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의 대히트 앨범 ‘Automatic for the People’ 25주년 맞은 마이클 스타이프, “밴드 재결합 공연은 없다” 사진:AP-NEWSIS우리는 미국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해산물 식당에서 만났다. 은퇴한 록스타 마이클 스타이프는 방금 나온 음식 접시를 뒤적이며 내게 앤초비를 권했다. “내가 기대한 건 이게 아닌데... 혹시 앤초비 좋아해요?”
사실 나도 그건 기대하지 않았다. 전설적인 록밴드 R.E.M.의 전 리드 보컬이 내게 앤초비를 먹으라고 권유하는 것 말이다. 난 채식을 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나도 채식이 기본인데...” 스타이프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작은 생선이 마음에 든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이면서 생선은 먹는다는 말일까? “사실 난 못 먹는 게 없다. 하지만 거의 채식을 하는 편이다.” 그는 십대 시절 육식을 완전히 끊었지만 40세부터는 모든 것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세월은 우리에게 희한한 장난을 친다. 우리는 함께 식사하며 나이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올해 57세인 스타이프는 슈퍼스타였지만 그렇게 불리기를 꺼렸던 32세의 자신을 돌이켰다. 1992년 당시 그는 R.E.M. 최고의 명작으로 통하는 앨범 ‘Automatic for the People’을 만들었다. 스타이프가 그때를 회상한 것은 이 앨범이 발표 25주년을 맞아 최근 재발매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우리가 한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다. 우린 상당히 일찍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Automatic for the People’이 죽음과 상실을 주제로 삼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 앨범에서 가장 오래 사랑받는 곡들은 죽음을 성찰하는 ‘Try Not to Breathe’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비통함을 노래한 ‘Sweetness Follows’, 그리고 제발 자살은 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Everybody Hurts’다.
1992년 R.E.M.은 3개 부문에서 그래미 상을 받았다 (왼쪽부터 빌 베리, 마이크 밀스, 피터 벅, 마이클 스타이프) / 사진:PINTERESTR.E.M.은 3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활동한 뒤 2011년 해체됐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스타이프로선 그 당시를 돌이키는 것이 ‘기이한 일’이다. “내가 ‘시간의 할아버지’(시간을 의인화한 가상의 존재로 큰 낫과 모래시계를 든 노인의 모습이다)처럼 느껴진다”고 그는 농담했다. 그 역할에 잘 어울린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스타이프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난해 그의 이미지로 굳어졌던 기다란 수염은 사라졌다. 흰색 바지와 흰색 버튼다운 셔츠를 입은 그는 수다스럽고 쾌활했다. 무엇이든 피하는 주제가 없었고, 내가 언급하는 R.E.M. 노래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예를 들어 공화당과 우익을 신랄하게 비판한 곡 ‘Ignoreland’에 관해선 “훨씬 더 강한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지만 녹음할 때 수위를 좀 낮춘 것”이라고 말했다. 스타이프는 10월의 어느 화요일 오후 댄 래더와의 인터뷰를 녹화한 직후 나를 만났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설명에서 미국의 최장수 뉴스 앵커였던 래더를 ‘영웅’으로 묘사했다.
1990년대 초는 R.E.M.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1년 발표한 6집 앨범 ‘Out of Time’은 더 밝고 웅장한 사운드의 시대를 열면서 싱글곡 ‘Losing my Religion’에 쏟아진 팬들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음반 판매 1위에 올랐다. 그때까지 조지아 주 출신의 꺼벙한 대학 록밴드로 알려졌던 R.E.M.이 이 앨범으로 마돈나만큼이나 유명해졌다. “갑자기 내가 유명인사가 됐다”고 스타이프가 돌이켰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봤다. 음악 전문 채널 MTV 덕분에 그 앨범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인기를 끌었다.” 스타이프는 ‘Losing My Religion’ 뮤직 비디오에서 R.E.M.의 오랜 관행을 깨고 처음 립싱크를 했다. 그는 아이랜드 출신 여가수 시네이드 오코너의 ‘Nothing Compares 2 U’(프린스가 만든 곡이다) 비디오를 본 뒤 립싱크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 비디오를 보기 전엔 립싱크가 장난 같고 바보처럼 보여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 다음해 그래미 시상식에 R.E.M.의 기타리스트 피터 벅은 카지노를 주제로 한 무늬의 파자마를 입고 나타났다. 사람들을 놀려주려는 개그였다. 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R.E.M.은 3개 부문에서 상을 탔다. 스타이프는 “그해의 성공으로 하나의 밴드로서 우리는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R.E.M.은 앨범 ‘Out of Time’ 발표 후 순회공연을 떠나지 않고 스튜디오로 다시 돌아가 현악기를 동원한 불후의 앨범 ‘Automatic for the People’을 녹음했다. 목가적인 팝인 ‘Out of Time’과는 완전히 다른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담은 앨범이었다. 1800만 장이나 팔린 그 앨범은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가장 구슬픈 앨범으로 사랑 받는다.
