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전에 계획이란 없다”
“우리 사전에 계획이란 없다”
15집 앨범 낸 34년차 인디 록 밴드 요 라 텡고, 공연도 녹음도 자연스러움 강조해 아이라 캐플런(61)과 조지아 허블리 부부는 인디 록 밴드 요 라 텡고를 34년째 이끌어 오고 있다. 이 부부는 얼마 전 몇몇 친구를 자신들의 아파트로 불러 비밀 하나를 털어놨다. 15번째 앨범을 완성했다는 깜짝 뉴스였다. 새 앨범의 제목은 ‘There’s a Riot Going On’이 될 것이라고 했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1971년 앨범 ‘There’s a Riot Goin’ On’에 경의를 표한 제목으로 시기적으로도 적절해 보인다.
캐플런은 친구들이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얼른 그 앨범을 찾아 들려줬다. 요 라 텡고는 수십 년 동안 팬들에게 이처럼 큐레이터 같은 역할을 해 왔다. 1983년 미국 뉴저지 주 호보컨에서 결성된 이 밴드는 콘서트에서 즉흥적으로 다른 뮤지션의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하누카(매년 11월 또는 12월에 8일간 진행되는 유대교 축제) 공연에 깜짝 게스트를 초청하는 걸로 유명하다(요 라 텡고는 한 장소에서 8일 내내 하누카 특별 공연을 하는 걸 좋아한다).
캐플런은 로커가 되기 전엔 록 음악 평론가로 일했다. 요 라 텡고의 음악에는 박식한 문화적 비유와 난해한 리메이크 곡(조지 맥크레이의 ‘You Can Have It All’을 리메이크한 노래가 대표적이다)이 많이 포함됐다. 요 라 텡고로서는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앨범 제목을 올해 다시 끄집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록 앨범 제목에 얽힌 역사를 잠깐 살펴보는 게 좋겠다. ‘What’s Going On’(Going에 아포스트로피가 없다)은 1971년 나온 마빈 게이의 기념비적 앨범 제목이며 ‘What’s Goin’ On’은 1977년 발표된 프랭크 스트로지어 퀸텟의 앨범 타이틀이다. ‘There’s a Riot Goin’ On’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이 게이의 앨범에 대한 답으로 내놓은 걸작으로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미국 사회가 소용돌이치던 시기에 녹음됐다. 그리고 ‘There’s a Riot Going On’은 요 라 텡고의 새 앨범 제목이다.
최근 뉴욕 맨해튼에 있는 마타도어 레코즈 사무실에서 요 라 텡고 멤버들을 만났을 때 캐플런은 “그 앨범 제목이 적합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캐플런은 그의 유니폼이 되다시피 한 옷차림(가느다란 가로줄 무늬 T셔츠와 진바지)으로 밴드의 베이스 주자인 제임스 맥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허블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요 라 텡고는 미국인 수백만 명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지난해 초 이 제목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은 슬라이 스톤의 앨범과는 전혀 다르다. 또 저항감이 느껴지는 제목과 달리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속삭이는 듯한 반복악구와 잔잔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요한 사운드는 앨범 제목과 의도적으로 모순되게 설정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다양한 스타일과 텍스처가 적용됐지만 마구잡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으며 ‘And Then Nothing Turned Itself Inside-Out’(2000) 이후 이 밴드의 가장 따뜻하고 고요한 음악이 담긴 앨범인 듯하다.
이번 앨범 제작 과정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달랐다. 캐플런 부부와 맥뉴, 세 멤버가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이들은 새로운 노래를 작곡하는 대신 그동안 써놓고 사용하지 않은 멜로디와 영화 음악 등을 다시 훑어보면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냈다[외부 엔지니어나 프로듀서의 도움 없이 맥뉴가 프로 툴스(오디오 작업 프로그램)를 이용해 앨범을 제작했다].
