게는 세속적 출세보다는 명예가 더 소중했다. 1818년 38세에 소장(小將)이 됐다. 1830년까지 사관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전쟁론』 집필에 몰두했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543)를 사망 직전에 출간했다. 교회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쟁의 코페르니쿠스’인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사후 출간됐다. 사후 출간을 바란 것은 클라우제비츠 자신이다. 집필 과정에서 개인적·사회적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게 싫었다. 봉투에 넣어둔 『전쟁론』을 편집해 세상에 내놓은 것은 아내 여백작 마리 폰 브륄이다. 『전쟁론』은 1832년 10권으로 출간된 전집의 1~3권을 구성한다. 51세에 사망한 클라우제비츠가 더 오래 살아 계속 수정했다면 『전쟁론』의 최종 모습이 어떻게 됐을까. 『전쟁론』이 클라우제비츠 자신을 흡족하게 만들 기준으로 봤을 때 70%인지, 50%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미완성 원고라는 것은 과장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비서이자 소울메이트(soulmate)였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실력에 비해 출세가 늦는 것에 대해 속상해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영국 출신이었던 예비 장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이름에 귀족임을 표시하는 폰(von)이 들어갔으나 사실 그의 집안은 학자·신학자를 배출한 중산층이었다. 프로이센은 클라우제비츠 집안이 귀족이라고 인정했다. 평생 통풍·관절염으로 고생한 클라우제비츠는 51세 나이로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다른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전쟁론』은 세간의 관심에서 좀 멀어졌다가도 항상 부활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항상 재해석된다. 이 글을 읽은 독자 중에 『전쟁론』을 새로이 해석하고 실천한 인물이 나오리라.
-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클라우제비츠의 인생
1780년 프로이센 부르크에서 출생
1792년 프로이센 군에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12세)
1804년 프로이센 전쟁대학 수석으로 졸업
1806년 예나 전투에 참전. 프랑스군 포로가 됨
1810년 마리 폰 브륄 여백작과 결혼
1812년 러시아군에 입대
1815년 워털루 전투에 참가
1818년 소장으로 진급(38세) 1830년까지 프로이센 전쟁대학 총장으로 근무
1831년 콜레라로 사망(51세)
1832년『전쟁론』출간.
클라우제비츠가 남긴 음미해볼 말● 전쟁은 적에게 우리의 뜻을 강요하기 위한 무력의 사용이다.
● 너무나 위험한 전쟁에서 최악은 인정(人情)에서 비롯된 실수다.
● 무력의 집중보다 더 상위의, 그리고 더 간단한 전략의 법칙은 없다.
● 기습의 근간은 속도와 기밀 유지의 융합이다.
● 좋은 계획의 적(敵)은 완벽한 계획을 꿈꾸는 것이다.
● 이론은 인간적 요소를 참작해야 한다. 용기, 과감함, 심지어는 무모함이 이론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 원칙과 규칙의 의도는,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 준거의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 지금 이 순간을 넘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람들이다.
● 자신의 부하들에게서 항상 최선을 기대하는 사람은, 단지 이 이유만으로도 지휘관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
● 우리의 지성은 항상 명료함과 확실함을 갈망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종종 불확실성에 매료된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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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성공요인을 이론화한 『전쟁론』
『전쟁론』의 등장을 촉구한 배경은 ‘프랑스인들의 황제’ 나폴레옹(1769~1821)이 이룩한 혁신이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서부 유럽은 전란에 휩싸였다. 나폴레옹은 국민개병제·기동성 같은 혁신으로 한때 서부 유럽을 평정했다. 60번 싸워 7번 졌다. 주로 막판에 졌다. 『전쟁론』은 나폴레옹의 성공요인을 이론 화했다.
