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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어때서 연기하기 딱 좋은 나인데…”

“내 나이가 어때서 연기하기 딱 좋은 나인데…”

연기 경력 70년의 거장 크리스토퍼 플러머 “90세 넘어서도 새로운 연기 보여주고 싶다”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인생의 황혼기에 배우로서 젊은이 못지않게 새로운 경력을 계속 쌓는다. / 사진:AP-NEWSIS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이아고(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 나오는 간악한 인물)를 연기한 것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자꾸만 원숭이에게 정신이 팔렸다.

오해하지 마시라. 진짜 원숭이가 아니라 그림을 말한다. 플러머의 거실 벽에 걸린 그 멋진 18세기 그림은 짓궂은 원숭이가 과일 접시를 습격하는 장면을 담았다. 바로 그의 어깨 위쪽으로 보여 더욱 나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88세의 캐나다 출신(토론토에서 태어났다) 배우 플러머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그처럼 다른 데 정신이 팔리는 모습에 익숙한 듯이 갈피를 못 잡는 나의 눈길을 보며 싱긋이 웃었다.

미국 코네티컷주 서남부의 울창한 숲 속에 숨어 있는 오래된 농가를 개조한 그의 집은 ‘동물의 왕국’에 나올 법한 신전 같았다. 원숭이와 새 등의 동물이 벽에 걸린 그림과 쿠션에 새겨진 장식, 사진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개가 왕이었다. 개를 무척 좋아하는 플러머는 “솔직히 난 사람보다 개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난 사랑받는 걸 좋아하고 사랑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위인이다. 반려견은 단 2초 안에 주인에게 사랑을 준다.”

그에 비하면 사람은 잘 알다시피 그리 쉽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인생의 황혼에 이른 플러머는 배우 경력 후반에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를 보면 세계적 흥행을 거둔 1965년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트랩 대령으로 스타 대열에 올랐던 그의 젊은 시절이 아득히 멀리 느껴진다. 50년이 훨씬 넘었으니 실제로 다른 세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2년 전 찍은 영화에도 개가 많이 나온다. 베라 파미가와 함께 주연을 맡은 샤나 페스트 감독의 ‘바운더리스’다. 파미가는 거리에서 유기견을 보면 데려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싱글맘이다. 플러머는 그녀의 아버지로 나온다. 그는 마리화나를 밀매하는 범죄자로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곁에 없었던 지독히 못난 아버지다. 그가 요양원에서 쫓겨나자 그녀는 문제 있는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와 함께 미국 전역을 떠돈다. 3대에 걸친 이 이야기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89년 영화 ‘패밀리 비즈니스’(숀 코너리가 불법을 일삼는 할아버지를 연기했다)를 떠올리게 한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플러머는 루멧 감독의 1958년 영화 ‘스테이지 스트러크’로 영화에 데뷔했고, 코너리와는 1975년 영화 ‘왕이 되려던 사나이’에 같이 출연했다.

플러머는 카리스마 넘치고 재치 있으며 허풍을 잘 떠는 멋쟁이 캐릭터를 자주 연기한다. 사실 그가 발산하는 에너지가 바로 그렇다. 나를 맞으러 집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회색 바지와 격자 무늬 상의 차림으로 아주 말쑥했다. 플러머는 1980년대 초 이래 세 번째 아내와 살고 있다. 영국 배우 일레인 테일러다. 그에겐 딸이 하나 있다. 첫 아내 고(故) 태미 그라임스에게서 태어난 아만다 플러머로 그녀 역시 배우다.

‘바운더리스’에서 플러머가 연기한 캐릭터는 이 작품의 대본 작가이자 감독인 페스트의 실제 아버지를 모델로 했다(그는 마약상이자 도박판 사기꾼이었다). 페스트 감독은 “아버진 위법이나 불법을 예사로 저질렀다”고 말했다. “내 대학 학비도 아버지가 어디서 가져온 ‘검은 돈’으로 지불했다.” 배역 담당이 그 역할에 플러머를 제안하자 페스트 감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플러머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대가이고 아주 세련됐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감방을 들락날락했고 몸이 문신으로 덮혀 있었으며 늘 마라화나를 피웠다. 그가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하겠나?”