“우리는 왜 녹음하는지 그 이유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캐플런은 말했다. “그냥 우리도 모르게 녹음을 하고 있었다. 우린 오랫동안 새 음반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을 가능한 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그랬다. 그저 함께 모여 연주하고 결과물에 대해서는 되도록 신경 안 쓰려고 했다.”
한 가지 놀랄 만한 소식은 호보컨의 마스코트로 여겨지는 요 라 텡고의 멤버들이 이제는 뉴저지 주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캐플런과 후블리는 2014년 조용히 뉴욕 맨해튼으로 이주했다. 뉴저지 주 인디 음악의 중심이자 요 라 텡고의 하누카 공연 장소이기도 했던 원조 맥스웰스 바가 문을 닫은 지 얼마 안 돼서였다(요 라 텡고는 지난해 맨해튼의 바우어리 볼룸에서 다시 하누카 공연을 시작했다). 나머지 멤버인 맥뉴도 브루클린에 산다.
일부 인디 팬에게 요 라 텡고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처럼 뉴저지 주를 상징한다. 하지만 캐플런은 “우리가 호보컨에 살았을 때도 그 도시를 사랑한 건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그곳엔 맥스웰스 바와 기타 바, WFMU(지역 인디 라디오 채널) 등 우리가 유난히 아끼던 것들이 있었다.” 어쨌든 요 라 텡고는 요즘도 호보컨에서 리허설을 하고 그곳에 사서함도 한 개 갖고 있다. 새 앨범도 그곳에 있는 자신들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호보컨은 1980년 대 초 캐플런과 후블리가 만나 밴드를 결성한 곳이기도 하다. 레코드 상점과 콘서트에서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밴드를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지역 신문에 멤버 모집 광고를 냈다. ‘소프트 보이즈와 미션 오브 버마, 러브 등의 밴드와 같은 듯 다른 새 밴드에서 일할 기타리스트 겸 베이스 주자를 모집합니다.’
요 라 텡고는 초반 몇 년 동안 코요테 레코즈에서 그저 그런 앨범들을 발표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다가 1992년 ‘May I Sing With Me’ 앨범을 낼 때 맥뉴가 합류하면서 탄탄한 밴드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감미로운 발라드와 요란한 피드백퍼즈 사운드를 조화시킨 앨범 ‘Painful’로 큰 성공을 거뒀고 그 후 그 명성을 지켜 왔다.
인디 록 밴드 중에 요 라 텡고처럼 확고하게 자기 색깔을 유지하면서 좋은 음악을 꾸준히 발표하는 그룹이 또 있을까? 요 라 텡고는 1980년대 미국 인디 언더그라운드의 명맥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밴드 중 하나다. 킴 고든과 서스턴 무어 부부가 이끌던 소닉 유스는 이혼으로 해체됐고, 픽시즈와 다이너소어 주니어는 오랫동안 활동을 쉬었다. 또 R.E.M.과 리플레이스먼츠도 우여곡절 끝에 해체됐다.
요 라 텡고는 1984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다. 그 사이 많은 거대 기업이 무너지고 교황이 두 차례 바뀌고 음악 산업이 붕괴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요 라 텡고는 살아남았다. 이 밴드는 2~4년마다 수준 있는 음반을 발표해 왔는데 특히 ‘Painful’(1993)과 ‘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1997)은 인디 록의 고전으로 꼽힌다.
“요 라 텡고는 대중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면 언제 어떻게 변화를 줘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고 새 앨범의 믹싱 작업을 맡은 존 매켄타이어가 말했다. “그들은 콘도 퍽스라는 가명으로 2개월 동안 활동하는가 하면 콘서트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기도 했다.”
운명의 수레바퀴란 요 라 텡고의 ‘휠 오브 포춘(Wheel of Fortune)’ 투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투어에서는 콘서트 당일 저녁 팬들이 거대한 바퀴를 돌려 그날의 공연 곡목을 결정했다. 바퀴가 돌다가 멈췄을 때 “제목이 ‘S’로 시작되는 노래만 연주하기” 등의 지시어를 가리키도록 디자인됐다. 어느 날은 바퀴가 ‘시트콤 극장’이라는 지시어를 가리켜 요 라 텡고 멤버들이 무대 위에서 TV 시트콤 ‘사인펠드’의 에피소드 하나를 재연하기도 했다.
