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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세기의 담판] 속이고 속아주고 … 퇴로 열어주며 이익 꾀해

[역사 속 세기의 담판] 속이고 속아주고 … 퇴로 열어주며 이익 꾀해

기록된 첫 조약은 히타이트-이집트 협정…1939년 뮌헨 회담, 히틀러 기만 살려줘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담판이자 조약은 기원전 13세기의 히타이트- 이집트 협정이다. 당시 히타이트의 하투실리스와 평화조약을 맺은 람세스2세 석상.
귀가 먹먹할 정도로 천둥이 치고, 검은 먹장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워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 하늘에 햇빛만 찬란해졌다.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극과 극을 내달렸던 북미관계, 한반도 상황을 생각하면 누구나 그처럼 보일 것이다. 국가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쟁은 가장 단순 명쾌한 방법이겠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거나 ‘상처뿐인 승리’가 예상될 때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을 보고, 조약을 맺어 그 지속성을 보증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사를 훑어보면 그런 식으로 역사가 뒤바뀐 일도 많고, 결과를 두고 복기를 해보면 웃거나 울었던 경우도 많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담판이자 조약은 기원전 13세기의 히타이트-이집트 협정이었다. 두 나라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을 걸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러나 전쟁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의 뒤쪽에서 아시리아라는 제3의 강대국도 고개를 들었다. 자칫 어부지리를 아시리아에게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두 나라는 오랜 싸움을 멈추고 화해를 모색했고, 양국의 사신들이 바쁘게 오간 결과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하투실리스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중국 송나라, 요나라 위협 앞에 형제의 의 맺어
그런데 분명히 같은 내용의 합의여야 할 조약문이 좀 이상했다. 이집트 보관본과 히타이트 보관본이 조금 달랐던 것이다. 이집트본에는 람세스 2세의 공덕을 찬양하는 전문이 있었으나 히타이트본에는 없었다. 이집트본에서 람세스는 ‘왕’으로, 하투실리스는 ‘왕자’로 히타이트 왕 쪽이 격이 떨어지게 표현되었으나 히타이트본에서는 동등했다. 한편 히타이트본에서는 ‘히타이트의 다음 왕은 하투실리스의 아들이 되도록 이집트가 보장한다’는 내용이 분명했으나 이집트본에는 모호하게 나타나 있었다.

이것은 통신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현실을 받아들여 전쟁은 멈춰야겠지만 ‘우리 임금만이 위대하시다’는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똑똑히 퍼뜨리고 싶었던 고대의 왕들, 특히 람세스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람세스는 이집트 조약문만 보면 마치 람세스가 큰 선심을 써서 히타이트의 항복을 받아준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11세기의 중국에서도 있었다. 당시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는 신흥 북방민족,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충돌했다. 송나라는 인구와 재력에서 월등했으나 요나라의 정예 기마병들을 압도하지는 못했으며, 대체로 열세에 놓였다. 그러나 본국의 어린 황제의 안위가 걱정되던 요나라 원정군 사령관, 승천태후는 송나라와 화평을 모색했고, 송나라가 이를 받아들여 ‘전연의 맹약’이 1004년에 맺어진다. 요와 송이 서로를 북조(北朝), 남조(南朝)라고 대등하게 인정하면서 송나라가 요나라에 매년 일정한 세폐를 보낸다는 게 골자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양국 백성들에게 따로 전해진 이야기가 있었다. 요나라에서는 ‘송의 황제가 우리 태후를 숙모로 섬기기로 했다’는 내용, 송나라에서는 ‘요의 황제가 우리 황제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두 나라는 형제국의 예를 맺기로 한 것이었고, 송나라가 형이라는 명분을 갖는 대신 요나라에게 세폐라는 실리를 준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이렇게 달리 표현해 자국 백성들에게는 ‘우리가 상대국에게 대승을 거두었다’고 믿게끔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서로 말이 다르다면, 내내 이어질 약속은 못 되지 않을까? 사실 그랬다. 송나라는 전연의 맹약 5조에서 ‘앞으로 영구히 서로 협력하며 평화를 누린다. 이를 어기는 쪽은 천벌을 받는다’고 명시했음에도 금나라가 새로 일어나 요나라를 위협하자 요나라를 기습해서 멸망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천벌’을 받았던지, 금나라에게 요나라에게 받았던 것보다 더한 대우를 감수하며 화평을 간청해야 했다.