그러나 플러머는 대본을 읽은 뒤 그 작품에 끌렸다. “평생 편히 누워 쉴 자리도 없는 이 끔찍한 늙은이를 연기하고 싶었다.” 그는 실제로 그 역할에 거칠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불어넣었다. 페스트 감독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도 가끔씩 영화에서 외면당할 수 있지만 플러머 만큼은 누구도 외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도 매력이 넘친다.”

플러머는 자신의 방탕했던 과거에서 영감을 얻었다. 1950년대 브로드웨이 연극 배우로서 주색에 빠져 지내던 시절을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땐 우리에게 규칙이 하나 있었다. 밤새 마시고 술에 취한 채 ‘햄릿’ 낮 공연을 끝까지 볼 수 없으면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린 늘 그랬다.”

당시 ‘헨리 5세’ ‘햄릿’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맥베스’ 등 브로드웨이 고전극의 대가였던 플러머는 술친구로 동료 배우 제이슨 로바즈와 늘 어울렸다. “1950년대 초엔 누구나 술을 많이 마셨다. 우린 늘 보드카를 좋아했다. 아주 신나던 시절이었다.”

플러머는 나와 ‘바운더리스’에 관해 인터뷰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그 영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줄거리를 잊어버렸다. 내가 맡은 캐릭터가 무엇을 했는지 까먹었다.” 2년 전 그 영화를 찍은 이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초 그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역사 스릴러 영화 ‘올 더 머니’를 찍던 리들리 스콧 감독이 케빈 스페이시를 대신할 배우를 급히 찾고 있었다. 스페이시는 ‘미투’ 운동으로 불명예스럽게 하차해야 했다(‘나도 당했다’는 의미의 ‘미투’ 운동은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성추행당한 여배우들의 폭로로 촉발된 전 세계 각 분야 여성의 성범죄 고발 운동이다). 스페이시는 ‘올 더 머니’에서 석유로 억만장자가 된 성미 고약한 구두쇠 J. 폴 게티 역할을 맡아 촬영을 마친 상태였지만 성추문이 불거지면서 그가 나오는 장면이 삭제돼야 했다. 스콧 감독은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플러머를 설득했다. 사실 그는 게티 역할을 처음부터 플러머에게 맡길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플러머가 역사적 인물을 소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나이도 딱 맞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작사는 더 인기 있는 배우인 스페이시를 선택했다. 57세인 스페이시는 나이 들게 보이려고 보철까지 동원하는 공들인 분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플러머는 스콧 감독의 제안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12월 개봉 예정이라는 사실에 비춰 볼 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엔 ‘맙소사! 개봉까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해내지?’라는 걱정이 앞섰다”고 돌이켰다. “그러다가 ‘그런데 가만 있어 봐. 아주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구먼’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플러머는 고약한 사람을 다루는 요령을 안다. 그런 사람을 연기하는 이론도 터득했다. “사악하고 추잡한 캐릭터를 맡으면, 예를 들어 문학에서 가장 간악한 이아고 같은 등장인물을 연기할 때는, 그를 최대한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실제로 그는 1982년 브로드웨이 연극 ‘오셀로’에서 이아고를 연기해 토니상 후보로 지명됐다(그는 토니상 후보로 7차례 지명돼 2차례 수상했다). “난 ‘올 더 머니’의 고약한 캐릭터인 게티도 그렇게 연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스콧 감독과 얘기한 지 바로 두어 주 지난 뒤 바로 카메라 앞에 섰다. 영화는 결국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1000만 달러를 들여 황급히 재촬영을 마쳤다. 몇 주 뒤 스페이시의 낙마에 관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무성한 가운데 영화가 개봉됐다. 곧 플러머는 자신의 연기가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강행군으로 9일 동안 촬영했는데 아카데미상 후보 지명에다 골든글로브상 후보 지명까지 받았다. 정말이지 얼떨떨했다.” 진짜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맙소사! 어떻게 예상하겠나. 난 대사를 까먹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플러머는 스페이시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가 과거 10대 남자 배우를 성추행했다는 스캔들은 금시초문인 듯했다. “난 전혀 몰랐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플러머는 ‘웨인스타인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본 아주 희귀한 남성 저명인사다. 그는 들불처럼 번진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 “여성이 나서는 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정말 역겹다. 나도 얌전하고 고상한 체하는 위인은 결코 아니지만 그들은 아주 불안정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찰리 로즈(성추행 의혹으로 CBS 뉴스에서 해고된 유명 토크쇼 진행자 겸 앵커)처럼 잘 생긴 남자가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뭔가 아주 잘못됐다. 이제 여성이 주저 없이 그런 일을 폭로할 수 있게 돼 세상이 달라졌다.”