내가 요 라 텡고의 장수가 정말 인상적이라고 말하자 캐플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우리는 그저 연주를 좋아할 뿐이다. 따라서 30년이 넘도록 활동을 이어온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라 텡고는 1980년대로부터 살아남은 대표적인 인디 록 밴드라고 내가 말하자 캐플런은 다른 그룹들의 이름을 대며 그 영광을 돌렸다. “메콘스는 요즘 활동을 많이 하진 않지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그는 말했다. “플레이밍 립스도 마찬가지다. 우리 친구인 앤티텀도 정말 훌륭하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플레이밍 립스는 매일 밤 같은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반면 요 라 텡고는 즉흥적인 선곡과 설정에서 묘미를 찾는다. 콘서트에서 요 라 텡고가 보여주는 다양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들은 몇 년 전 뉴욕 센트럴파크의 섬머스테이지 공연 때 캐플런의 80대 노모를 무대에 세워 노래를 부르게 했다. 또 2016년 공연에선 실험주의 작곡가 앨빈 루시어와 함께 큰 노란 풍선을 입 가까이에 대고 노래했다. 최근의 하누카 콘서트 때는 사전 리허설 없이 영국 뮤지션 닉 로우와 공연했다.
인터뷰 내내 요 라 텡고는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왔다. 청중이 바퀴를 돌려 연주 곡목을 선택하도록 한 ‘휠 오브 포춘’ 투어를 생각해보라. 맥뉴는 새 앨범도 계획 없이 ‘우연히’ 녹음하게 됐다고 말했다. 캐플런은 지난해 하누카 콘서트 때 공연 몇 주전까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걱정을 몰아서 하는 법을 배웠다”고 맥뉴는 말했다.
이들이 세우는 유일한 장기 계획은 밴드의 미래와 관련된 것이다. 앞으로 30년 후에도 요 라 텡고가 존재할 것 같으냐고 묻자 캐플런이 서슴없이 “물론이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들은 올겨울 하누카 공연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다.
- 잭 숀펠드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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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플런은 친구들이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얼른 그 앨범을 찾아 들려줬다. 요 라 텡고는 수십 년 동안 팬들에게 이처럼 큐레이터 같은 역할을 해 왔다. 1983년 미국 뉴저지 주 호보컨에서 결성된 이 밴드는 콘서트에서 즉흥적으로 다른 뮤지션의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하누카(매년 11월 또는 12월에 8일간 진행되는 유대교 축제) 공연에 깜짝 게스트를 초청하는 걸로 유명하다(요 라 텡고는 한 장소에서 8일 내내 하누카 특별 공연을 하는 걸 좋아한다).
캐플런은 로커가 되기 전엔 록 음악 평론가로 일했다. 요 라 텡고의 음악에는 박식한 문화적 비유와 난해한 리메이크 곡(조지 맥크레이의 ‘You Can Have It All’을 리메이크한 노래가 대표적이다)이 많이 포함됐다. 요 라 텡고로서는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앨범 제목을 올해 다시 끄집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록 앨범 제목에 얽힌 역사를 잠깐 살펴보는 게 좋겠다. ‘What’s Going On’(Going에 아포스트로피가 없다)은 1971년 나온 마빈 게이의 기념비적 앨범 제목이며 ‘What’s Goin’ On’은 1977년 발표된 프랭크 스트로지어 퀸텟의 앨범 타이틀이다. ‘There’s a Riot Goin’ On’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이 게이의 앨범에 대한 답으로 내놓은 걸작으로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미국 사회가 소용돌이치던 시기에 녹음됐다. 그리고 ‘There’s a Riot Going On’은 요 라 텡고의 새 앨범 제목이다.