그처럼 어두운 음조의 앨범이 어떻게 그런 현란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레이건과 부시(조지 H. W. 부시를 말한다), 에이즈가 미국 사회를 휩쓸었던 1980년대가 끝난 직후였다. 아주 암울한 시대였다. 그래서 우리 앨범도 아주 어두웠다.”
개인적인 상실도 있었다. “조부모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집 개도 아팠다. 아픈 개와 에이즈를 한데 묶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지만 어쨌든 나는 일상에서 그런 문제와 씨름했다. 1980년대는 정말 빌어먹을 시대였다. 많은 사람이 사라지고 죽었다. 또 내가 서른 살이 됐다. 그 나이가 되면 세상을 달리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존 마이클 스타이프는 1960년 1월 초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텍사스 주와 일리노이 주, 독일 미군기지 등)으로 옮겨다니며 성장했지만 그는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스타이프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을 돌이킨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하자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기이한 면도 있었다. 어둡고 별난 사람이었다.”
스타이프는 15세 때 TV에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먼을 봤다. 1975년이었다. 코미디 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첫 시즌에서 ‘외국인’ 캐릭터로 등장했다. 스타이프는 그 쇼의 불손함에 충격 받았다. “카우프먼은 십대인 내게 펑크록을 알려줬다.” 당시 스타이프는 이스트 세인트 루이스에서 살았다. 갑자기 그는 자신과 같은 뭔가를 봤다고 느꼈다. “앤디 카우프먼과 펑크록에서 난 나와 같은 부류를 발견했다. 난 ‘이들은 나와 같아. 나도 그런 일을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스타이프는 자신의 성 정체성도 발견했다(그는 1994년 동성애자로서 커밍아웃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난 원래 정상과는 거리가 멀고 약간 이상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스타이프는 일리노이 주에서 펑크밴드와 함께 살며 스파게티와 버터로 끼니를 때웠다. 곧 그는 조지아 주 애선으로 가서 조지아대학을 다녔다. 거기서 미래의 밴드메이트 벅을 만났다. 기타리스트인 벅은 그 대학의 음반가게에서 일했다. 그들은 같은 대학에 다니던 마이크 밀스, 빌 베리와 밴드를 결성했다. 나머지 이야기는 대학 록밴드의 역사다. 1983년 이해하기 어려운 첫 앨범 ‘Murmur’가, 그 다음해 2집 ‘Reckoning’이 나오면서 그들의 작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992년 R.E.M.의 앨범 ‘Automatic for the People’이 올해 발표 25주년을 맞아 재발매됐다. / 사진:GENIUS.COM수년 뒤 스타이프가 자신을 펑크록 음악에 눈뜨게 해줬다고 치켜세우던 카우프먼을 모델로 한 R.E.M. 노래 ‘Man on the Moon’이 발표됐다. 1984년 세상을 떠난 카우프먼을 향한 애정 어린 송별가인 이 곡은 ‘Automatic for the People’에서 스타이프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모호한 성적 취향을 가진 비극적인 유명인사들에 관해 만든 노래 두 곡 중 하나다. ‘Monty Got a Raw Deal’은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일생을 노래한다. 내가 그 곡을 거론하자 스타이프는 영화 ‘젊은이의 양지’에서 클리프트와 함께 주연을 맡았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만났을 때를 돌이켰다. 노인이 된 테일러는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했던 사랑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랑보다 강했다. 그때도 지금도 그 사랑을 적절히 표현할 말이 없다.”
1992년 스타이프는 오래 전 클리프트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 얻은 명성과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는 것의 위험을 두고 고민했다. 그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소문(사실 무근)이 무성했다. “사람들의 진정한 우려에서 나온 소문이 아니라고 생각됐기 때문에 실망이 컸다. 그냥 심심풀이로 지어낸 헛소문이었다.”