1523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도 그렇게 약속을 헌신짝 뒤집듯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그는 필생의 숙적인 독일 황제 칼 5세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는데, 감옥에 갇힌 그에게 칼이 찾아오자 ‘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 뭐든 분부만 내리소서’라며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독일에 많은 양보를 하되 두 집안이 혼인을 맺고 동맹이 된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동맹국들을 끌어들여 칼 5세에게 재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비참한 패배였고, 프랑수아는 차마 강화회담장에 나갈 낯이 없었던지 모후인 루이스를 내보냈다. 독일 쪽에서도 황제의 고모인 마르가레트가 나왔다. 캉브레에서 만난 두 여성은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더니 급기야 서로 머리채를 잡아 쥐고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신나게 싸웠다. 하지만 그렇게 스트레스를 푼 덕분인지, 다시 마주앉아서는 양쪽이 한발씩 양보하는 내용의 캉브레 조약을 맺었다.
 살라딘, 이슬람 세력 통합해 예루살렘 탈환
라파엘로의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훈족의 지배자 아틸라는 서로마까지 점령했지만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으로 군대를 되돌렸다.
담판이 원만히 이루어지는 것은 양쪽의 힘이 비슷할 때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벼랑 끝에 서 있는 쪽에서 천하무적으로 보이는 적과 협상을 이뤄낸 사례들도 있다. 452년, 훈족의 지배자 아틸라는 마치 바람처럼 동유럽 일대를 석권하고 이탈리아까지 이르렀다. 서로마 제국은 이미 멸망의 문턱에 있었고, 아틸라에게 로마가 쑥대밭이 되는 일은 어김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나 군인도 정치인도 아닌 성직자, 로마 교황 레오 1세가 돌연 나섰다. 그는 성직자 몇 사람만 대동하고 아틸라의 진영으로 찾아가 ‘로마를 유린하지 말고 그만 군대를 돌리시라’고 종용했다.

아틸라가 코웃음을 쳤어야 정상이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정말 교황의 말대로 ‘고향 앞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서유럽까지 너무 깊이 들어온 그는 고충이 많았다. 병력의 상당수가 전염병에 걸렸고, 비워둔 우크라이나의 본거지가 다른 세력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컸다. 옛날의 로마라면 모르되 이미 초라해져 버린 로마를 약탈한다고 별 재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레오가 제시한 ‘매년 공물을 받으시고, 서로마를 화살 한 대 안 쏘고 정복했다는 영예를 누리시라’는 조건에 합의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내막을 로마인들은 몰랐고, 레오를 구세주로 받들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서유럽 세계는 가톨릭 교회의 리더십에 의지하게 됐다.

1187년 예루살렘에서도 ‘기적’이 일어났다. 1차 십자군에 의해 탈환된 뒤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였던 이곳은 불세출의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의 손으로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주 병력은 이미 성 밖의 전투에서 완패했기에, 예루살렘을 지킬 병력은 기사 4명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인 발리앙은 사방팔방에서 병력을 끌어모으고, 별 기발한 수단을 써가며 살라딘의 대군을 6일 동안 버텨냈다. 그러나 결국 살라딘군은 성벽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버렸고, 이제 잠시 숨을 고르고 돌격해 들어가기만 하면 성도는 이슬람에게 재정복될 터였다. 그런데 그 구멍으로 발리앙이 홀홀단신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마치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고 외치는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성큼성큼 살라딘에게 다가섰다. 강화협상을 하자는 것이었다.

‘협상은 싸움을 하다가 하는 거지, 이제 다 끝난 판에 무슨 협상이냐?’는 살라딘에게 발리앙은 ‘내가 제 때 돌아가지 못하면 예루살렘의 바위의 도움이 파괴될 것이다’고 유일한 카드를 내밀었다. 바위의 도움은 무함마드가 그곳에서 승천하는 꿈을 꿨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유대인과 기독교인뿐 아니라 무슬림에게도 예루살렘이 성도인 이유가 되고 있었다. 살라딘이 폭압적인 군주였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진격 명령을 내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온화한 성품이었고, 십자군을 물리치고 이슬람 세계를 구원한 자신의 명예가 성지 파괴라는 얼룩으로 더럽혀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무기를 거두고, 놀랄 만큼 관대한 조건으로, 예루살렘 시민들과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한국 사상 가장 빛나는 외교 성과로 꼽히는, 993년 고려 최고의 협상가로 알려진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 사이에 이루어진 담판도 그런 예다. 무려 80만 대군이라는 거란의 병력 앞에서 왕을 비롯한 모든 조정 신하들은 벌벌 떨면서 땅을 떼 주고 항복할 궁리만 했다. 그러나 오직 서희만이 ‘제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외쳤으며, 소손녕에게 가서 당당하게 협상에 임했다. 그 결과 거란의 대군을 돌아가게 했을 뿐 아니라, 강동 6주까지 받아내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까지 늘렸다.