최근 뉴욕 맨해튼에 있는 마타도어 레코즈 사무실에서 요 라 텡고 멤버들을 만났을 때 캐플런은 “그 앨범 제목이 적합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캐플런은 그의 유니폼이 되다시피 한 옷차림(가느다란 가로줄 무늬 T셔츠와 진바지)으로 밴드의 베이스 주자인 제임스 맥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허블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요 라 텡고는 미국인 수백만 명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지난해 초 이 제목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은 슬라이 스톤의 앨범과는 전혀 다르다. 또 저항감이 느껴지는 제목과 달리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속삭이는 듯한 반복악구와 잔잔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요한 사운드는 앨범 제목과 의도적으로 모순되게 설정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다양한 스타일과 텍스처가 적용됐지만 마구잡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으며 ‘And Then Nothing Turned Itself Inside-Out’(2000) 이후 이 밴드의 가장 따뜻하고 고요한 음악이 담긴 앨범인 듯하다.
이번 앨범 제작 과정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달랐다. 캐플런 부부와 맥뉴, 세 멤버가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이들은 새로운 노래를 작곡하는 대신 그동안 써놓고 사용하지 않은 멜로디와 영화 음악 등을 다시 훑어보면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냈다[외부 엔지니어나 프로듀서의 도움 없이 맥뉴가 프로 툴스(오디오 작업 프로그램)를 이용해 앨범을 제작했다].
“우리는 왜 녹음하는지 그 이유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캐플런은 말했다. “그냥 우리도 모르게 녹음을 하고 있었다. 우린 오랫동안 새 음반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을 가능한 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그랬다. 그저 함께 모여 연주하고 결과물에 대해서는 되도록 신경 안 쓰려고 했다.”
한 가지 놀랄 만한 소식은 호보컨의 마스코트로 여겨지는 요 라 텡고의 멤버들이 이제는 뉴저지 주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캐플런과 후블리는 2014년 조용히 뉴욕 맨해튼으로 이주했다. 뉴저지 주 인디 음악의 중심이자 요 라 텡고의 하누카 공연 장소이기도 했던 원조 맥스웰스 바가 문을 닫은 지 얼마 안 돼서였다(요 라 텡고는 지난해 맨해튼의 바우어리 볼룸에서 다시 하누카 공연을 시작했다). 나머지 멤버인 맥뉴도 브루클린에 산다.
일부 인디 팬에게 요 라 텡고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처럼 뉴저지 주를 상징한다. 하지만 캐플런은 “우리가 호보컨에 살았을 때도 그 도시를 사랑한 건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그곳엔 맥스웰스 바와 기타 바, WFMU(지역 인디 라디오 채널) 등 우리가 유난히 아끼던 것들이 있었다.” 어쨌든 요 라 텡고는 요즘도 호보컨에서 리허설을 하고 그곳에 사서함도 한 개 갖고 있다. 새 앨범도 그곳에 있는 자신들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호보컨은 1980년 대 초 캐플런과 후블리가 만나 밴드를 결성한 곳이기도 하다. 레코드 상점과 콘서트에서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밴드를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지역 신문에 멤버 모집 광고를 냈다. ‘소프트 보이즈와 미션 오브 버마, 러브 등의 밴드와 같은 듯 다른 새 밴드에서 일할 기타리스트 겸 베이스 주자를 모집합니다.’
요 라 텡고는 초반 몇 년 동안 코요테 레코즈에서 그저 그런 앨범들을 발표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다가 1992년 ‘May I Sing With Me’ 앨범을 낼 때 맥뉴가 합류하면서 탄탄한 밴드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감미로운 발라드와 요란한 피드백퍼즈 사운드를 조화시킨 앨범 ‘Painful’로 큰 성공을 거뒀고 그 후 그 명성을 지켜 왔다.