(맨 위 부터 시곗바늘 방향으로) 영화 ‘바운더리스’에서 플러머는 마리화나를 판매하는 범죄자 할아버지로 열연했다. 영화 ‘올 더 머니’에서 플러머(오른쪽)와 마크 월버그 사이에서 연기를 지도하는 리들리 스콧 감독. 플러머는 영화 ‘비기너스’로 2012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965년작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줄리 앤드류스와 연기하는 플러머. / 사진:SONY PICTURES CLASSIC, AP-NEWSIS, XINHUA-NEWSIS, WIKIMEDIA COMMONS
플러머는 배우 경력 70년으로 스페이시의 나이보다 더 오래 연예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특히 과거 연극 무대에서 ‘여성 배제’ 문화로 상당히 덕을 봤다고 인정했다. “난 연극 무대에서 모든 주요 역할을 맡았다. 이젠 여성이 나서서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남성이 맡던 역할을 차지하려 한다. 난 여성이 진출하기 전에 이미 그런 역할을 다 해 봐서 별로 아쉽지 않다.”

플러머는 인터뷰하는 동안 단 한번 내게 짜증을 냈다. “이런! 이 빌어먹을 인터뷰는 ‘사운드 오브 뮤직’만 얘기하려고 하는군.” (그러곤 곧바로 그냥 해본 농담이라는 뜻으로 싱긋 웃었다.)

아마도 내가 ‘사운드 오브 뮤직’에 관해 너무 오래 물었나 보다. 잘 알다시피 플러머는 그 영화에서 폰트랩 대령 역할을 맡았다. 그것이 그의 최고 연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가장 유명한 역할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는 특히 그 작품에 냉소적이다.

“그때의 이미지가 계속 남아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폰트랩 대령의 이미지가 고착되면서 그와 똑같이 자의식 강한 캐릭터의 섭외가 계속 들어왔다. 진짜 재미없고 따분한 캐릭터였다. 난 성격파 배우가 되길 원했다. 지루한 주인공이 되는 건 정말 못할 일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줄리 앤드류스(플러머는 아직 그녀와 아주 친하게 지낸다)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 그처럼 반듯하고 밋밋한 작품이 될 줄은 몰랐다. 플러머는 오스트리아 현지 촬영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덜댔다고 돌이켰다. “그땐 정말 젊은 시절이라 내가 아주 오만했다. 난 폰트랩 대령이라는 캐릭터가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밥 와이즈 감독이 내 투정을 어떻게 참고 촬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늘 영화가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내게서 얻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플러머는 ‘사운드 오브 뮤직’ 덕분에 다른 수많은 영화도 찍게 됐다. 그는 당시 35세였다. 브로드웨이 연극의 명배우로서 처음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기가 어색했다. 10년 뒤 그는 ‘왕이 되려던 사나이’를 만든 존 휴스턴 감독으로부터 가장 기억에 남는 충고를 들었다. 플러머는 그 작품의 내레이터인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을 연기했다. 극중에서 그는 숀 코너리가 맡은 캐릭터의 잘려진 머리를 발견한다. “내가 그 머리에 대고 얘기하는 장면이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대사였다. 하지만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 휴스턴 감독이 말했다. “이봐, 목소리에서 음악만 빼면 좋겠어.”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감정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감상적인 연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배운 것이다. 그 이래 플러머는 맡은 모든 역할에서 최대한 감정을 억제했다. 그는 잉글랜드 상류층 특유의 말투와 근엄한 표정, 차분한 태도 덕분에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연기했다. 키플링을 비롯해 프랭클린 루즈벨트, 아서 웰즐리(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안긴 웰링턴 장군)가 대표적이다. 그가 출연한 영화를 나열하면 역사 재연에 관한 입문 과정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다가 70회 생일 직전에 그의 경력에서 부흥기가 찾아왔다. 그해 그는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인사이더’(담배회사의 비리를 폭로한 회사 임원과 방송을 놓고 고민하는 제작진의 이야기를 다뤘다)에서 미국 CBS 방송 시사프로그램 ‘60분’의 전설적인 진행자 마이크 월리스 역을 맡아 말 그대로 눈부신 연기를 펼쳤다. 그 뒤 론 하워드 감독의 ‘뷰티풀 마인드’, 스파이크 리 감독의 ‘인사이드 맨’ 등 굵직한 작품을 잇따라 맡았다.