그렇다고 소손녕이 바보는 아니었고, 서희가 최면술을 쓴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거란의 전쟁 목적은 고려의 땅을 얻으려는 게 아니고, 송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고려를 자기 편으로 삼으려는 데 있었다. 또한 강동 6주는 본래 여진족의 땅으로 거란으로서는 유지하기가 힘들었는데, 고려에게 던져 준다면 이 땅의 영유권을 두고 고려와 거란이 서로 다툴 것이다. 그러면 거란은 아무 걱정 없이 송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지 않겠는가?
 1945년 얄타회담, 한반도 분단을 잉태
2차 대전 후 세계 질서의 새 판을 짠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의 지나친 양보로 냉전구도를 초래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이처럼 ‘사자가 생쥐 앞에서 꼬리를 보인’ 사례들은 대개 사자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바깥에서 어찌 알겠는가. 그러기에 레오 1세, 발리앙, 서희의 위대함을 되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름의 이유’라는 게 너무 지나쳐서, 힘이 막강함에도 약자에게 오히려 저자세로 대하고, 그 결과 길이 후회할 일을 남긴 사례들도 있다. 1938년 9월, 독일의 뮌헨에서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정상들이 마주앉았다. 독일의 대표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의제는 체코슬로바키아(자국의 문제였음에도 회담장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의 주데텐 지방 귀속 문제였다.

넓이로는 체코의 6분의 1이지만 지하자원과 산업시설로는 70%가 넘는 주데텐은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히틀러가 독일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떼를 쓰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 생떼를 들어줄 명분도 법도 없었다. 실력으로 보아도,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독일을 어른이 어린애 팔 비틀 듯 꺾어버릴 수 있었다. 심지어 체코조차 자력으로 독일과 충분히 맞설 만했다. 그러나 회담 결과는 참담했다. 히틀러가 요구했던 주데텐을 떼어줄 뿐 아니라, 그 밖의 지역까지 덤으로 넘겨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수동맹을 맺었던 프랑스에게조차 처절하게 배신당했다.

결국 조기에 꺾어 버릴 수 있었던 히틀러의 기를 한껏 살려주고,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뮌헨 회담은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다. 그래도 영국 대표 체임벌린이나 프랑스의 달라디에는 변명거리가 있었다. 당시는 마르크시즘이 독일을 중심으로 무섭게 들끓던 때였고, 만약 히틀러를 제거한다면 붉은 물결이 노도처럼 유럽을 덮칠 지도 몰랐다. 따라서 울며 겨자 먹기로 히틀러의 생떼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선택이 사상 최악의 대전쟁과 인류사에 지워지지 않을 오점이 될 인종 청소의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 최악의 대전쟁을 마무리하려 모였던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도 아쉬움을 남겼다. 당시 미국과 영국 등은 나치에의 승리를 거의 눈앞에 두고 있었고, 예정대로라면 독일뿐 아니라 체코·헝가리 등 동유럽의 대부분도 서방 군대가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심각한 병으로 판단력과 의지력이 흐려져 있었고, 소련에게 불필요하게 많은 양보를 했다. 그 결과 일부 미군과 영국군은 애써 점령한 곳에서 후퇴하며 소련군이 회담에서 정해진 대로 점령하도록 배려해야 했고, 그런 지역은 고스란히 소련의 위성국가가 됐다. 루스벨트가 좀 더 강단 있게 회담에 임했다면 전후의 냉전시대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담판·회담·조약은 이처럼 대표자의 인성과 지성에 많이 좌우된다. 그리고 조약문의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가 언젠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 따라서 당장 담판이 성사됐다, 결렬됐다는 표면상의 결과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그 맥락을 살피고 미비한 점을 지적하며 장래를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더 확실한 것은, 전쟁보다는 담판이 낫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겉으로 실패한 듯한 담판도 포함한다. 가령 냉전 말기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사이에 진행된 회담을 보면, 두 정상은 1985년 제네바, 1986년 레이캬비크, 1987년 워싱턴, 1988년 워싱턴까지 모두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런데 끝내 기대된 만큼의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SDI(전략방위구상) 폐기를 원하는 소련과 어떻게든 고수하려는 미국의 입장이 접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차례의 회담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회담 이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
냉전의 최전선에서 서로를 불신하던 두 정상은 회담을 계속하면서 서로를 믿고,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중대한 국익 앞에서 섣불리 샴페인을 터뜨릴 수는 없었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한 양보하며 협조하려는 자세를 갖게 됐다. 그리하여 냉전의 벽은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대화하면서 동시에 케이크를 먹을 수는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대화하면서 동시에 싸움박질을 할 수는 없다’도 맞는 말이다. 회담의 분위기에 들떠 현실을 보지 못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어쨌든 회담을 계속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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