인디 록 밴드 중에 요 라 텡고처럼 확고하게 자기 색깔을 유지하면서 좋은 음악을 꾸준히 발표하는 그룹이 또 있을까? 요 라 텡고는 1980년대 미국 인디 언더그라운드의 명맥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밴드 중 하나다. 킴 고든과 서스턴 무어 부부가 이끌던 소닉 유스는 이혼으로 해체됐고, 픽시즈와 다이너소어 주니어는 오랫동안 활동을 쉬었다. 또 R.E.M.과 리플레이스먼츠도 우여곡절 끝에 해체됐다.
요 라 텡고는 1984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다. 그 사이 많은 거대 기업이 무너지고 교황이 두 차례 바뀌고 음악 산업이 붕괴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요 라 텡고는 살아남았다. 이 밴드는 2~4년마다 수준 있는 음반을 발표해 왔는데 특히 ‘Painful’(1993)과 ‘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1997)은 인디 록의 고전으로 꼽힌다.
“요 라 텡고는 대중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면 언제 어떻게 변화를 줘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고 새 앨범의 믹싱 작업을 맡은 존 매켄타이어가 말했다. “그들은 콘도 퍽스라는 가명으로 2개월 동안 활동하는가 하면 콘서트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기도 했다.”
운명의 수레바퀴란 요 라 텡고의 ‘휠 오브 포춘(Wheel of Fortune)’ 투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투어에서는 콘서트 당일 저녁 팬들이 거대한 바퀴를 돌려 그날의 공연 곡목을 결정했다. 바퀴가 돌다가 멈췄을 때 “제목이 ‘S’로 시작되는 노래만 연주하기” 등의 지시어를 가리키도록 디자인됐다. 어느 날은 바퀴가 ‘시트콤 극장’이라는 지시어를 가리켜 요 라 텡고 멤버들이 무대 위에서 TV 시트콤 ‘사인펠드’의 에피소드 하나를 재연하기도 했다.
내가 요 라 텡고의 장수가 정말 인상적이라고 말하자 캐플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우리는 그저 연주를 좋아할 뿐이다. 따라서 30년이 넘도록 활동을 이어온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라 텡고는 1980년대로부터 살아남은 대표적인 인디 록 밴드라고 내가 말하자 캐플런은 다른 그룹들의 이름을 대며 그 영광을 돌렸다. “메콘스는 요즘 활동을 많이 하진 않지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그는 말했다. “플레이밍 립스도 마찬가지다. 우리 친구인 앤티텀도 정말 훌륭하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플레이밍 립스는 매일 밤 같은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반면 요 라 텡고는 즉흥적인 선곡과 설정에서 묘미를 찾는다. 콘서트에서 요 라 텡고가 보여주는 다양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들은 몇 년 전 뉴욕 센트럴파크의 섬머스테이지 공연 때 캐플런의 80대 노모를 무대에 세워 노래를 부르게 했다. 또 2016년 공연에선 실험주의 작곡가 앨빈 루시어와 함께 큰 노란 풍선을 입 가까이에 대고 노래했다. 최근의 하누카 콘서트 때는 사전 리허설 없이 영국 뮤지션 닉 로우와 공연했다.
인터뷰 내내 요 라 텡고는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왔다. 청중이 바퀴를 돌려 연주 곡목을 선택하도록 한 ‘휠 오브 포춘’ 투어를 생각해보라. 맥뉴는 새 앨범도 계획 없이 ‘우연히’ 녹음하게 됐다고 말했다. 캐플런은 지난해 하누카 콘서트 때 공연 몇 주전까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걱정을 몰아서 하는 법을 배웠다”고 맥뉴는 말했다.
이들이 세우는 유일한 장기 계획은 밴드의 미래와 관련된 것이다. 앞으로 30년 후에도 요 라 텡고가 존재할 것 같으냐고 묻자 캐플런이 서슴없이 “물론이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들은 올겨울 하누카 공연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다.
- 잭 숀펠드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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