특히 그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서 톨스토이 역을 맡아 2010년 처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30세에 자신이 인생의 실패자라고 느낀 예술가가 있다면 플러머를 보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젊음이란 과대평가된 개념이라거나 젊음이 영원할지 모른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처럼 88세에도 창의성이 넘치도록 활기와 기술, 무모한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말이다. 플러머는 “나 스스로는 늙었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주변에서 나를 늙은이로 분류한다.”

특히 그가 82세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최고령 배우가 되면서 그런 어리둥절한 순간이 왔다. “그때 난 ‘맙소사, 이제 처신을 똑바로 해야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은 마이크 밀스 감독의 ‘비기너스’(2011년 개봉)로 받았다. 이완 맥그리거와 플러머가 공동 주연을 맡은 기발한 로맨틱 코미디다. 플러머는 늙은 동성애자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그는 오래 같이 지낸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커밍아웃하기로 결심하고 남자친구를 사귄다. 그 영화에서 플러머가 연기한 캐릭터 올리버는 ‘올 더 머니’에서 맡은 성미 고약한 게티와 정반대로 아주 부드럽고 열정적이며 ‘꺼지지 않은’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플러머는 그때까지 영화에서 동성애자 로맨스를 연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불안이나 긴장이 전혀 없었다.” 페스트 감독은 특히 그 영화를 보고 플러머의 연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그가 맡은 역할에 완전히 몰입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에도 영화 출연 섭외가 계속 들어왔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부유한 가장 역할,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에서 에베네저 스크루지 역할, ‘바운더리스’에서 마약을 파는 할아버지 역할 등. 그렇다면 그는 배역을 어떻게 선택할까? 설마 제의를 전부 다 받아들이는 건 아니겠지? “가능하면 해보려고 한다. 나처럼 나이 들고 사람들이 늘 내게 늙은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상황에선 힘이 닿는 데까지 해보는 게 최고다. 계속 일해야 건강을 유지한다. 난 일이 정말 좋다.”

플러머는 아직은 쉬거나 은퇴할 계획이 없다. “은퇴한 친구들을 보면 참 안됐다. 인생이 끝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은퇴한 뒤 그냥 무너지고 만다. 끔찍하다.” 그는 일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생각이 드는 한 연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연기를 계속하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환상적이지 않을까?”

희한하게도 ‘비기너스’가 플러머의 경력에서 현재 상황을 가장 잘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맡은 캐릭터는 암에 걸렸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스스로 자신을 되찾아 간다. 플러머는 테니스와 피아노 연습으로 활력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토론토 교향악단과 함께하는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셰익스피어 교향악’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앞두고 있다(그는 연주가 아니라 희곡의 일부를 낭송한다). 그 외에 또 다른 ‘유명한 실제 인물’을 연기하는 일도 논의 중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플러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내게 밝히지 않았다.

아무튼 플러머는 10년 단위로 새롭게 태어나는 듯하다. 그는 “이제 또 다른 경력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아주 멋지지 않은가? 90대엔 여자로 분장해 주요 배역을 다시 맡으면 좋겠다.”

- 잭 숀펠드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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