결국 스타이프는 1994년 커밍아웃했다. 좀 더 시끄럽고 현란한 R.E.M. 앨범 ‘Monster’를 한창 홍보할 때였다. 하지만 그 앨범에서도 그는 여전히 죽음을 얘기했다. 그 앨범의 핵심을 이루는 곡인 ‘Let Me In’에서 스타이프는 친구 커트 코베인(록그룹 너배너의 멤버로 그런지와 얼터너티브 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의 자살을 두고 울부짖었다. 스타이프는 “나도 자살을 숱하게 생각했다”며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5년 도널드 트럼프(그때만 해도 승산이 없어 보이던 대통령 후보였다)가 R.E.M.의 1987년 히트곡 ‘It’s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and I Feel Fine)’을 공화당의 한 유세장에서 연설을 시작하기 전에 틀었다. 사전 허락을 받지도 않았다. 스타이프는 곧바로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사용한 트럼프 캠프를 행해 “권력에 굶주린, 관심을 끌려는 가련한 존재들”이라며 “엿이나 먹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우리 밴드의 노래와 내 목소리를 당신들의 멍청하고 가식적인 선거 운동에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R.E.M. 멤버였던 밀스도 트위터에서 트럼프 후보를 ‘오렌지 광대’라고 부르며 경멸을 표했다). 단호하고 진보적이며 기득권층에 반발하는 전형적인 스타이프의 모습이었다. 갈등 없이 원만하게 해체된 지 4년 뒤 R.E.M. 멤버들의 음악적·정치적 단합심이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다.
스타이프는 언제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예를 들어 그는 1992년 그래미 시상식에 ‘백악관이여, 에이즈를 막아라’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참석했다. R.E.M.이 해체된 뒤엔 스타이프의 그런 성향이 더 강해졌다. 그는 미군의 내부폭로자 첼시 매닝(이라크전 관련 기밀자료 등을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넘긴 혐의로 35년 형을 선고받아 7년을 복역하고 지난 5월 감형으로 풀려났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항의했고, 팝가수 엘튼 존과 함께 조지아 주 교도소의 트랜스젠더 복역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을 펼쳤다. 지난해 그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힐러리 클린턴과 맞붙었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그의 유세에도 참석했다. 스타이프와 샌더스는 뉴욕 브루클린 남단 해안의 놀이공원 코니 아일랜드에서 함께 핫도그를 먹으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들이 친구 사이일까? “그건 아니다. 문자를 주고받거나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샌더스 상원의원은 ‘아웃사이더’ 후보였다. “그래서 그를 지지하게 됐다. 난 ‘Everybody Hurts’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노래했지만 스스로 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한다.”
스타이프는 트럼프 대통령을 아주 싫어하며 미국이 정치적으로 ‘우향우’하는 상황을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난 히피다. 우리 세대는 에너지 효율성과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세대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 어떻게 됐는지 보라. 완전히 붕괴되기 직전이다. 우리 세대는 내가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래서일까? 스타이프는 예술에서 위안을 찾는다. 조각, 사진, 비디오 포트레이트, 음악 등. 사진에 관한 그의 자전적 책이 내년에 발간될 예정이다. “나는 여러 매체를 통해 작업하고 있다. 그 문제에 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인터뷰 기사를 사람들이 보면 ‘닥쳐 ! 이런 가식적인 멍청이! 다시 노래나 만들지 뭐하는 거야’라고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타이프에게 위안을 주는 다른 일도 있다. R.E.M. 앨범 재발매 프로젝트다. ‘Out of Time’은 지난해 25주년 기념 재발매에 들어갔다. ‘Monster’는 2019년 재발매될 예정이다. 스타이프가 가장 좋아하는 R.E.M. 앨범 ‘New Adventures in Hi-Fi’는 그로부터 2년 뒤인 2021년에 다시 나올 계획이다. 스타이프는 R.E.M.의 음악을 세계에 다시 소개하기를 즐긴다. 하지만 재결합 순회 공연 계획은 없다. 난 그에게 R.E.M. 재결합 가능성을 질문했지만 그에겐 사실 질문이 아니라 애원에 가깝게 들렸던 듯하다. 스타이프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우리가 다시 모여 공개적으로 공연할 이유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다.”
왜 그렇게 확신할까? “한번 해체했으면 끝이다. 어떤 이유로든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슬프고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이프가 솔로 음반은 낼까? “요즘 난 솔로 음반이 뭔지도 모르다. 그럴 일 없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다시 사용하고 싶다. 진짜 마음에 든다.”
- 잭 숀펠드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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