적에게 배워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의 제사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폴레옹식 전쟁 수행의 장점을 이론화했다. 클라우제비츠는 프랑스와 연합국이 싸운 프랑스혁명전쟁(1792~1802)과 나폴레옹전쟁(1803~1815)에 참전했다. 클라우제비츠는 너무 이른 12살 때 군인이 됐다. 지휘관보다는 참모형에 가까운 군인이었지만, 『전쟁론』을 쓰기 시작했을 때 벌써 군 경력 25년이었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프랑스군 포로가 돼 프랑스를 두루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전쟁론』은 우선 고국 프로이센에 적용됐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을 승리로 이끈 헬무트 폰 몰트케(1800~1891) 프로이센 참모총장은 클라우제비츠에게 공을 돌렸다.
“경영이론의 효용성은 시한부일 뿐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과 더불어 행하는 정치적 교섭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개전 이후에도 전쟁 당사자들 간에 외교적·경제적·이념적 상호작용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정치의 수단인 전쟁은 단독으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외교를 비롯한 다른 수단들과 혼합(admixture)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이란 정치·사회·심리·이념 등 여러 측면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상이었다. 전쟁에는 심리적인 측면이 있다. 나폴레옹은 국민에게 동기(motivation)를 부여했다. 프랑스 국민은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했다. 체제적 측면도 있다. 프랑스는 국가의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순수 군사 측면도 있다. 나폴레옹은 선택과 집중으로 전쟁과 전투에서 승리했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임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회사의 역량을 집결해 목표를 달성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클라우제비츠 자신이 전쟁과 비즈니스 사이에 일종의 친연성(親緣性·affinity)가 존재한다고 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기예(技藝·art)보다는 비즈니스에 비유하는 게 더 정확하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비즈니스에서도 인간의 이익과 활동이 충돌한다. 하지만 전쟁은, 대규모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는 정치에 더 가깝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론과 실천·실행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봤을까. 그는 전쟁 참가자들이 충실하게 따라야할 일반적, 보편적인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전쟁은 카오스의 세계다. 정치 또한 카오스의 세계다. 두 카오스 세계가 만나면 혼란과 불확실성이 증폭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로부터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법칙도 제시하지 않는다. 역사는 학습자의 이해를 넓히고 그의 비판적 판단력을 강화할 뿐이다.”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역사 사례를 종합해 나오는 이론은 전쟁이라는 카오스 대처에 필요한 이해와 판단력을 선사하지만 이론의 효용성은 시한부다. 전장으로 떠나갈 때 잊어버리고 버려야 하는 게 이론이다. 이론에 대한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시각은 비즈니스에도 적용될 수 있다. 경영 이론은 유행을 탄다. 새로운 이론이 끊임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클라우제비츠적 관점에서 보면, 이론은 경영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각에 불과하다.
클라우제비츠의 사상 중에서 비즈니스 적용성이 가장 높은 것을 두개 든다면, 단순함(simplicity)과 대담함(boldness)이다. 단순함의 중요성에 대해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에서 모든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가장 간단한 것이 어렵다. 어려움이 축적되면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찰을 생산한다.” 여기서 마찰은 계획이 예상한 상황과 실제 벌어진 상황 사이의 차이를 말한다. 마찰이 발생하는 이유는 날씨, 부족하거나 잘못된 정보, 감정적·심리적 요인 등이라고 클라우제비츠는 파악한다.
단순함에 대해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 “계획이 간결해야 실행이 활기차다. 간단한 아이디어를 강한 결의로 이행하는 것이 성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우리가 모색하는 승리를 보장하는 단순함, 천재적인 단순함은 격렬한 정신적 교전(交戰·engagement)의 결과물이다.”
장군과 최고경영자(CEO)의 생각이 단순하게 전달되지 않으면 병사들이나 임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 CEO는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나 깨나 골똘히, 장시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계획이 명료하다. 하지만 한 문장으로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은 계획은 임직원에게 전달돼 이해시키기 힘들다.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없는 계획은 사실 CEO의 머릿속에서도 카오스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경우 계획이 명료하다는 생각은 CEO의 착각이다.
국민영웅으로 칭송 받던 유명인이자 야심가
『전쟁론』은 읽기 어려운 책이다. 유럽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군사학·역사학뿐만 아니라 문학·철학·예술·과학·교육을 깊이 있게 공부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변증법적인 글쓰기 스타일도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가 모토인 독자들에게는 여기선 이 말, 저기선 저 말하는 것 같은 클라우제비츠에게 호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2000만 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 6000만 명이 사망했다. 일부 영국 역사학자들은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에 클라우제비츠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클라우제비츠는 ‘전면전쟁(total war)의 사도’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전면전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그가 “전쟁의 철학 그 자체에 절제의 원칙을 도입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제한전쟁(limited war)’의 이론가이기도 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제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쟁’과 적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무력화시켜 ‘무장해제 시키는 전쟁’으로 나누었다. 클라우제비츠는 또 방어에 대한 공격의 우위를 맹신했다는 공격도 받았다. 하지만 『전쟁론』에서 가장 길게 다루고 있는 것은 방어다. 문맥을 무시하고 『전쟁론』을 인용하면 클라우제비츠가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생전에 이미 국민영웅으로 칭송 받는 유명인이었다. 그는 톨스토이(1817~1875)의 『전쟁과 평화』(1869년)에도 작은 비중이지만 나온다. 그에게도 야심과 좌절이 있었다. 내성적인 책벌레였다. 스캔들 없는 인생을 살았다. 좀 따분하게 보였지만 평판이 두루두루 좋았다. 하지만 그의 저작은 정열로 넘친다. 냉혹하기까지 한 날카로운 분석이 담겼다.
“전투에 나선 사람을 움직이는 여러 가지 열망 중에서 명예와 명성이 가장 강력하고 항구적이라고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야심가’ 클라우제비츠에게는 세속적 출세보다는 명예가 더 소중했다. 1818년 38세에 소장(小將)이 됐다. 1830년까지 사관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전쟁론』 집필에 몰두했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543)를 사망 직전에 출간했다. 교회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비서이자 소울메이트였던 아내가 『전쟁론』 출간
클라우제비츠의 비서이자 소울메이트(soulmate)였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실력에 비해 출세가 늦는 것에 대해 속상해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영국 출신이었던 예비 장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이름에 귀족임을 표시하는 폰(von)이 들어갔으나 사실 그의 집안은 학자·신학자를 배출한 중산층이었다. 프로이센은 클라우제비츠 집안이 귀족이라고 인정했다. 평생 통풍·관절염으로 고생한 클라우제비츠는 51세 나이로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다른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전쟁론』은 세간의 관심에서 좀 멀어졌다가도 항상 부활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항상 재해석된다. 이 글을 읽은 독자 중에 『전쟁론』을 새로이 해석하고 실천한 인물이 나오리라.
-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클라우제비츠의 인생
1780년 프로이센 부르크에서 출생
1792년 프로이센 군에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12세)
1804년 프로이센 전쟁대학 수석으로 졸업
1806년 예나 전투에 참전. 프랑스군 포로가 됨
1810년 마리 폰 브륄 여백작과 결혼
1812년 러시아군에 입대
1815년 워털루 전투에 참가
1818년 소장으로 진급(38세) 1830년까지 프로이센 전쟁대학 총장으로 근무
1831년 콜레라로 사망(51세)
1832년『전쟁론』출간.
클라우제비츠가 남긴 음미해볼 말● 전쟁은 적에게 우리의 뜻을 강요하기 위한 무력의 사용이다.
● 너무나 위험한 전쟁에서 최악은 인정(人情)에서 비롯된 실수다.
● 무력의 집중보다 더 상위의, 그리고 더 간단한 전략의 법칙은 없다.
● 기습의 근간은 속도와 기밀 유지의 융합이다.
● 좋은 계획의 적(敵)은 완벽한 계획을 꿈꾸는 것이다.
● 이론은 인간적 요소를 참작해야 한다. 용기, 과감함, 심지어는 무모함이 이론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 원칙과 규칙의 의도는,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 준거의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 지금 이 순간을 넘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람들이다.
● 자신의 부하들에게서 항상 최선을 기대하는 사람은, 단지 이 이유만으로도 지휘관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
● 우리의 지성은 항상 명료함과 확실함을 갈망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종종 불확실성에 매료된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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